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유송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13E88 0%, #3F51BA 20%, #3F51BA 80%, #313E88); color: #ece5b6" '''유송 제5대 황제[br]{{{+1 전폐황제 | 前廢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유송전폐제.webp|width=100%]]}}} || ||<|2> '''출생''' ||[[449년]] [[2월 25일]] || ||[[송(남조)|유송]] [[장쑤성|팽성군]] [[쉬저우시|서주현]][br](現 [[장쑤성]] [[쉬저우시]]) || ||<|2> '''즉위''' ||[[464년]] [[7월 12일]] || ||[[송(남조)|유송]]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br](現 [[장쑤성]] [[난징시]]) || ||<|2> '''사망''' ||[[465년]] [[11월 30일]] (향년 16세) || ||[[송(남조)|유송]]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 화림원 죽림당[br](現 [[장쑤성]] [[난징시]]) || || '''능묘''' ||단양군 말릉현 남교 단서 || ||<|4> '''재위기간''' ||'''{{{#ece5b6 유송의 황태자}}}''' || ||[[453년]] [[5월 20일]] ~ [[464년]] [[7월 12일]] || ||'''{{{#ece5b6 유송의 황제}}}''' || ||[[464년]] [[7월 12일]] ~ [[465년]] [[11월 30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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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고 오히려 [[조조]]가 만든 공식 [[도굴꾼]] 자리인 발구 중랑장[* 역대 [[황제]]와 [[왕]]의 묘를 파헤쳐 부장품을 도굴하는 벼슬]과 모금 교위[* 관료들과 백성들의 무덤을 파헤쳐 금은보화를 [[도굴]]하는 벼슬]에 관심을 뒀다고 한다. 실제로 '''계모이자 당고모인''' 은귀비(殷貴妃)의 무덤을 파헤치고 부장품을 싹쓸이하기도 했다. === 패륜적 불효 === 유자업은 눈매가 날카롭고 입이 튀어나왔으며 목이 긴 흉하고 기이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성질이 급하고 실수가 많아 아버지인 효무제 유준의 질책을 많이 받았다. 이에 황제가 된 후 보복심에 아버지의 능을 파헤치려고 하다가 신하들의 강력한 간언으로 그것은 관두고, 결국 [[찌질]]하게 아버지를 '''코주부'''라고 욕하며 [[똥]]을 능에 뿌리고 돌아갔다. 뜻을 이루지 못한 유자업은 당고모이자 효무제의 총애를 받았던 계모 은귀비의 묘를 파헤쳐 버렸다. 다만 의외로 정상인 같은 언동도 이 때 했었다. 아버지 효무제 유준은 초대 황제인 무제 유유에 대해 디스만 했으나 이 유자업은 유유가 천자 몇 명의 목을 딴 대단한 분이라고 추켜세웠고, 문제 유의륭에 대해서도 자식에게 당한 것 외엔 훌륭한 분이라고 그야말로 그 인생 행적을 고려해보면 놀라운 언행도 몇 했었다. 다만 그렇게 하면서 아버지 유준의 코가 붉게 칠해지지 않아 고증이 덜 되었다며 붉은 칠하라고 지시하며 욕한 건 덤. 뭔가 갑자기 정상인 같아 보이는 행동을 하다가 끝을 보면 역시나였다. 그런 다음 자신의 이복 동생이자 육촌 동생이기도 한 효무제 유준의 8남 유자란(劉子鸞)에게 사약을 내려 죽였는데, 이유는 유준이 사랑하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유자란은 유준과 은귀비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효무제 유준은 숙부인 남군왕(南郡王) 유의선(劉義宣)의 딸이자, 사촌 여동생이었던 유씨를 취한 다음 은씨로 이름을 바꿨다. 그렇게 사촌을 후비로 삼은 뒤 낳은 아들이 유자란이었다. 유자란은 당시 10세도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죽음을 앞두고 '''"내세에는 황가에서 태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유송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 [[순제(유송)|유준]]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그러면 유자업이 생모인 태후에게 효도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유자업이 즉위하고 몇 달 뒤에 어머니 왕씨(왕헌원)가 아파서 그를 불렀는데, 그가 '''"환자들이 있는 방에는 [[귀신]]들 천지라는데 내가 어떻게 가겠는가?"'''