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1 程務挺 | 정무정}}}''' || || '''작호'''' ||평원군공^^(平原郡公)^^ || || '''성'''' ||정(程) || || '''이름'''' ||무정(務挺) || || '''생몰연도'''' ||? ~ 684년 || || '''부친'''' ||[[정명진]](程名振) || || '''출신'''' ||명주(洺州) 평은현(平恩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 시기의 장수. [[고구려-당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던 당나라의 명장인 [[정명진]]의 아들이다. [[왕방익]]과 함께 [[배행검]]의 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돌궐 전선에서 맹활약하나 무측천에게 숙청당한다. == 생애 == === 변방에서 공을 세우다 === 그는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 정명진을 따라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과감하기로 유명해 우영군위중랑장(右領軍衛中郎將)으로 승진하였다. 679년 10월, 선우도호부에서 동돌궐의 추장인 아사나덕온부와 아사나복념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아사나니숙포(阿史那泥熟匐)를 가한으로 추대하며 당나라의 북방을 위협하였고, 정양도(定襄道) 행군총관 이문간(李文柬), 조회순(曹懷舜), 두의소(竇義昭) 등이 잇달아 패배하였다. 11월 예부상서 겸 검교우위대장군 배행검이 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자 정무정이 검교풍주도독이 되어 이를 뒤따랐다. 680년 3월, 배행검 대군이 반군을 격파하고 아사덕원푸가 투항하고, 니슈프는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정무정은 그 공으로 우령군위중랑장이 되었다. 당군이 회군하자 돌궐 6만 기병이 운주(雲州, 현 산서 대동)를 포위 공격하였는데, 정무정이 이를 격파한다. 영륭 2년(681년) 정월, 돌궐은 원(原, 지금의 영하 구원), 경(慶, 지금의 감숙 경양) 등을 공격했다. 때마침 아사나복념이 아사덕원푸와 함께 당나라에 반역하였다. 패전 소식이 이어지자, 조정은 예부상서 배행검에게 토벌을 명하고, 배행검의 부장으로 정무정을 임명하였고, 정무정은 검교(檢校) 풍주도독(豊州都督)을 겸하였다. 처음에 아사나복념은 금산에 주둔하였으나, 후에 두려워 아내를 남겨두고 금아산에 치중하고, 친히 남하하여 당나라 군조를 습격하려 하였다. 배행검은 그 뒤편의 허를 찔러 부장인 하가밀에게 자석도로를 뚫게 하고 군을 이끌고 돌궐아장 금산을 급습한다. 아사나복념은 식솔과 휘장을 잃어버린 것을 발견하고 크게 놀라 군대에서 유행하는 병을 만나 북쪽으로 세사를 갔다. 배행검은 유경동(劉敬同)과 정무정으로 하여금 이를 바짝 추격하게 했다. 곤경에 처한 푸니엔은 아사덕원푸에게 속죄를 구하고, 배행검은 이에 대해 말한다. 이 일은 비밀로 하고, 항복 후 불살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아사나복념은 망설이다가 당군이 쫓아오고, 아사나복념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아사덕원푸를 붙들고 오솔길로 나가 배행검에게 투항한다.[* 후에 아사덕원푸, 푸니엔은 처형당하고 만다.] 중서령 배염은 아사나복념은 정무정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항복한 것이지 배행검의 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아사나복념을 주살한 것을 정무정의 공으로 삼았다. 후에 무위장군, 평원군공에 봉해졌다. === 백철여의 난 === 영순 2년(683년), 쑤이저우 성평현(지금의 산시 청간현)의 보계인 백철여(白鐵餘)라는 이가 성평현에서 당나라에 반역해 광명성황제를 자칭했다. 그리고 부중을 이끌고 쑤이더현(지금의 산시 청간 서북), 다빈현(지금의 산시 쯔저우현)을 공격하여 당나라 관리를 죽이고 관가를 불태웠다. 당 고종은 정무정과 하주(夏州) 도독 [[왕방익]][* 이다조, 흑치상지, 정무정과 함께 배행검의 추천으로 발탁된 무장이다. 안서사진 탈환에 공을 세우나 무측천에게 숙청당한 뒤, 그가 수복한 안서사진은 다시 빼앗긴다.]에게 출병하여 백철여의 반란을 토벌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성책을 뚫고 나와 백철여를 생포하여 이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 공로로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검교좌우림군(檢校左羽林軍)에 올랐다. === 황제 폐위 === 동돌궐의 수령 아사나복념, 아사덕원푸가 패전하여 사로잡히자 [[힐질리시가한|쿠틀룩]][* 돌궐 제2제국의 초대 가한으로, 당의북방 지역을 초토화시켰다.]은 가한을 자처하며 다시 당에 반란을 일으키고, 돌궐 제2제국을 세운다. 