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1차 세계대전의 전투 목록)] ||<-3> {{{+1 '''1차 이프르 전투'''}}} || || '''시기''' ||<-2>1914년 10월 19일 ~ 1914년 11월 22일 || || '''장소''' ||<-2>이프르(Ieper), [[벨기에]] || || '''교전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3]]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br][include(틀:국기, 국명=영국)][br][include(틀:국기, 국명=벨기에)] ||<^|1>[include(틀:국기, 국명=독일 제국)] || || '''지휘관'''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3]] [[조제프 조프르]][* 프랑스군 참모총장이자 총사령관][br][[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3]] 페르디낭 포슈[br][[파일:영국 국기.svg|width=23]] 존 프렌치[br][[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23]] [[알베르 1세]] ||<^|1>[[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3]] [[에리히 폰 팔켄하인]][br][[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3]] [[뷔르템베르크 공작 알브레히트]][br][[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3]]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br][[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3]] 막스 폰 파베크[br][[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3]] [[알렉산더 폰 린징겐]]|| ||<|3> '''병력'''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3]] 3,989,103명||<^|3>[[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3]] 5,400,000명|| ||[[파일:영국 국기.svg|width=23]] 163,897명 || ||[[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23]] 247,000명 || ||<|3> '''사상자'''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3]] 최소 50,000명||<^|3>[[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3]] 130,000명|| ||[[파일:영국 국기.svg|width=23]] 54,000명|| ||[[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23]] 21,000명 || || '''결과''' ||<-2>[[독일 제국군]]의 패배 || || '''영향''' ||<-2>[[참호전]]의 본격적인 시작. [[슐리펜 계획]]의 사형선고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10.19일 - 11.22일까지 서부전선의 이프르에서 벌어진 전투. 이 전투로 인해 서부전선을 단기전으로 끝내려는 독일의 슐리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참호전이 고착화된다. == 전투 전 == 1914년 9월 12일, [[마른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1차대전은 일단 몇가지 흐름이 변했다. 피해는 연합군이 컸지만 독일군은 끝내 마른(Marne)에서 프랑스를 이기지 못하며 슐리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당시 전선은 독불국경 남단에서부터 엔 강까지 느슨하게 연결된 상태였다. 이제 막 전쟁 초기의 기동이 멈추며 한숨 쉬던 순간이어서 곳곳에 군사적 행동을 가할 수 있는 틈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아직 전략적 공세의 고삐를 쥐고 있던 독일이나 겨우 한숨을 돌린 연합군 모두 이러한 틈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고자 하였다. 슐리펜 계획의 실패 후 참모총장에 오른 팔켄하인은 10월 초 수아송과 베르됭일대를 공격해 서부전선 중앙부를 돌파하여 프랑스의 전력 손실을 극대화하려는 계획을 구상한다. 그런 와중에 9월 양측의 시선이 전선 서쪽으로 집중되었다. 독일이 먼저 서쪽 방면의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벨기에 앤트워프를 공격하던 전력에서 1개 군단을 차출하고 말았고 이 때문에 앤트워프 공략시도는 극도로 둔화되고 말았다. 한편 연합군은 기병을 앞세워 벨기에로 치고 들어가려는 계획을 세워 엔 강과 플랑드르 일대에 부대를 집중 배치했다. 양측모두 같은 곳으로 우회하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9월 17일 누아용에서 조우한 양측은 전투를 벌였고 프랑스 제6군이 패퇴하고 말았다. 9월 24일 뻬혼느 방면의 독일군의 돌파 시도는 프랑스군에 막혔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알베르, 릴 등을 거쳐 참호가 길게 형성되었고 결국 전체 전선에 참호가 형성되는 '바다를 향한 경주'가 시작되었다. 경주는 뉴포르에까지 참호선이 형성되면서 비로소 종료되었다. 한편 팔켄하인의 뻘짓으로 둔화되었던 앤트워프 공략은 다시 동력을 확보하였다. 참호선이 연장되면서 후방이된 앤트워프를 제거하기 위해 독일은 9월 28일 공세를 가해 5일만에 외곽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영국의 해군사단이 지원했지만 10월 10일 벨기에군은 앤트워프에서 철수해 이제르 강 일대의 방어선으로 후퇴하면서 앤트워프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이제르 강의 방어선 또한 테르바트가 무너지면서 약화되었고, 벨기에는 수공이라는 고육책으로 간신히 독일군을 물리친다. 