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정제신}}}'''[br]'''鄭濟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6606|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이명으로 정제화(鄭濟華)가 기재되어 있으나, 정제화(鄭濟華, 1870. 10. 11 ~ 1942. 1. 30)는 정제신의 친형의 이름이다.]'''}}}}}} || || '''자''' ||준백(俊伯) || || '''본관''' ||[[광주 정씨]][*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86_1_0026345|#]]. 응교공파(應敎公派) 20세 제(濟) 항렬. 광주정씨족보 하-1권 389쪽 참조.] || ||<|2> '''출생''' ||[[1886년]][* 광주정씨족보 하-1권 389쪽에는 1883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4월 23일]] || ||[[경기도]] [[광주시|광주부]] [[오포읍|오포면]] 자작리[br](現 [[경기도]] [[광주시]] [[추자동]] 자작이마을[* [[광주 정씨]] 집성촌이다.] 496번지) || || '''사망''' ||[[1928년]] [[5월 31일]][* 광주정씨족보 하-1권 389쪽에는 1956년 4월 13일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향년 42세) || || '''묘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매산리 상마산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86년 4월 23일 경기도 광주부 오포면 자작리(現 광주시 추자동 자작이마을 496번지)에서 아버지 정동현(鄭東鉉, 1841. 11. 12 ~ 1907. 1. 10)과 어머니 [[원주 원씨]](1848. 4. 7 ~ 1896. 1. 28)[* 원도상(元道常)의 딸이다.]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7일 새벽 1시경 [[광주시|광주군]] [[오포읍|오포면]] [[고산동(광주)|고산리]](現 [[광주시]] [[고산동(광주)|고산동]]) 주민 40여명과 함께 횃불을 들고 인근 야산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어 오전 11시경 오포면에 집결한 시위 군중들과 합류하여 시위대는 1,000여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오포면사무소와 광주군청까지 시위행진을 하던 중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력 탄압에 제지되어 곧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810&evntId=0034978605&evntdowngbn=Y&indpnId=000001051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일제에 격렬히 항거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강압적 핍박과 박해가 지속되자 결국 1928년 5월 31일 자결, 순국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광주시 출신 인물]][[분류:광주 정씨]][[분류:1886년 출생]][[분류:192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