||<-2> '''[[|{{{#ffffff 대한민국 최초 민간협동조합 창립자}}}]][br]{{{#ffffff {{{+1 전준한}}}[br]錢俊漢 | Jeon Jun-han}}}'''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220517410.jpg|width=100%]]}}} || ||<|2> '''출생''' ||[[1898년]] [[3월 6일]]|| ||[[경상북도]] [[상주시|함창군]] 현내면 오사리[br](현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오사리)|| ||<|2> '''사망''' ||[[1967년]] [[12월 23일]] (향년 70세)|| ||[[충청남도]] [[대전광역시|대전시]] [[대흥동(대전)|대흥동]][br](현 [[대전광역시]] [[중구(대전)|중구]] [[대흥동(대전)|대흥동]])|| || '''묘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리 || || '''본관''' ||[[전(성씨)#s-4|문경 전씨]][* 21세 한(漢) 항렬.]|| || '''호''' ||목촌(牧村)|| || '''형제''' ||동생 [[전진한]]||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최초 민간[[협동조합]](함창협동조합) 창립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49141&cid=43667&categoryId=43667|퍼스트펭귄]]''' == 생애 == 1898년 3월 6일 경상북도 함창군 현내면 오사리(현 상주시 함창읍 오사리)에서 아버지 전석기(錢晳起, 1879. 1. 28 ~ 1955. 7. 22)[* 초명 전경준(錢京俊).]와 어머니 [[박(성씨)|상주 박씨]](尙州 朴氏) 박성악(朴城岳, 1880. 11. 21 ~ ?)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전약우(錢若雨, 1827. 8. 21 ~ 1891. 7. 17)[* 아명은 전중종(錢仲宗).]는 1888년 4월 29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25_04A_29A_00270_2003_128_XML|임명되었던]] 무관이었다. 1911년 상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상주공립간이농업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경상북도 도순사(道巡査)로 근무했다.[* [[http://db.history.go.kr/id/gb_1922_11_08_a30730_0170|1922년 11월 8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1922년 9월 18일 당시 [[경상북도지사]]로부터 정근증서(精勤證書)가 몰수된 기록이 보인다.] 1925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니혼대학]](日本大學) [[법학부]] [[법학과|법률과]]에 입학했다. 이후 동생 우촌 [[전진한]]을 비롯한 도쿄 유학생들과 함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27847&cid=46623&categoryId=46623|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를 창립하고 「협동조합운동의 실제」라는 팸플릿을 제작했다. 도쿄제국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6년 가정을 돌보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 상주군으로 돌아왔다. '협동조합운동의 실제'를 전국 각 군·읍·면에 무료로 배포했다. 1927년 1월 상주군 함창면에서 황이정(黃履正) 등과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협동조합인 함창협동조합(咸昌協同組合)을 [[http://db.history.go.kr/id/su_008_1927_01_99_0980|설립하고]], [[전무이사]]에 취임했다. 설립 당시 함창협동조합의 자본금은 4,000원, 회원은 400명에 달했다. 그 뒤 4월 10일에는 상주군 상주면에서 김원준(金元俊)·김원택(金元澤) 등과 함께 자본금 1,500원, 회원 150명 규모의 상주협동조합(尙州協同組合)을 [[http://db.history.go.kr/id/su_008_1927_04_99_1270|설립했다]]. 이후 전국 각 지방을 순회하며 협동조합 조직을 직접 지도했다. 1929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협동조합 중앙경리조합 상무이사에 취임했는데, 이 때문에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여러차례 구금([[구속]])되었다. 1930년 10월 31일 [[동아일보사]] 덕천지국 기자에 [[http://db.history.go.kr/id/npda_1930_11_05_v0003_0550|임명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12월 12일까지 「[[http://db.history.go.kr/id/npda_1930_12_04_v0006_1230|全朝鮮(전조선)에 模範的(규범적)인 平安協同組合訪問記(평안협동조합방문기) 六個郡(6개군)에 十四個(14개)의 營業所(영업소) 現在組合員(현재조합원)은 實(실)로 五千名(오천명)]]」이라는 기사를 총 4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다. 1933년에는 경성부에서 "백세경창 가족규범"을 발행했다. 1943년부터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진한과 함께 [[강원도]] [[금강산]], [[오대산]] 등지에서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상경하여 전진한과 구국운동에 참여했고, 서울특별시에서 협동조합운동사 재건 고문에 취임하는 한편, [[법무사|사법서사]]로 일하기도 했다. 