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통일신라]] [[분류:신라의 도서]] [[분류:해외 소재 문화재]] [[분류:쇼소인 소장품]] [[분류:음성군의 문화재]] [[파일:신라 유기그릇.jpg]] 제2신라문서가 처음 발견된 [[정창원 신라 유기그릇]]. [[파일:제2신라문서.jpg]] [목차] == 개요 == [[통일신라]] 시기에 작성된 [[공문서]] 2장으로 1933년,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에서 [[유기(금속)|유기]] 그릇의 일종인 '좌파리가반'(佐波理加盤)[* '좌파리'라는 한자 표기는 일본 발음으로 '사하리'가 된다. '사하리'는 신라어로 '유기(금속 그릇)'를 의미하는 'ᄉᆞᆸ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고.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kn&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kn_074_0070_0020&position=-1|#]]]을 정리하던 중 포개진 그릇 사이에서 꼬깃꼬깃 접혀진 통일신라시대 공문서 2장이 발견되었고, '제2 신라문서'로 명명됐다. 제2신라문서인 이유는 이보다 앞서 [[민정문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민정문서를 제1신라문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 상세 == 이런 신라 공문서가 바다건너 일본에서 발견된 것은 신라에서 열도로 운송할 좌파리가반을 [[포장]]하는 과정에서 제2 신라문서가 충격 완화재로 사용됐기 때문이었다. 즉 공문서로 사용한 이면지를 구겨서 [[택배]]의 [[에어캡|뽁뽁이]] 용도로 사용했다고 보면 된다. 신라에서 이 문서가 작성된 장소는 '파천촌'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로 추정된다고 한다. 통일신라 지방사회 구조를 파악할 1차 사료로 엄청난 관심을 모았던 민정문서와 달리 제2신라문서는 역사 전공자들한테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다. 분량이 적고 해독이 어렵기 때문. 소수의 [[구결]] 연구가에게만 [[http://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418883|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 내용 == 그 내용은 앞면과 뒷면으로 나뉘는데 앞면에는 지역 진상물인 [[공물]](貢物)에 관한 내용이 있다. 관청에서 말린 [[돼지고기]]와 [[말고기]]의 상태를 점검하고, 지방 마을로부터 쌀과 콩을 매달 상납받은 것을 기록했다. 돼지고기는 [[꼬리]] 부분은 상납받았지만 유통 과정에서 더럽혀져 버렸다고 한다. 뒷면 내용은 해석이 어렵지만 [[벼]]를 도정한 것, [[관리]] 급여인 [[녹봉]](祿俸)에 대한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대략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 같이보기 == * [[민정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