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정주해}}}'''[br]'''鄭周海'''}}}}}}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정주해.jpg|width=100%]]}}} || || '''자''' ||주해(主海) || || '''본관''' ||[[경주 정씨]][* 양경공파-첨지공파 66세 해(海) 항렬. 족보명은 정주해(鄭'''{{{+1 珠}}}'''海).] || ||<|2> '''출생''' ||[[1892년]] [[10월 20일]][* 경주정씨양경공파대동세보 권10 511쪽에는 2월 25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 ||[[충청도]] [[괴산군]] 북상면 아성리[br](현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 ||<|2> '''사망''' ||[[1942년]] [[12월 12일]] || ||[[만주국]] [[헤이룽장성|빈강성]] [[하얼빈시]] 안평가[br](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다오리구 안핑제) || || '''종교''' ||[[대종교]] || || '''묘소'''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92년 10월 20일 충청도 괴산군 북상면 아성리(현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에서 아버지 정행두(鄭行斗, 1849. 8. 24 ~ ?. 12. 1)와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광산 김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으로, 첫째 부인 [[안동 권씨]]는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1858년 12월 13일 요절했다.] 그는 1919년 3월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직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지청천]] 부대에 참가하여 [[연해주]] 이만(Iman)[* 현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달네레첸스크.]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6년부터 1930년 5월 초까지는 [[중화민국]] [[길림성]] 빈강도(濱江道) 빈강현(濱江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다오와이구(道外區).][* 1927년에는 빈강시(濱江市)가 신설되었고, 빈강현은 기존의 관할 지역 중 농촌 지역만을 관할하게 되었다.]에서 동성호(東省號)라는 여관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의 연락처로서 활용하였으며, 같은 해 5월 1일 하얼빈 일본영사관 습격사건과 관련하여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후 [[대종교]]에 입교한 그는 1942년 11월 [[헤이룽장성|빈강성]](濱江省) [[하얼빈시]] 안평가(安平街)[*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다오리구(道里區) 안핑제(安平街).]에서 서무사원(庶務司員)으로 일하던 중, 당시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대종교 탄압, 즉 '임오교변'으로 대종교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뒤 옥중에서 고문으로 죽을 지경에 처하여 가석방된지 5일만인 12월 12일 하얼빈시 안평가(安平街)에서 영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주해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종교 신자]][[분류:경주 정씨]][[분류:괴산군 출신 인물]][[분류:1892년 출생]][[분류:194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신흥무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