또한 [[대한노동총연맹]]에 입당하면서 [[우익]]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하기도 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노동총연맹]] 후보로 경상북도 상주군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백남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1년 대전시 금강주조 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1952년 [[임시수도]]였던 [[부산시]]에서 「협동조합운동의 신구상」을 저술했고, 1953년에는 구국자조운동(성미전축운동)을 전개했다. 1958년 서울특별시에서 「윤리도덕도」를 저술해 배포하였다. 이어 구국[[https://ko.dict.naver.com/#/entry/koko/08ee7f26dba44cc8b386169cd07e007b|자조]]운동과 윤리도덕진흥운동에 종사했다. 1960년 6월 29일에는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상주군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김기영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했고, 1965년 [[대전시]] [[도마동]](현 [[대전광역시]] [[서구(대전)|서구]] [[도마동]]) 363번지에 있던 '복지농도원' 상임고문에 취임했다. 상임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농도원장 한인수에게 구국자조운동 일체를 전수하는 등 농도원을 지도, 육성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여 1966년 복지농도원이 [[5.16 민족상]]을 수상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196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대전광역시|대전시]] [[대흥동(대전)|대흥동]](현 [[대전광역시]] [[중구(대전)|중구]] [[대흥동(대전)|대흥동]])에서 [[별세]]했다. == 함창협동조합 == === 시대적 배경 ===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 방법을 바꾸어 놓았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대체로 합방([[경술국치]])에서부터 [[3.1운동]]까지의 제1기, 3.1운동부터 [[만주사변]]이 일어나기까지의 제2기, 만주사변 이후부터 일본이 [[패전]]해서 해방까지의 제3기로 나눈다. 함창협동조합을 창시한 시점은 제2기다. 제2기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60102&cid=47306&categoryId=47306|문화정치]] 시기로 3.1운동에 놀란 일본이 [[무단통치]]만으로는 조선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문화통치]]를 명분으로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557536&cid=47306&categoryId=47306|민족분열정책]]으로 바꾸어나간 시기이다. [[헌병경찰제도]]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937014&cid=40942&categoryId=31690|보통경찰제도]]로 바꾸고 조선어 신문의 발간을 허가하고 [[집회]]와 [[결사]]를 어느 정도 허용했다. 그러나 농촌의 사정을 나날이 피폐해져만 갔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681&cid=46623&categoryId=46623|조선금융조합연합회]]의에 의하면 1926년에서 1931년 사이 물가의 총 평균지수는 232에서 140으로 떨어진 데 비해, 농산물평균지수는 262서 129로 훨씬 더 내려갔다. 이와 함께 총독부가 지지하는 지주 중심의 농업생산구조가 형성되어 지주들이 소득 보전을 목적으로 공황으로 인한 피해를 소작농들에게 전가했다. 이처럼 일제 [[https://www.happycampus.com/report-doc/24577283/|식민농정]]과 [[세계대공황]]의 영향이 겹치면서 1920년대 후반 조선 경제 특히 농촌 경제에 거대한 위기가 일어났다. [[민족주의자]]들은 이 시기를 조선 농촌의 [[파멸]] 상황으로 규정했다. 그 원인으로 [[산미증식계획]], 농산물 가격정책, 농민 보호 정책, 금융조합의 역할 등을 꼽고, 그 책임은 일제의 잘못된 조선 경제 운영에 있다고 보았다. 한편 이 시기 조선인의 일본 유학은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1919년 600여 명이었던 유학생 수는 1926년 3,200명으로 늘어났다. 유학생 사회의 확대와 함께 자신들의 조직을 꾸리는 일도 점차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유학생이 많아질수록 자신의 색을 띈 단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3.1운동으로 민족운동이 [[분화]]되어 갔듯, 일본 유학생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나라를 위하는 방법과 실천에 고심하기 시작했다. '한빛'도 그 중 하나의 단체였다. === 한빛회와 협동조합운동사 === 한빛회는 전준한을 포함하여 [[전진한]], [[이선근]], [[이하윤]] 등 [[사회주의]] 운동에 회의적인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만든 단체이다. 