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23년 출생]][[분류:광주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북한의 음악가]][[분류:카자흐스탄의 인물]][[분류:2013년 사망]][[분류:월북한 인물]][[분류:북한이탈주민]][[분류:한국계 카자흐스탄인]][[분류:양정고등학교(서울) 출신]][[분류:니혼대학 출신]] [목차] [[파일:정추.jpg]] == 개요 == [[고려인|한국계 카자흐스탄인]] 음악가. 작곡가 [[정근(작곡가)|정근]]의 둘째 형으로, [[월북]] 후 [[소련]]에 [[망명]]하여 활동했다. == 생애 == [[일제강점기]]였던 [[1923년]], [[일제강점기 조선|식민지 조선]]의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부]](현 [[양림동]])에서 출생하였다. [[1938년]] [[광주서중학교|광주서중]] 재학 중 [[조선어]] 사용 문제로 [[일본인]] 교관과 다퉈 퇴학당했고, 우여곡절 끝에 양정고보에 편입해 졸업하였다. (양정 26회) [[1942년]] [[니혼대학]] 음악학과에 입학해 음악을 공부하다가, [[1944년]] [[일본군]]에 강제 징집됐다. 친구들과 [[탈영]]을 도모하고 있을 때 [[일본 제국]]이 패망하여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던 조국은 바로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이하였으며, 이때 정추는 [[북한]]으로 넘어가 음악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 망명 === 정추는 [[북한]]에서 생활하다가 그 당시 [[소련]] [[모스크바 대학교]]로 [[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추는 [[1952년]], [[소련]]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유학 도중 [[김일성]] 숭배를 비판하는 학생시위를 조직하였고, [[1956년]] 북한에서 소환 명령을 받고도 되돌아가지 않고, 소련 정부에 [[망명]]을 신청하여 자발적 망명자가 되었다. 그 이유는 김일성의 독재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북한은 당시 정추를 북송하라고 요구했지만 소련 당국은 이를 수용하는 대신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카자흐 공화국]]의 [[알마티]]로 정추를 추방하였다. 이후 [[소련 해체|소련이 붕괴되고]] 여러 나라로 분리되면서 정추는 [[카자흐스탄]]의 시민권자가 되었다. 간혹 '카자흐스탄의 [[윤이상]]'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이에 대해서 정추 본인은 큰 불쾌감을 표하며 "저는 북한 체제를 반대한 망명자고, 윤이상은 [[주체사상|사이비 사회주의]] 독재국가를 찬양한 사람입니다. 나를 그와 비교하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윤이상 같은 변절자'''가 아니에요."라면서 윤이상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 음악가로서의 삶 === 우선 외가가 호남의 만석꾼 집안이였기에 당시 기준으로는 대단한 부자집 출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술에 관심이 깊었던 외할아버지와 독일에서 베를린 음악대학을 다닌 외삼촌 정석호[* 베를린 유학 당시 같은 학교에 벌교 출신 음악가 [[채동선]]이 있었다.]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일본 유학 이후 북한에 가서[* 당시 친형인 정준채 영화감독의 권유에 의해 평양으로 갔다.] 음악활동도 꾸준히 하였으며, 소련 망명 및 카자흐스탄 거주에서도 열성적인 음악활동을 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그의 교향곡 ‘조국’과 ‘1937년 9월 11일 스탈린’, 그리고 그가 통일조국의 애국가가 되기를 바라면서 작곡한 ‘내 조국’등이 존재한다. === 사망 === 그가 바래왔던 조국의 통일을 결국 두 눈으로 보지 못한 채 [[2013년]] [[6월 13일]]에 90세라는 나이로 타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사망하였다. 2년 뒤에는 [[정근(작곡가)|동생]]이 그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최승희와는 다르게 [[카자흐스탄]]에서는 위대한 음악가로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 가서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https://www.voakorea.com/a/1681316.html|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