그렇게 전선은 딕스뮈드와 라 바세 사이 이프르 일대로 축소되었다. 10월 8일부터 19일까지 이제는 영국원정군도 포함한 5개군단이 연합군의 방어를 지원하기 위해 열차와 도로로 도착했다. 16만 영국원정군의 북쪽에는 앤트워프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온 벨기에군의 잔여부대가 이제르 강 어귀의 뉴포르로 이어지는 해변을 따라 전진했다. 영국 해병사단의 수병들은 대부분 오스텐더로 이미 떠났고 앞서 상륙한 영국군 제 7사단은 그곳에서 교두보를 장악하고 있다가 10월 14일에 이프르 근처에서 영국원정군의 본대에 합류했다. 독일은 알브레히트 공작의 제4군 20만이 이프르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본래 4군은 전선 중앙 아르덴 일대에 배치되었으나 참호 경쟁이 시작되면서 계속 이동 전개했고 최종적으로 이 지역에 멈추게 된 것이었다. == 전투전개 == 영국 제1군단이 이프르 북부 랑에마르크를 향해 진격하던 중 독일 제23,26예비군단과 조우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력상 열세인 영국군은 전 병력을 축차 투입하면서 필사적으로 대응하였다. 한편 독일의 주력은 이프르 남부 아르망티에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포격으로 영국진지를 두들긴 이후 진격했지만 진흙밭인 땅 상태로 인해 진격속도는 현저히 낮았고, 이들은 모두 참호 속 영국군의 먹이가 되었다. 아르망티에에서 막힌 독일군은 이번에는 더 남쪽인 게루벨트를 때리기로 한다. 10월31일 독일군의 공세가 개시되어 1차 방어선이 녹아내렸지만 지친 독일군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고, 영국군의 반격으로 게루벨트 방면 공격도 저지당했다. 11월 초 프랑스군이 이프르 방면에 증원되면서 영국의 부담을 어느정도 줄였다. 하지만 주도권은 여전히 독일이 쥐고 있었고, 11월 11일 독일은 최정예 프로이센 근위사단까지 밀어넣으면서 메넹에서 이프르 방면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병력의 질과 양은 독일이 우세했지만, 문제는 전략이었다. 여전히 돌격만 외치면서 흘리는 피만 늘어났다. 게다가 전투병 뿐만 아니라 행정병, 의무병, 취사병까지 총동원한 영국군의 경이로운 방어로 인해 독일은 전진할 수 없었다. 결국 제풀에 지친 독일은 수녀의 숲 후방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예비대 동원에 한계를 느낀 독일군이 11월 20일 철수하면서 전투는 종료되었다. == 결말 ==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8만 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영국군은 5만 명 이상 희생되었다. 이는 1914년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과 중 가장 참혹한 수준이었다. 독일이 전력이 앞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패했던 가장 큰 이유는 참호전이 공자(功者)보다 방자(防者)에게 절대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기동전]]은 막을 내리고 본격적인 참호전이 시작되었고, 양측이 세워 놓았던 모든 시나리오는 무효가 되었다. 특히 마른 강에서 후퇴하였을 때는 물론, 엔 강에 진지를 구축하였을 때까지만 해도 전선의 정체를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던 독일의 전략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팔켄하인은 당장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서부전선의 상황을 인정하고 4개 기병사단과 8개 보병사단을 차출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고전하고 있던 동부전선으로 보냈다. 한편 영국군은 방어에 성공하고 외견적으로는 교환비에서도 이득을 보았으나, 징병제를 기반으로 한 독일군과 달리 이 전투에 참여한 영국군은 정예화된 직업군인이었다. 이후 영국은 징병제를 실시하며 양적으로는 더 거대화되었지만, 질적으로는 대전내내 이 손실을 결코 극복할 수 없었다. 이들의 지휘관 프렌치경 역시 인적 손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로인해 이후 영국군이 소극적인 작전으로 일관하며 --본인의 이름과는 달리-- 프랑스군 지휘관들과 마찰을 빚어, 결국 이듬해 헤이그경으로 교체되는 연쇄효과를 가져왔다. 양측이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대대적인 전략의 재수립에 골몰하는 동안, 1차 대전 중 첫번째 크리스마스가 찾아왔고 일선 병사들간에는 전투를 중단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급기야 이러한 움직임은 양측 병사들이 서로 무기를 내려놓고 참호 밖으로 나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친교를 나눈 [[크리스마스 정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군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키고 서부전선에서는 수세적으로 일관하자, 연합군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고, 연합군은 계속해서 막대한 인명피해만 발생시키게 되었다.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독가스를 사용하여 연합군을 공격하기도 했고, 무의미한 공세 속에 [[무인지대]]에는 시체만 계속 쌓여갔다. 한편 동부전선을 정리한 독일군은 1916년 초 서부전선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1차 대전 최악의 전투로 꼽히는 [[베르됭 전투]]이다. [[분류:제1차 세계 대전/전투]][[분류:1914년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