당군이 연거푸 패하자 조정은 풍주를 버리려다 [[당휴경]]이 버티면서 멈췄다. 홍도 원년(683년) 11월, 무측천은 정무정으로 하여금 쿠틀룩을 막게 하였다. 그해 12월 고종이 사망하고 세자 이현(李顯)이 즉위해 중종이 되었으나 대권은 [[측천무후]]가 장악해 왔다. 당 고종은 임종 때 [[배염]]에게 세자를 보좌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듬해인 사성 원년(684년) 정월 중종이 자신의 장인([[위황후]]의 아버지) [[위현정]]을 시중으로 내정하고, 유모의 아들에게 5품의 관직을 내리려고 했다. 배염은 불가하다고 역간했다. 중종은 배염의 간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맞섰다. >"짐이 천하를 전부 위현정에게 준다고 해도 안된다 할 것인가? 시중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아까운가?" 배염은 중종의 발언과 행태에 대해 측천무후에게 알렸고, 측천무후는 중종을 폐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후 2월에 측천무후가 건원전에 백관을 모았는데, 배염과 정무정, 중서시랑 유의지, 장건욱이 군사를 이끌고 궁 안으로 들어가 측천무후의 조명을 내리면서 중종을 폐한 뒤 여릉왕으로 하고[* 훗날 거란족의 [[손만영]]이 반란을 일으킬 때, 무측천이 중종을 폐한 것을 반란 명분으로 삼았다.], 동시에 예왕 이단을 [[예종(당)|예종]]으로 올렸으나 정사는 모두 측천무후가 결정하였다. 정무정은 이때의 정변에 공이 있어 측천무후가 수렴청정을 할 때 정무정의 아들인 정제지(程齊之)를 상승봉어(尙承奉御)로 삼으려고 했는데, 정무정은 자신의 동생인 정무충(程務忠)에게 벼슬을 내려달라고 청하고 무측천은 그를 칭찬하여 정무정의 아우인 원주(原州) 사마 정무충을 태자세마(太子洗馬)로 삼았다. === 위진돌궐 === 광택 원년(684년) 7월 [[힐질리시가한|골독록]] 등이 군대를 이끌고 삭주(지금의 산서 삭현 )를 침공하여 백성들과 관리를 노략질하자 정무정이 이를 이끌고 격파하였다. 9월에 무측천은 정무정을 좌무위대장군, 선우도(單於道) 안무대사(安撫大使)로 임명하여 돌궐 전선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전선에서 부하를 잘 달래고, 군대에서의 위신은 매우 높아, 전투를 벌일 때마다 부하가 적지 않았고, 최선을 다했다. 돌궐은 그를 매우 꺼렸고, 그 이름을 듣고 도망가 감히 침공을 저지르지 못했다. === 최후 === [[예종(당)|예종]]이 즉위한 후 측천무후 일파는 당 종실과 친당 신료들을 모두 위태롭게 하였다. 이에 [[이세적]]의 손자인 [[이경업]]과 그 동생 이경유, 급사 당지기, 장안주 낙빈왕(樂賓王)[* 중국문학사에서도 유명한 사람이다.], 두구인(杜求仁), 그리고 어사에서 파면된 위사온(魏思溫)이 양주(揚州)에 모여 원한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측천무후는 이경업의 반란 소식을 듣고 [[배염]]에게 물었고, 배염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배염: [[예종(당)|천자]]께서는 이미 어른이 되었지만 친정하지 못하셨으므로, 교활한 소인이 반란을 일으킬 구실이 생긴 것입니다. 만약 태후께서 천자에게 정권을 돌려주신다면 반란군은 토벌되지 않고 저절로 해산할 것이옵니다. >최찰: 배염이 20여 년 동안 조정에 충성하며 반란이 토벌되지 않았는데 태후에게 정권을 황제 폐하께 돌려달라고 청하는 것은 필시 두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측천무후는 최찰의 말을 믿고 즉시 배염에 대한 국문을 명하였다. 정무정은 배염이 체포된 것을 알고 측천무후에게 배염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측천무후는 정무정에게 불만을 품었다. 정무정은 본래 당지기, 두구인과 친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정무정이 배염, 서경업[* 반란을 일으키자 국성인 이씨를 빼앗기고, 원래 성인 서씨로 되돌아갔다.]과 내통해 반란을 꾀했다고 정무정을 모함하였고, 무측천은 그에 대한 확증도 없이 정무정을 제거하였다.[* 이미 서경업은 11월 18일에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여 거사에 실패하였다.] 좌응양장군(左鷹揚將軍) 배소업(裴紹業)이 군영에 나가 정무정을 참수하였고 정무정의 죽음은 돌궐 방어선이 와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돌궐 사람들은 정무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였지만, 정무정을 경배하고 사당을 지어 출사할 때마다 반드시 이곳에 와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각주]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당나라의 장수]][[분류:68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