라면서 가지 않자 왕씨는 '''"칼을 갖고 와서 내 배를 가르거라. 내가 어떻게 저런 비린내나는 애를 낳았는지!"'''라며 분통을 터뜨리다가 얼마 뒤인 464년 음력 8월 23일에 사망했다. 465년, 효무제 때의 중신인 대법흥(戴法興)마저 축출하고 곧 그를 죽였으며, 행실이 꺼릴 것 없이 더욱 방자해졌다. === 근친 겁탈 패륜 === 유자업에게는 아내 하영완(何令婉)이 있었다. 그 아버지는 하우(何瑀)였으며 어머니는 무제 [[유유(송무제)|유유]]의 딸 예장공주 유흔남(劉欣男)이었다. 유자업 본인이 유유의 증손자이므로, 유유의 딸의 딸인 외손녀와 혼인했다는 것은 5촌 당고모하고 혼인한 것이다. 예장공주는 원래 서교와 결혼했다가 서교가 [[요절]]하자 하우와 재혼했으며 하매와 하씨를 낳았다. 그리고 하매의 아내가 유의륭의 친딸인 신채공주[* 사실 이쪽도 근친혼이다. 하매는 유유의 외손자, 신채공주는 유유의 친손녀다. 사촌오빠랑 혼인하였다.]인데, 유자업에 의해 처남이자 당숙인 하매는 살해당하고, 당숙모이자 친고모인 신채공주는 유자업의 첩이 되었다. 그런데 하영완은 대명 5년(461년)에 죽어서 남편이 황제가 된 후 헌황후로 추존되었다. 따라서 유자업은 즉위 당시 본처가 없었다. 황후가 없는 황제 유자업은 아버지보다 도를 넘어선 황음무도한 생활을 했는데, 송문제 유의륭의 10녀이자 효무제 유준의 친동생인 '''친고모''' 신채공주[* 新蔡公主, 유영미(劉英媚)]를 '''[[겁탈]]'''하고, 궁중의 한 여종을 살해해서 신채공주가 죽었다는 소문을 내며 장사까지 치렀다. 물론 진짜 신채공주는 귀빈으로 삼아 성을 사씨(謝氏)로 고쳤으며, 덤으로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고모부 겸 당숙부 겸 前처남 하매(何邁)는 죽였다. 그리고 신채공주가 그 후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게다가 일찍이 '''친누나 [[산음공주]](山陰公主)도 근친상간을''' 했다. 어느 날 '''"폐하는 육궁에 후궁이 많으면서 신은 겨우 부마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는 매우 불공평합니다."'''라는 식으로 산음공주가 불만을 품자, 유자업은 산음공주에게 '''면수, 즉 아름다운 남첩 30명'''을 선물했다. 산음공주는 남편 하집이 미남이었고 남첩 30명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했다. 산음공주는 의원을 유혹해 음욕을 채우고 거기에 당대의 미남이었던 이부랑 저연(褚淵)을 유혹했다. 문제는 저연은 남군공주의 부마였는데, 이 남군공주는 산음공주의 고모였다. 즉, '''저연은 산음공주의 고모부였다.''' 차마 고모부를 대놓고 유혹하긴 그랬는지 그녀는 조서를 내려 저연이 무조건 자신에 집에 오도록 했다. 산음공주는 저연이 오자 끊임없이 유혹하고 온갖 추태와 교태를 다 부렸지만 저연은 당대의 인재답게 유혹을 거부했고 결국 포기했다. 저연이 고결한 인물이라는 평도 있지만, 저연도 나중에 [[소도성]]이 찬탈할 때에 그에게 붙어서 온갖 추태를 부렸다. 이런 음란한 산음공주는 전폐제가 죽은 후에 바로 처형됐는데 남첩 30명도 같이 순장되었다. 당시 산음공주의 나이는 만 19세에 불과했다(446-465). 산음공주의 외동딸이 바로 [[제나라]] 울림왕 [[소소업]]의 음란한 황후 하정영이었다. 하정영이 산음공주가 아니라 하집의 첩 송씨의 소생이라는 설도 있지만 공식적인 기록에는 산음공주의 소생이었다. 유자업은 거기다가 유휴인의 어머니이자 할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양씨(제3대 문제 [[유의륭]]의 후궁으로 수의라는 후궁 직급을 받았다.)에게 온갖 음란한 짓을 하도록 강요했다. 즉 의붓할머니인 어른을 강간교사한 것. 그리고 좌우 심복들에게 양씨를 범하도록 했는데, 이때 그들 중에서 유도륭이 환심을 얻으려고 온갖 추악한 짓을 하며 양씨를 [[강간]]했다. 거기에 유휴인의 아내 은씨는 병이 들어 진찰하려고 미남 의원 조번이 오자 병 치료는 제쳐두고 조번과 간음했다. 하지만 이게 누설되자 조번은 죽임을 당했다. === 근친 능욕 패륜 === 제3대 문제 유의륭의 9남 의양왕 [[유창(북위)|유창]]은 송 황실의 종친 가운데 가장 강한 인물이었다. 유창의 자는 '휴도'로, 원가 13년(436)에 문제 유의륭과 용화 사씨 사이에서 9남으로 태어났다. 원가 22년(445) 3월에 의양왕에 봉해지고 식읍 2,000호를 받았다. 원가 27년(450), 임보장군, 남패태수, 하비태수에 임명되었으며, 원가 30년(453)에는 동중랑장이 더해졌다. 효건 원년(454) 8월에는 이복형인 제4대 [[효무제(유송)|효무제]] 유준이 동양주 자사로 임명했다. 