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미국의 우주 비행사]] [[분류:1932년 출생]] [[분류:디킨슨 카운티(캔자스) 출신 인물]][[분류:캔자스 대학교 출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Joe_Engle_X-15_pilot.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oe_Engle.jpg]] [[우주왕복선]] 파일럿 Joseph Henry "Joe" Engle. 1932년 8월 26일 [[미국]] [[캔자스]]주 채프먼 출생. [목차] == 개요 == 미국의 우주비행사. == [[NASA]] 이전 == === X-15 테스트 파일럿 === [[캔자스]]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캔자스 대학교]]를 나온 캔자스 토박이이다.[* 캔자스 출신 역대 우주 비행사는 파일럿인 엥글과 로널드 에반스(아폴로 17호 사령선 조종사이자 엥글의 1년 후배), 그리고 천문학자인 미션 스페셜리스트 스티브 홀리까지 세 명이 있는데 모두 캔자스 대학교 출신이다.] 캔자스 대학교 시절 항공공학을 전공하고 주말에 [[세스나]]를 자주 조종하며 [[항덕후]]가 되었다. 항덕질을 위해 [[테스트 파일럿]]이라는 목표를 갖고 [[미합중국 공군]] ROTC를 지원하여 장교가 된 엥글은 조종사 훈련을 가뿐히 수료하고 [[센츄리 시리즈]]의 필두였던 [[F-100]]을 조종했다. 이후 공군의 [[테스트 파일럿]]이 된 그는 해당 시대 파일럿들 사이에서 핫이슈였던 [[NASA]]의 [[머큐리 계획]]과 [[제미니 계획]]을 두고 캡슐에 짐짝처럼 실려서 살짝 올라갔다 오는 것은 시시하다며[* 사실 이런 시각이 우주개발 초창기에는 꽤 강했다. [[척 예거]] 역시 그렇게 우주선에서 조종하는 것도 없이 그냥 실려갔다 떨어지는 것은 원숭이가 실려서 올라가는 것과 다를게 없다고 여겼다.] 공군의 테스트 파일럿으로 잔류하여[* 정확히는, 원래 테스트 파일럿 학교 동기인 [[마이클 콜린스(우주비행사)|마이클 콜린스]]와 함께 NASA에 지원했다가 공군 측에서 엥글의 NASA 지원을 억지로 취소시키고 X-15의 파일럿으로 편입시켰다.] X-15는 [[B-52]]에서 유인 [[로켓]]처럼 투하되어 발진하는 기체였는데, 당시 우주 나간다고 하면 파일럿들 사이에서는 머큐리 계획 같은 것은 쳐주지 않고 이렇게 로켓으로 발사되는 정도는 되어야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훗, 이래야 파일럿답지!]]''' 하는 부심 비슷한게 있었다고. 이렇게 X-15의 파일럿으로 활동한 인물들은 당대 미국에서 군/민간을 막론하고 최고로 손꼽히는 테스트 파일럿들이었는데, 이들 중에 함께 활동한 이들로는 [[닐 암스트롱]]도 있었고, 훗날 고위 장성까지 오르는 인물도 꽤 있었다. 하지만 이런 최고의 테스트 파일럿들도 미 공군의 기준에서 우주라고 여겨지는 해발 고도 50마일(80km)[* 대략 [[성층권]]과 [[열권]] 사이의 [[중간권]] 정도에 해당한다.] 이상을 돌파하기는 헉헉대는게 현실이었는데, 1962년 7월 17일 로버트 화이트가 X-15를 '''조종'''하여 해발고도 80km를 돌파했고[* 여기서 나온 칭호가 이른바 Winged Astronaut. 소련도 아직 못했던 이 기록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게다가 최초로 마하 4, 5, 6까지 돌파했던 인물인 터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직접 트로피를 선사하고 [[커티스 르메이]] [[공군참모총장]]도 공군 우주비행사 배지를 줬다. 물론 우주에 갔다온 뒤로는 목숨이 중하다며 [[높으신 분들]]에 의해 X-15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어 일반 전투비행단이나 군수사령부 쪽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해야 했는데, 이런 로버트 화이트의 대체자로 들어온 것이 엥글이다.], 로버트 러시워스, 조셉 워커[* 이 쪽은 미국 최초의 민간인 우주비행사이기도 하며, 90, 91번째 비행에서는 100km 고도(이를 흔히 '''Kármán line'''이라고 하며 국제적으로는 이 정도는 넘겨줘야 우주라고 쳐준다)마저 넘겨버렸다. 하지만 [[XB-70]] 항목에 언급된 그 사진을 찍은 뒤 자신이 조종하던 [[F-104]]와 XB-70의 충돌사고로 순직했다.]가 차례로 우주에 도달하고 온 뒤, 조 엥글 역시 X-15를 조종하여 '우주'를 갔다오게 된다. 1965년 6월, 8월, 10월에 X-15의 138, 143, 153번째 비행에서 각각 80km 고도를 넘긴 것. 