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주요선거)] [include(틀:역대 대한민국 국회)] ||<-4> {{{#fff {{{+1 '''대한민국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 || ||<-4> {{{#!wiki style="margin: -7px -12px;" || {{{-2 [[1954년]] [[5월 20일]]}}}[br][[제3대 국회의원 선거|3대 민선]] || → || {{{-2 [[1958년]] [[5월 2일]]}}}[br]'''4대 민선''' || → || {{{-2 [[1960년]] [[7월 29일]]}}}[br][[제5대 국회의원 선거|5대 민선]] ||}}} || || {{{#70000b,#fe8f9a '''투표율'''}}} ||<-3>87.8%{{{-3 [[제3대 국회의원 선거|{{{#blue,#0000ff ▼ 3.3%p}}}]]}}} || ||<-4> {{{#fff '''선거 결과'''}}} || ||<-4> [[파일:제4대 민의원 선거 결과 수정.png|width=100%]] || ||<-4>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54170 calc(126*100%/233), #000080 0%, #000080 calc((127 + 79)*100%/233), #008080 0%, #008080 calc((127 + 79 + 1)*100%/233), #808080 0%, #808080 calc((127 + 79 + 1 + 26)*100%/233));" }}} || || '''정당''' || '''지역구''' || '''총합''' || '''비율''' || || [[자유당|{{{#!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254170; font-size: .9em;" {{{#fff '''자유당'''}}}}}}]] || '''127석''' || '''127석''' || '''54.50%''' || || [[민주당(1955년)|{{{#!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0080; font-size: .9em;" {{{#fff '''민주당'''}}}}}}]] || '''79석''' || '''79석''' || '''33.90%''' || || [[통일당|{{{#!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8080; font-size: .9em;" {{{#fff '''통일당'''}}}}}}]] || 1석 || 1석 || 0.42% || || [[무소속|{{{#!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808080; font-size: .9em;" {{{#fff '''무소속'''}}}}}}]] || 26석 || 26석 || 11.15% || [목차] [clearfix] == 개요 == '''[[1958년]] [[5월 2일]] 치러진 민의원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87.8%를 기록했다.''' '''[[소선거구제]]'''를 유지했으며 의원정수는 '''233명'''이었다. 1952년 [[발췌 개헌]]으로 국회 양원제가 도입됨에 따라 민의원 선거와 함께 참의원 선거도 치러져야 했으나, 여당인 [[자유당]]의 반대로 인해 민의원의원 선거만 실시되었다. 임기는 1958년 5월 31일부터 1962년 5월 30일까지였으나 [[4.19 혁명]]으로 인하여 제4대 국회의 임기는 1960년 7월 28일에 종료됐다. == 배경 == [[제3대 국회의원 선거|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안정적 과반을 확보하여 [[사사오입 개헌]]으로 3선에도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이었으나 [[1957년]]부터 미국의 원조가 감소하기 시작해[* 1958년에는 아예 유상 차관 형식으로 전환해버린다.]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경제조차도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이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으로 이어졌다. 경쟁률은 3.2대 1이었으며(후보자 841명) 지난 총선보다 더 안정되었으며 참가한 정당과 사회단체는 총 14개이다. 또한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의 시행에 따라 [[삼팔선]]에서 맞춰 짜여진 선거구가 아닌 [[군사분계선|휴전선]] 이남의 전 지역에 대해 치러진 첫 선거다. 233석이 정원이며 과반 획득을 위한 의석수는 117석이었다. == 결과 == [[파일:Screenshot 2020-07-29 at 22.21.15.png]] ||<-7> {{{#fff '''개표 결과''' }}} ||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수 || || [include(틀:자유당)] || 3,607,092 || {{{#254170,#55ffd0 '''42.1%'''}}} || '''127석''' || || [include(틀:민주당(1955년))] || 2,934,036 || {{{#000080,#5757ff '''34.2%'''}}} || 79석 || || [include(틀:통일당)] || 53,716 || 0.6% || 1석 || || [include(틀:대한독립촉성국민회)] || 50,568 || 0.6% || 0석 || || [include(틀:무소속)] || 1,857,707 || 21.7% || 26석 || || 총합 || 9,077,835 || 100% || 233석 || ||<-6>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 || || 지역 || [[자유당|{{{#fff 자유당}}}]] || [[민주당(1955년)|{{{#fff 민주당}}}]] || [[통일당|{{{#fff 통일당}}}]] || [[무소속|{{{#fff 무소속}}}]] || 합계 || || 서울 || 1 || {{{#fff 14 }}} || 0 || 1 || 16 || || 경기 || {{{#fff 15 }}} || 8 || 0 || 2 || 25 || || 강원 || {{{#fff 15 }}} || 2 || 0 || 3 || 20 || || 충남 || {{{#fff 15 }}} || 6 || 0 || 1 || 22 || || 충북 || {{{#fff 8 }}} || 4 || 0 || 1 || 13 || || 전남 || {{{#fff 18 }}} || 10 || 1 || 3 || 32 || || 전북 || 10 || {{{#fff 11 }}} || 0 || 3 || 24 || || 경남 || {{{#fff 20 }}} || 15 || 0 || 5 || 40 || || 경북 || {{{#fff 25 }}} || 7 || 0 || 6 || 38 || || 제주 || {{{#fff 1 }}} || {{{#fff 1 }}} || 0 || {{{#fff 1 }}} || 3 || || 합계 || {{{#fff 127 (54.50%) }}} || 79 (33.90%) || 1 (0.42%) || 26 (11.15%) || 233 (100%) || [[자유당]]이 과반을 얻었으나 127석으로 지난 번보다 의석 비율이 줄게 되었다. 군소 정당이 난립하는 경향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무소속 의원 수는 26명으로 현저히 줄었다. 반면 [[조병옥]]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1955년)|민주당]]은 총 79석을 차지하여 제1야당으로써 최초로 개헌저지선을 확보하여 어느 정도 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야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원내 정당은 자유당, 민주당, [[통일당]][* [[김준연]]이 창당한 민주당 계열의 정당으로 [[전라남도]]에서 1석을 얻었다. [[5.16 군사정변]] 직후 해산되었다.] 3개뿐이었다. 요약하자면 '''양당제'''의 경향이 나타난 첫 선거. [[여촌야도]] 현상은 더욱 뚜렷해져 자유당은 [[서울특별시]]에서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서울의 16개 의석 중 여당 자유당이 획득한 의석은 단 '''1곳'''. 민주당이 14석, 무소속이 1석을 차지해 굴욕을 면치 못했으며 이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서울의 민심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음을 의미했다. 다만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경상도|영남]]과 [[전라도|호남]]에서 자유당이 앞섰기 때문에 최종 의석 수는 꽤 차이가 났다.[* 이 당시는 지금과 달리 남쪽에 인구가 몰빵되어 있어 영호남의 의석만 합쳐도 134석이었다.] 특히 총선 직전 해산된 [[조봉암]]의 진보당 지지세가 가장 강했던 [[경상북도]]에서 자유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만약에 진보당이 총선에 참가할 수 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다. [[전라남도]] [[보성군]]에서는 자유당 [[안용백]] 후보가 [[닭죽 사건]]이라는 [[부정선거]]를 일으켰다가 당선무효가 되기도 했다. 근데 재선거 때 또 자유당 후보인 [[황성수]]가 당선되었다. 또한 [[이정재(조직폭력배)|이정재]]는 원래 [[경기도]] [[이천시|이천군]]에서 출마하려 했으나 [[이기붕]]에게 선거구를 빼앗겼다. === 선거구별 결과 === [[제4대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국회의원]] 항목 참조. == 여담 == * 현재 살아있는 4대 국회의원은 [[유용식]](양평군) 한 명 뿐이다.[* 다만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3012900329202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1-29&officeId=00032&pageNo=2&printNo=8410&publishType=00020|1973년 이후]] 행적이 불분명이다.] * 4대 국회의원 중 여성 의원은 [[박순천]](부산시 동 갑), [[박현숙(1896)|박현숙]](김화군), [[김철안]](금릉군) 이렇게 3명이다. * 가장 장수한 4대 국회의원은 [[장석윤]](횡성군), [[조광희(1917)|조광희]](상주군 갑)로 향년 99세에 죽었다. [[분류:제4대 국회의원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