한빛은 '[[https://ko.dict.naver.com/#/entry/koko/9f3b4716a0424319a5af543690cb05b2|공명정대]]'란 뜻으로 1924년에 조직됐다. 한빛 회원들은 [[관동대지진]] 당시 [[관동대학살]]이 일어난 후, 학교마다 있는 유학생회 말고 별도의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조직체를 생각했다. 한빛의 주도자 중 한명인 전준한 선생의 동생 전진한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11418&cid=50765&categoryId=50778|민족운동]]을 개척할 핵심조직체로서 이 조직을 설립했다"고 했다. 이 한빛 회원들은 네 개의 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협동조합 연구 모임, 외국문학연구회, 사이언스클럽, 농우연맹 등이다. 이 중 협동조합 연구 모임은 1926년 이름을 '협동조합운동사'라 지었으며, [[와세다대학]]의 스콧트홀에서 조직됐다. 기존까지 실제운동과는 거리를 갖고 있던 유학생들이 협동조합을 그 방편으로 내건 경제운동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원활하지 못했다. 학업을 마치면 곧바로 귀국하는 학생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에서 뒷심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전준한과 전신한은 의기투합해 협동조합운동을 지속했다. === 창시와 해산 === 1926년 전준한이 학업을 뒤로한 채 고향 상주로 돌아온 이유는 두 가지로 추려볼 수 있다. 첫번째는 가난한 집안 환경 즉, 가정을 돌보기 위해 돌아왔으며, 두번째는 국내 협동조합 [[선전]] 조직에 힘쓰기 위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집 한켠에서 함창협동조합을 차려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했다. 이 자그마한 협동조합운동이 요원의 들불처럼 번져 이 나라 전 농민이 함께 고루 잘 사는 세상을 꿈꾸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그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는 함창군 일대를 순회 선전하는 동시에 각 동(洞)의 유력자 30여명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8957&cid=40942&categoryId=31821|발기인]]을 모집한 후 약 1개월간 준비했다. 마침내 그해 1월 14일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였지만 순탄하지 않았다. 발기인은 전원 불참하고, 노인 7~8명만이 출석했기 때문이다. 전준한이 발기인 몇 명을 직접 찾아가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가난한 자들은 무능한데, 누가 그들을 믿고 거액을 투자하겠냐"는 매몰찬 말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준한은 농민 8명과 함께 발기인 총회를 치뤘다. 전준한이 이때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일본 유학 당시 뜻을 같이한 유학생들과 세계협동조합 모델들을 탐구했기 때문이다. 독일, 벨기에, 프랑스, 러시아, 스위스 등 모든 국가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9620&cid=40942&categoryId=31811|전시경제]] 속에서 어렵게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했고, 끝내 성공했다는 사실을 전준한은 알고있었다. 협동조합 발기인 총회 이튿날, 조합원 전원이 전력을 다해 조합원을 모집한 결과, 수일 만에 60여명을 모집했다. 석유 한 두레박, 성냥 약간, 소다 한 통을 사서 시작한 영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 이상의 결과를 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함창시장([[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9620&cid=40942&categoryId=31811|현 상주중앙시장]])에 3원짜리 월세 사무실을 구했으며, 창립 4개월만에 422명의 조합원과 100여종에 달하는 품목을 취급하게 되었다. 그해 5월에는 여자[[야학]]을 열어 경비 일체를 부담하여 40여 명에게 교육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이후 '함창협동조합'을 모방한 협동조합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했으며 1930년대에 들어 그 수만 100여 개에 달했다. 하지만 더 이상 [[https://ko.dict.naver.com/#/entry/koko/f65b77c75ed1489e9bf7f46689c751aa|좌시]]할 수 없었던 일제가 1933년 [[해산]]명령을 내려 [[와해]]수준으로 접어든다. === 이후 행적 === 함창협동조합이 해산된 후, 때를 기다리며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전준한은 [[한국전쟁]] 중 협동조합법을 직접 마련했다. 1953년엔 협동조합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성미저축운동을 골자로 하는 구국[[https://ko.dict.naver.com/#/entry/koko/08ee7f26dba44cc8b386169cd07e007b|자조]]운동을 전개했고, 1958년에는 '윤리도덕도'를 직접 창안해 윤리도덕진흥운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대전 복지농도원 [[https://ko.dict.naver.com/#/entry/koko/cc53e5e9a8c743439b528303aea7132b|상임고문]]으로 있으면서 한국 농민운동의 선구자인 한흙 한인수 선생에게 자신이 평생 바쳐온 농민운동 일체를 전수하며 마지막까지 참 농부로 살았다. 