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정진감}}}'''[br]'''鄭鎭坎'''}}}}}}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정진감.jpg|width=100%]]}}} || || '''호''' ||인회(忍悔) || || '''본관''' ||[[동래 정씨]][* 문경공파(文景公派)-정절공파(貞節公派) 31세 진(鎭) 항렬.] || ||<|2> '''출생''' ||[[1921년]] [[7월 27일]] ||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내동마을 || ||<|2> '''사망''' ||[[2008년]][[9월 23일]] || ||[[광주광역시]]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914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 생애 == 1921년 7월 27일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내동마을에서 아버지 정항모(鄭沆謨, 1896. 7. 15 ~ 1949. 8. 11)와 어머니 [[제주 고씨]][* 장흥백파.](? ~ ?. 10. 23) 고재붕(高在鵬)의 딸 사이의 7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40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가 직공 또는 잡역에 종사하면서 오사카청년회 예비교(豫備敎) 중학교에 다녔다. 이어 1941년 4월 오사카 사립 [[니혼대학]] 야간중학교 이부(二部) 3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지속했다. 일본에 건너온 이후 그는 줄곧 [[일본인]]의 [[재일 조선인]]에 대한 극심한 민족차별과 비참한 생활상을 목도했고, 이를 통해 [[한민족]]의 자유와 행복은 오직 조국의 독립과 민족 해방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그 뒤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이어 1942년 5월 9일 조선인 청년들에 대한 [[징병제]] 실시가 발표되자, 이를 계기로 그해 5월 중순에 동급생인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7876|이강휘]](李焵徽)를 비롯해 윤병윤(尹炳允)·고방웅(高房雄)·김규장(金圭藏)·하백문(河白文) 등과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한국독립청년당(韓國獨立靑年黨)[* 기록에 따라 '조선독립청년단'이라고 쓰기도 한다.]을 결성했다. 그 뒤 이들은 [[일본 제국]]이 [[중일전쟁]]을 5년간 계속하고 있으면서도 다시 세계의 강국인 [[미국]]·[[영국]] 등 두 나라와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자원이 풍부한 미국과 영국에 필연적으로 패배할 것임을 확신하고, 이 기회를 이용해 '조선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목적 하에 40여차례 당원들과 모임을 가지면서 동지 규합 및 당세 확장, 민족정신 고취, 당원간의 단결 등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43년 3월 2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4년 1월 26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120일 통산)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귀국 후 1947년 임시 중등교원 양성소를 졸업하여 [[수학]] 과목 중등교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1947년부터 1959년 12월 31일까지 전남농업중학교(현 광주북성중학교)[* 1951년 8월 광주북중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70년 광주북성중학교로 학교 이름이 바뀌었다.] 등지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60년 1월 1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면려포장증을 수여받았으며, 1963년 4월 2일 [[송정중학교(광주)|광주 송정중학교]] [[교감]], 1969년 5월 1일 강진중학교 교감을 거쳐 [[교장]]으로 승진하여 1971년 2월 2일부터 1976년 8월 31일까지 초대 함평신광중학교 교장, 1976년 9월 1일부터 1981년 9월 1일까지 제5대 [[영암군]] 구림중학교 교장, 1981년 9월 1일부터 1986년 8월 30일까지 제18대 해남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1986년 8월 31일 [[정년퇴임]]과 함께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았다. 1992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이전에 그는 '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한 것이고 물론 공직에 있으면서 서훈을 받으면 다양한 혜택을 받게 되겠지만, 내 노력으로 공정한 평가를 받겠노라'며 한동안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하지 않았고, 이러한 심정을 자녀들에게 피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퇴직 후 동생들의 권유에 의해 결국 신청을 했다고 한다.[[https://www.wikitree.co.kr/articles/407921|#]] 2008년 9월 23일 [[광주광역시]]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08년 9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교사]][[분류:동래 정씨]][[분류:함평군 출신 인물]][[분류:1921년 출생]][[분류:2008년 사망]][[분류:국민훈장 동백장]][[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