대명 8년(464) 8월, 유자업이 즉위했을 때 정북장군, 서주 도독, 연주, 남연주, 청주, 기주, 유주, 예주를 감독하며 서주 자사가 더해졌으니 권세가 막강했다. 유자업이 황제가 되자 유창은 조카의 즉위를 경하하기 위해 마땅히 수도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유자업은 오직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숙부 유창을 죽이려고 했다.''' 그리하여 경화 원년(465) 8월, 유창은 가만히 죽기 싫어서 수도 건강에 가지 않고, 그날로 자신의 가족을 버린 채 홀로 적국 [[북위]]로 망명했다. 유창이 망명한 후 남겨진 유창의 처 오씨와 아들 유사원 및 유회원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유창은 북위로 망명하고 나서 북위 문성제(북위 제5대 황제)에 의해 단양왕에 봉해지고 정남 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문성제의 딸 무읍공주 탁발씨와 결혼해 부마 도위가 되었다. 유창은 무읍공주가 죽자 건흥장공주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였고 건흥장공주가 죽자 다시 평양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태화 17년(493), 북위 효문제(문성제의 손자로 헌문제의 아들)는 유창을 제공으로 봉하고 송왕의 칭호를 더했으며, 태화 18년(494) 8월에는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유창은 태화 20년(497) 6월에 팽성에서 62세 나이로 숨을 거뒀으며 '명'(明)이라는 [[시호]]를 받고 태부, 영(领) 양주 자사가 추증되었다. 유창은 내란을 피해 적국 북위로 망명해서 선전용으로 이용당했지만 유창의 자손들은 계속 살아남아 유송이 멸망하고 고제 [[소도성]]에 의해 유씨가 모두 도륙당한 상황에서도 대를 이어 나갔다. 유창은 북위에서 다시 가정을 꾸려 유승사, 유문원, 유휘를 낳았으며, 유창의 적자 유승사가 유창의 작위를 잇고 문성제의 딸 팽성장공주와 결혼하여 부마 도위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 북위도 혼란해지기 시작하여 유창의 자손들은 정쟁에 휘말리다가 가문이 몰락해, 그 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유자업은 정신을 못 차리고 일부러 만만하거나 의심스러운 숙부들을 골라 함부로 대했다. 숙부들을 벌거벗기고 참대 나무로 만든 우리에 가두어 머리만 내밀게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저울로 재기도 하고 [[곤장]]을 치기도 했고, 나무 그릇에 담은 여물을 먹게 하기도 하는 등 온갖 모욕과 [[능욕]]을 가했다. 그 숙부들이란 바로 제3대 문제 유의륭의 11남 상동왕(湘東王) [[명제(유송)|유욱]](劉彧), 유의륭의 12남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 유의륭의 13남 산양왕(山陽王) 유휴우(劉休祐), 유의륭의 8남 동해왕(東海王) 유의(劉褘)였다. 유자업은 그들을 순서대로 각각 '''[[돼지]]왕, [[살인]]왕, [[도적]]왕, [[당나귀|나귀]]왕'''으로 봉했다. 유의는 머지않아 석방되었으나 유욱, 유휴인, 유휴우는 계속 대나무 우리에 갇혀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엄청난 칭호를 받은 이유가 있다. 돼지왕 유욱은 '''매우 뚱뚱해서'''.(유의를 제외하면 모두 뚱뚱했는데 유욱이 제일 뚱뚱했던 모양이다.) 또 살인왕 유휴인은 '''매우 인상이 험악해서''', 도적왕 유휴우는 '''매우 탐욕스러워서'''였다. 어리석어서 다른 황족들도 무시한 나귀왕 유의는 '''매우 어리버리해서'''. 유자업은 숙부들 중에서도 특히 유욱을 가장 미워했다. 자기 첩 중 하나가 아들을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게되는데 유자업은 그의 첩들을 심복들과 함께 공유(?)했기 때문에 유자업의 자식인지, 심복들 중 누군가의 자식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뱃속의 아기를 황태자로 삼고 '''기념잔치에 쓸 제물 겸 [[유희]]로''' [[인신공양|유욱을 잡으려고 했다.]] 이에 유휴인이 '''"태자가 태어나야 기념으로 돼지를 잡는 겁니다."'''라고 말하자[* 여담으로 유휴인은 유탄(문제 유의륭의 6남)과 더불어 문제 유의륭의 아들들 중에서 비교적 멀쩡한 인물이었다.