전준한의 숨은 노력으로 복지농도원은 제1회 [[5.16 민족상]]을 수상하는 등 자신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376658&cid=50762&categoryId=51365|직분]]과 [[사명]]에 최선을 다해 살아갔다. == 협동조합의 의미 == 전준한은 협동조합의 의의를 다음 3가지에 찾았다. >- 협동조합운동은 [[자본주의]] 제도의 [[결함]]에서 산출된 각종 [[사회 운동]]의 하나의 형태이다. >- 경제적 약자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0153&cid=40942&categoryId=31614|상호부조]]의 협력에 의하여 그들의 경제적 향상을 기도하며, 자본주의의 결함을 배제하려는 사회 [[https://ko.dict.naver.com/#/entry/koko/685541cce6c94d26adb3fb2ff75582c9|이상]]을 가지고 발생한 경제적 조직체이다. >- 협동조합은 그 내용에 있어서 여러 가지의 형태를 포장하고 있으나 즉 소비, 신용, 생산, 판매, 이용 등의 조합이 이것이다. 전준한은 동생 전진한의 이론서를 바탕으로 "전인구의 8할을 점유한 대다수의 농민생활은 나날이 파명의 [[심연]]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고 이를 타개할 방편으로 협동조합운동을 내세웠다. 전준한의 협동조합운동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조직 운영에 있을 것이다. >1. 출지는 일인일구(一人一口)주의 ([[https://ko.dict.naver.com/#/entry/koko/18d3efd5974e457ab65a2dc53b2c5928|유산자]]의 [[https://ko.dict.naver.com/#/entry/koko/f0d912f8c8714c87b417d7b1a110a74d|전횡]]방지) >2. [[배당]]은 이용액에 따라 (잉여금배분의 공평) >3. 매매는 시가현금주의 (소자본의 운전[[https://ko.dict.naver.com/#/entry/koko/2ea3c673ec604b12a25549c80226ec0d|민활]]) >4. 빈인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7789&cid=40942&categoryId=31909|출자]]불입 [[유예]] (사업의 대중화) 이 원칙들은 현대의 협동조합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협동조합운동의 실제' 5조에는 '협동조합실지경영에 관한 주의(7항)'가 있고, 6조에는 '협동조합의 [[지도자]]에 대한 주의(4항)'가 있다. [[성실]]할 것, [[절약]]할 것, [[지도]]할 것, 조합원 간 원만한 [[관계]] 유지할 것, 욕심내지 말것,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57519&cid=50304&categoryId=50304|출자금]] 관리를 철저히 할 것, [[선전]]할 것, [[https://ko.dict.naver.com/#/entry/koko/5f2ebd19897449c892bf574cc779ecee|무자각]]한 유산자를 조심할 것, 몸소 [[실천]]할 것, 사업을 위해 [[논쟁]]을 초월할 것, 동지를 신임하는 동시에 언제든 [[분란]]을 각오할 것. 이들 항목은 모두 전준한이 준수해야 할 것들이었다. == 전준한 사회적경제 대상 == [[파일:202205187.jpg]] [[https://www.rise.or.kr:452/board/bbs/board.php?bo_table=bo22&wr_id=118|사진출처 : 사단법인 사회적기업연구원(RISE)]] - 경상북도에서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4337&cid=40942&categoryId=31630|지역사회]]에 대한 [[공헌]]과 사회적가치 실현을 선도함으로써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88010&cid=42107&categoryId=42107|사회적 경제]] 활성화의 모범이 되는 공로자를 선발·시상하고 있다. "전준한 사회적경제 대상"은 대한민국 최초 협동조합인 함창 협동조합을 설립한 전준한의 이념을 재조명하기 위해 시상하고 있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종류 || 선거구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2> 경북 상주군 을 || [include(틀:대한노동총연맹)] || 802표 (1.95%) || 낙선 (12위) || ||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include(틀:무소속)] || 1,188표 (2.67%) || 낙선 (8위) || || == 참고문서 == * '퍼스트 펭귄' 전준한 이야기 (한국콘텐츠연구원 / 경상북도) [[분류:협동조합]][[분류:노동운동가]][[분류:상주시 출신 인물]][[분류:문경 전씨]][[분류:1898년 출생]][[분류:1967년 사망]][[분류:희귀성씨인 인물]][[분류:동아일보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