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9><:> {{{+1 '''제1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 '''시기''' ||<-2>서기 1235년|| || '''장소''' ||<-2>[[콘스탄티노폴리스]]|| || '''원인''' ||<-2>[[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 시도|| || '''교전국'''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width=25]] '''[[니케아 제국]]'''[br][[파일:불가리아 제2제국 국기.svg|width=25]] [[불가리아 제2제국]]||[[파일:Latin Empire 1280.png|width=25]] [[라틴 제국]][br][[파일:베네치아 공화국 국기.svg|width=25]] [[베네치아 공화국]] || || '''지휘관'''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width=25]] [[요안니스 3세]]||[[파일:Latin Empire 1280.png|width=25]] [[장 드 브리엔]]|| || '''결과''' ||<-2>[[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 실패.|| || '''영향''' ||<-2>[[라틴 제국]]의 쇠퇴.|| [목차] [clearfix] == 배경 == 1228년, [[라틴 제국]] 황제 로베르가 사망하고 브리엔의 장이 섭정이 되었다.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 [[불가리아]]에게 패하면서 서쪽의 위협은 줄었지만 [[동로마 제국]]의 고토 회복을 노리는 [[니케아 제국]]의 위협은 이제 부터였다. [[요안니스 3세]]는 [[불가리아 제2제국|불가리아]]와 동맹을 맺고 라틴 제국을 압박해갔다. 이 시기에 라틴 제국은 불가리아와 니케아 사이에서 쇠퇴하고 있었으나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는 [[니케아 제국|니케아]]가 크레타의 반란을 지원하자 에게 해와 동지중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라틴 제국의 유지를 원했다. == 전개 == 라틴 제국의 실질적 통치를 담당하던 [[장 드 브리엔]]은 당시 90세가 가까운 노구였지만 1231년 라틴 제국을 맡은 이래 오히려 니케아 제국을 상대로 역습에 나서 3년 가까이를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에서 싸울 정도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1210년 장 드 브리엔은 예순살의 나이로 당시 17세의 [[마리아(예루살렘 왕국)|예루살렘 여왕]]과 결혼했었고 70대 중반을 넘어 새로 얻은 아내에게 늦둥이를 보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34개월의 원정을 통해 얻은 것은 실질적으로는 전무했다. 아니, 이제 도시 국가로 전락한 라틴 제국의 수도를 방어하는 길이 이것뿐이었을 수도 있다. 원정 이후, 장 드 브리엔은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요안니스 3세는 이를 거절하고 불가리아와의 동맹을 체결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할 생각이었다. 1235년, 요안니스 3세는 [[아나톨리아]]와 [[갈리폴리]]에 남아있는 라틴 제국의 마지막 전초기지들을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는데 베네치아는 라틴 제국을 지원하고자 휘하의 낙소스 공국을 이용해 함대를 보냈다. 해전에서 베네치아를 상대할 수 없는 니케아 제국은 일단 물러났으나 베네치아 함대가 복귀한 1235년 겨울, 니케아와 불가리아 연합군은 재차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요안니스 3세는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어 옛 동로마 제국을 회복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을 요청했으나 교황은 오히려 라틴 제국을 방어하기 위한 십자군을 구성하려 하고 있었다. 외교적 상황도 여의치 않은데 겨울이 다가오자 니케아-불가리아 연합군은 후퇴했고 내년에 포위를 다시 하기로 약속하였으나 불가리아 제국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 결과 == 브리엔의 장이 노구를 이끌며 분투하고, 베네치아의 지원을 얻은 라틴 제국은 당장의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장이 죽고 보두앵 2세가 즉위하면서 결국 [[제1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끝에 라틴 제국은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이 재건된다. [[분류:그리스-불가리아 관계]][[분류:동로마 제국의 대외 전쟁]][[분류:라틴 제국]][[분류:베네치아 공화국]][[분류:불가리아의 역사]][[분류:이탈리아-그리스 관계]][[분류: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분류:13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