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유자업은 여러번 세 사람을 죽이려고 했는데 이 때마다 유휴인이 기분을 맞춰주어 셋 다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도 아마 유자업의 비위를 맞춰주면서 유욱을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유욱은 황제가 되고 나서 유휴인을 죽여버렸다.] 유자업은 '''"오오, 그런가? 그럼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잡아먹어야지"'''라며 잡는 것을 유보했다. === 근친 살해하다 자기도 죽다 === 그러다가 고조 무제 [[유유(송무제)|유유]]의 4남이자 작은 할아버지였던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을 추대하려던 [[음모]]가 포착되자, 유의공을 죽여 시체를 8조각으로 자르고 배를 갈랐으며 눈알을 뽑아 꿀에 넣어서 '귀목종'(귀신 눈깔떡)으로 만들었다. 더불어 유의공의 남은 네 아들까지 모두 죽였다. 유의공은 아들이 16명이었는데 이전에 원흉 [[원흉소|유소]]에게 12명의 아들을 잃었다. 따라서 이때 유의공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그 외에 '''대대로 세 번째 아들이 황제가 됐다는 이유로''' 종실의 셋째 아들들을 골라 죽이기도 했다. 실제로 유자업의 할아버지 문제 유의륭과 아버지 효무제 유준이 셋째 아들이다. 이렇게 기괴귀축한 삶을 살던 유자업의 끝장 역시 황당했다. 어느 날, 꿈속에서 어떤 여자가 자신을 저주하자, 그 여자와 비슷한 여자를 잡아 죽였다. 하지만 그의 계속된 폭정에 참다못한 유욱과 신하들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유자업은 죽림당에서 궁녀들과 '''알몸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이때 궁녀 1명이 거부하자 바로 그녀를 참수하기도 했다. 유자업은 꿈에서 본 그 여자 귀신을 보고 귀신 잡으러 다니다가 유욱과 신하들의 지시를 받고 대기하고 있던 환관 수적지와 그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수적지가 근위병들이 없는 틈을 타 숨겨두었던 칼을 빼들어 죽이려 하나 유자업이 도주하여 실패했지만 사전에 지시를 받은 수적지의 부하들이 유자업을 붙잡았고 유자업은 바로 수적지의 칼에 찔려 죽었다. 유자업은 죽은 뒤 단양 말릉현 남교단 서쪽에 매장되었다. 그런데 '''유자업의 이 폭정들은 겨우 1년 안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위의 초상화와는 달리 사망시는 만 16세. == 평가 == >[[무왕(주)|무왕]]이 나열한 [[제신|주왕]]의 잘못은 폐제의 잘못의 만 분의 일도 되지 못하며, [[곽광]]이 기록한 [[폐제(전한)|창읍왕]]의 잘못은 폐제의 잘못에 비한다면 보잘 것 없다. 가령 중간 정도의 재주를 지닌 군주라 하더라도 이 중 하나의 죄라도 있어서 사직을 무너뜨리고 종묘를 더럽히기에 충분한데, 하물며 두 가지의 죄악을 모두 한 사람에게 집중하겠는가! 폐제가 죽은 것 또한 다행이로다. >---- >― 《[[송서]]》의 <전폐제 본기> 사론 == 매체에서의 등장 == 2018년 드라마 '봉수황(鳳囚凰)'에서는 배우 장일걸(張逸傑)이 유자업을 맡았다. 유자업의 만행이 잘 묘사되어 있는 편이다. 허나 방송가능할 수준으로 실제 역사에 비하면 너무 심하게 미화되어 있다. 극초반에만 등장한다. 역사적 상황과 비슷하게 누나 [[산음공주]]의 남첩 요구를 잘 들어주는 등(여기에는 비밀이 있다) 누나바라기라 할 만한 면모를 보이지만 사람 죽이기를 자기 멋대로 하는 등 실제의 폭정을 잘 묘사한 편이다. 어릴 때 은귀비에게 학대를 너무 심하게 당해서[* 선황에게 사랑받는 이복형제에게 골든샤워까지 당했다.]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친족들, 신하들, 궁인들에게 갖고 있는 복수심이 엄청나다. 사실상 누나 빼고 전부 복수의 대상일 정도이다. 여주이자 누나인 산음공주는 이러한 그를 개과천선시키려 노력하기도 한다. 퇴마식 도중에 반란이 일어났고 도망쳤지만 결국 5명의 병사들에게 칼로 난도질당해 죽는다. 그 후 유욱이 화풀이로 칼로 유자업의 시체를 난도질했고 시체를 갈아서 돼지의 먹이로 주게 했다. == 둘러보기(계보) == [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분류:송(남조)/황제]][[분류:폐위된 군주]][[분류:449년 출생]][[분류:465년 사망]][[분류:근친상간]][[분류:팽성 유씨]][[분류:장쑤성 출신 인물]][[분류:암살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