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葛珪 ? ~ 187[* [[제갈균]] 항목에는 그가 189년생이라 서술되어 있는데, 설령 [[유복자]]라 해도 햇수로 2년이 차이가 날 순 없기 때문에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목차] == 개요 == [[후한]] 말의 인물이며 자는 군공(君貢)으로 [[제갈근]], [[제갈량]], [[제갈균]] 삼형제의 아버지, [[제갈현#s-1]]의 형. 서주 낭야국 양도현 사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제갈근과 제갈량 사이에 [[제갈씨|딸 2명]]이 더 있었다. 그의 첫 아내 장(章)씨는 일찍 죽었고, 이후 그는 송씨를 후처로 들였다. 제갈근과 제갈량은 첫째 부인인 장씨 소생이고, 제갈균은 장씨 소생이란 설과 송씨 소생이란 설이 공존하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 알 수 없다. 삼국지 내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무에 가깝지만, 자식농사에서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뒀기에 역사에 이름이 남았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제갈량]]'''이야 말할 것도 없고, 장손인 [[제갈각]]은 비록 오만한 성품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나라의 최고 권력자까지 올랐으며, 둘째 아들의 장남인 손자 [[제갈첨]] 또한 촉한의 부마이자 위장군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연주 태산군의 군승(태수를 보좌하는 관직)을 지냈지만 제갈량이 어릴 적에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제갈량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고 계모인 송씨 슬하에서 컸다고 한다. [[한국]]의 남양 [[제갈]]씨에서는 제갈규를 시조로 삼으며, 제갈규의 5세손 제갈충이 3세기 말엽 [[신라]]에 [[망명]]하여 한국 제갈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제갈충은 제갈량의 증손자로 알려져있다. 제갈충은 제갈경의 아들이며 또한 제갈경은 [[제갈첨]]의 차남이라고 한다.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은 유선의 딸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므로, 이와 같은 유래에 한치의 틀림도 없다면 한국 제갈씨는 제갈량은 물론이고 [[유비]]의 후손이기도 한 셈. 물론 여기에도 이설은 있어 제갈충은 제갈첨의 차남인 제갈경의 아들이 아니라 제갈첨과 함께 촉한 멸망시에 면죽관에서 전사한 장남 제갈상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아예 단지 제갈규의 5대손이라고만 전하기도 하여 자세한 내막은 정확히 알 수 없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제갈규의 5대손일 뿐이라는 단서만을 따르자면 한국의 제갈씨는 제갈량의 동생인 [[제갈균]]의 후손일 수도 있고 [[제갈근]]의 아들이자 제갈량의 양자였던 [[제갈교]]의 손자 제갈현이 [[제갈각]]의 삼족이 멸족된 뒤 다시 제갈근의 후사를 잇게 되었으므로 적자인 제갈현을 제외한 동렬의 오나라 제갈씨의 후손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제갈량의 증손자면 제갈규한테는 5세손이 아니라 4세손이다. 이처럼 구체적인 내용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지만, 아무튼 제갈규의 5대손인 제갈충이 신라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된 이래 그 후손이 중국으로 귀환하였다가 제갈규의 20대손에 해당하는 제갈공순이 9세기 초 다시 신라로 귀화함으로써 한국 제갈씨의 중시조로 일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제갈경은 제갈첨과 제갈상의 사후, 그리고 촉한이 멸망한 이후 [[서진|진晉나라]]에서 벼슬을 하기는 하였지만 망국의 설움 때문이었는지 결국 그 아들 제갈충이 신라로 망명하였고 진의 멸망 이후 중국으로 돌아갔던 제갈충의 후손이 환관들이 황제들을 줄줄이 살해하는 당나라 말 혼란기에 다시 신라로 건너온 이래 완전히 정착한 것. 물론 당연하겠지만 모든 제갈씨가 망명한 것은 아니라서 여전히 중국에는 제갈량, 제갈근의 후손들이 건재하며 [[진화시|팔괘촌]]을 비롯한 제갈씨의 집성촌들도 관광 명소로 알려져있다.] == 가계도 == [[파일:제갈규가계도1.jpg]] [[파일:제갈규가계도2.jpg]] == 창작물에서 == [[파일:전략제갈규.png]]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이름은 언급이 안되지만 제갈량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으로보아 제갈규가 확실하다. 제갈량에게 의붓아버지가 있다는 기록 같은 것은 없으니. [[진순신]]의 [[소설 제갈공명]]에서 태산군에서 관직을 역임하면서 아내가 제갈량을 낳으려고 하자 양도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임지에 머물러 업무를 수행했으며, 제갈량의 이름에 대해서는 일식이 암시하는 것처럼 어두운 세상이 될 것 같다면서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가져다주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후 동생 [[제갈현]]이 낙양에 들어가서 시랑을 역임하다가 낙양의 정쟁에 질려서 관직에 사직하기로 하며, 이로 인해 제갈현과 함께 의논하고 제갈규는 양도에 든든한 사람이 없기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일족을 보살펴달라고 하면서 그 뜻에 찬성한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의 [[제갈량]]이 등장하는 연의에서는 원래 서주에 살다가 [[서주 대학살]] 때 제갈규는 죽고 삼형제는 형주의 [[제갈현]]에게 보내져 키우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때문에 제갈량은 어릴 때 기억으로 [[조조]]의 패도에 염증을 느껴 유비에 이끌린 것으로 묘사된다. [[분류:187년 사망]][[분류:후한의 인물]][[분류:낭야 제갈씨]][[분류:남양 제갈씨]][[분류:린이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