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동로마 제국의 대외전쟁)] [include(틀: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9><:> {{{+1 '''제1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 '''시기''' ||<-2>서기 1260 ~ 1261년|| || '''장소''' ||<-2>[[콘스탄티노폴리스]]|| || '''원인''' ||<-2>[[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 시도|| || '''교전국'''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width=25]] [[니케아 제국]]||[[파일:Latin Empire 1280.png|width=25]] [[라틴 제국]] || || '''지휘관'''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width=25]] [[미하일 8세]][br][[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width=25]]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스트라티고폴로스]]||[[파일:Latin Empire 1280.png|width=25]] [[보두앵 2세(라틴 제국)|보두앵 2세]]|| || '''결과''' ||<-2>[[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br][[라틴 제국]]의 멸망과 [[로마 제국]]의 부활.|| [목차] [clearfix] == 배경 ==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십자군 국가들에 분할되었다. 미하일 콤니노스 두카스가 세운 알바니아의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아나톨리아]] 서북부의 [[니케아 제국]] 같은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들은 어떻게든 잃어버린 옛 수도를 다시 회복하고 싶어했다. 초기에는 이피로스가 라틴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 듯 했지만 클로코트치냐 전투에서 [[제2차 불가리아 제국]]에게 패하고 경쟁 구도에서 탈락해 버렸다. 남은 것은 [[요안니스 3세]]의 통치로 세력을 회복하고 불가리아와의 동맹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릴 발판을 마련한 니케아 제국이었지만 [[1235년]]의 [[제1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은 [[베네치아]]의 간섭과 브리엔의 장이 분투한 결과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니케아 제국은 무리를 해서라도 유럽에서의 영토를 회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불가리아로부터 [[트라키아]], [[마케도니아]]를 수복하는 데 성공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 지역에서의 패권을 확립했다. 이제 [[라틴 제국]]은 동서에서 포위당하고 교황청과 베네치아에게 버림받아 목숨이 경각에 달했지만 요안니스 3세와 그 후계자가 모두 [[간질]] 발작으로 더 이상 니케아 제국을 이끌지 못하게 되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1250년대 후반에 들어서 강성해진 니케아 제국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에게 견제당했지만 야심만만한 [[미하일 8세]]는 1259년 여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연합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라틴 제국으로부터 수도를 탈환하는 것뿐이다. == 전개 == === 1260년 공성전 === 1260년 초,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미하일 8세는 겨울이 지나자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연대기]] 마다 이야기가 다른데, 어떤 연대기에서는 내부에 내통자를 심어두어 소수의 병력만으로 간단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다고 하고 또 다른 연대기에서는 맹렬하게 저항하는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미하일 8세가 직접 나서서 공성병기 운영을 감독해야 했고 갈라타 지구를 공격하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고도 한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러한 차이점[* 아크로폴리데스의 기록과 파키메레스, 그레고라스의 기록은 같은 사건을 묘사하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차이점이 크다.]에 대해서 몇몇 연대기가 미하일 8세의 실책들을 덮으려 했다고 보고 있으며 이후의 상황을 보아도 갈라타 공격에 고전했다는 내용들이 사실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고 있다. 1260년 8월, 미하일 8세와 라틴 제국의 보두앵 2세는 1년간의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 1261년 공성전 === 공성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미하일 8세는 재차 공성을 준비했고 1261년 3월, [[제노바 공화국]]의 교역권을 인정하는 대신 함대를 지원받는 협정을 맺었다.[* 이는 당장에는 커다란 이익을 주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시련의 원흉과도 같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의 양대 축중 하나인 동로마 해군을 건설할 자원을 고갈시켜 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로써 제노바가 베네치아를 견제하는 형국이 되어 라틴 제국이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는 것을 상당부분 차단하는데 성공하자[* 제노바와 니케아 제국의 협력은 베네치아의 큰 분노를 불러왔고 교황은 제노바를 파문하겠다고 협박했으나 제노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하일 8세는 재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에 나설 준비를 했다. 1261년 7월 25일, 가볍게 트라키아를 견제하려고 보낸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스트라티고폴로스]]의 부대는 베네치아가 수비대를 다프누시아 섬 공략에 차출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를 틈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 영향 == 8월 15일, 미하일 8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마침내 니케아 제국이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로마 제국을 재건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니케아 제국은 너무 많은 재원을 소진하고 있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게 점령당하기 이전부터 이미 로마 제국에 내재하던 수많은 문제점들은 이제 더욱 심각해져서 니케아 제국에 부담이 될 상황이었다. [[로마 제국]]은 멸망한 지 60년 만에 부활했으나 니케아 제국이 차지한 것은 폐허가 되고 방치된, 알맹이는 베네치아가 빼돌린 옛 영광의 도시였다. [[분류:동로마 제국의 대외 전쟁]][[분류:라틴 제국]][[분류: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분류:13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