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정태희}}}'''[br]'''鄭泰熙'''}}}}}} || || '''본관''' ||[[해주 정씨]][* 생원공파(은율) 21세 태(泰) 항렬.] || ||<|2> '''출생''' ||[[1897년]] [[8월 24일]] ||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상동[br](현 [[황해남도]] [[과일군]] 세교리) || ||<|2> '''사망''' ||[[1984년]] [[11월 3일]] || ||[[서울특별시]] [[보훈병원]]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468호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정태희는 1897년 8월 24일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상동(현 황해남도 과일군 세교리)에서 아버지 정학순(鄭學順, 1860. 4. 4 ~ 1918. 12. 20)과 어머니 [[김해 김씨]](1866. 8. 8 ~ 1943. 1. 10)[* [[황해도]] [[연백군]] 출신이다.]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고향에서 [[3.1 운동]]에 참가한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9월 4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860&evntId=0034981208&evntdowngbn=Y&indpnId=0000012914&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상고가 기각되면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9월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일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촉탁을 맡았고, 군자금 10만원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발송했다. 이후 [[중화민국]]으로 망명한 뒤 [[산시성(산서성)|산서성]] [[창즈시|노안부]](潞安府) 일대에서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협력했다. 그러나 1944년 산서성 [[타이위안시|태원시]]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산서성 주둔군 임시 군법회의에서 5년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이후 서울로 귀환하여 조용히 지내다 1984년 11월 3일에 [[서울특별시]] [[보훈병원]]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태희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10월 12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해주 정씨]][[분류:송화군 출신 인물]][[분류:1897년 출생]][[분류:198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