이 시절 엥글은 날아다니는 직업 중 이게 최고라고 감탄하며 매우 즐거워했다. == NASA == === [[아폴로 계획]] === 하지만 우주에 대한 목표를 달성한 뒤 새로운 목표를 찾던, 그리고 지원서가 철회되긴 했지만 여전히 1960년대의 핫이슈였던 [[우주 경쟁|문 레이스]]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던 엥글은 1966년 NASA 5기에 지원하여 합격[* [[켄 매팅리]], 찰스 듀크, [[프레드 헤이즈]], 잭 스와이거트, 스튜어트 루사 등 아폴로 후기 미션의 승무원들이 대부분 5기 출신이다.]했고, 아폴로 14호의 백업 달 착륙선 파일럿으로 배정되어 정말로 달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보통 N회의 백업은 N+3회의 정규팀으로 배정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폴로 15호의 발사를 앞두고 의회에서 [[취소된 아폴로 미션들|아폴로 17호 이후의 미션들을 취소한다고 결정]]하자 그의 운명이 좀 꼬이기 시작한다. 사실 아폴로 17호에 배정되었기에 자기는 달에 갈 수 있을거라 여겼지만, 15호의 백업이자 18호의 정규 달 착륙선 파일럿이었던 [[해리슨 슈미트]]가 전문 파일럿이 아니라 지질학자였기 때문에 민간 과학계에서 '전문 과학자 한 명 쯤은 달에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지질학자였던 슈미트는 당연히 달에서 활동해야 했고, 미션 사령관인 [[유진 서넌]]을 교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사령선 조종사 자리도 맘대로 바꿀 수가 없는 자리였기에 결국 만만한 엥글이 '''{{{+1 달에 갈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허망하게 빼앗겼다.}}}''' 같이 테스트 파일럿 훈련 받은 [[마이클 콜린스(우주비행사)|마이클 콜린스]]는 NASA에 일찍 들어온 덕에 [[아폴로 11호]]로 달에 갔다 왔다. [[디크 슬레이튼]]도 이에 대해서는 많이 미안했던지 엥글에게는 이후 진행될 [[스카이랩]]과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중 어느 곳에 갈지 말만 하라고 선택을 보장해줬고, 달을 가지는 못했지만 천성이 파일럿이었던 엥글은 과학 실험을 하는 것보다는 비행기를 조종할 기회가 많은 우주왕복선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다. ===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Space_Shuttle_Approach_and_Landing_Tests_crews_-_cropped.jpg]] 왼쪽부터 풀러튼, 헤이즈, 엥글, 트룰리. 엥글은 이후 [[엔터프라이즈 우주왕복선|엔터프라이즈]] 활강 시험기의 테스트 파일럿이 되었다. 1조에서는 [[아폴로 13호]]의 멤버였던 [[프레드 헤이즈]]와 공군 [[MOL]]에서 편입된 C. 고든 풀러튼이 활동했고, 2조에서는 엥글과 공군 [[MOL]] 출신의 [[리처드 트룰리]]가 활동했다. 1977년 6월부터 10월까지 세 차례의 테스트를 수행하여 우주왕복선의 안정성을 검증했고, 이후 우주왕복선의 두번째 테스트 미션인 [[STS-2]] 미션의 사령관으로서 트룰리와 함께 비행에 나서게 된다. 이 당시 갖고 간 연료전지가 이상을 일으키며 미션 기간이 125시간에서 54시간으로 많이 짧아졌는데 중계위성도 없는 시절에 지상 관제소와 잠깐 연락 끊길 때 잔다고 뻥치고는[* 사실 관제팀에서도 잔다는 놈들이 전력을 겁나 많이 쳐먹고 있길래 얘네들이 일하고 있구나 알았다.] 근성으로 로봇 팔 테스트를 진행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STS-51-I_crew.jpg]] 뒷줄 : 제임스 밴 홉튼(James D. A. van Hoften), 마이크 런지(John Michael "Mike" Lounge), 윌리엄 프레더릭 피셔(William Frederick Fischer, 이상 미션 스페셜리스트) 앞줄 : 엥글, 리처드 오스왈트 코비(Richard Oswalt Covey, 조종사)[* [[STS-51-L]] 당시 지상 캡콤이었다. 챌린저호 폭발 직전에 "Challenger, Go at throttle up."(챌린저, 출력 최대로.) 명령을 내린 바로 그 인물. 챌린저 참사를 다룬 수많은 영상에서 리처드 코비가 위의 명령을 내린 직후 챌린저가 화염에 휩싸이고, 경악하는 표정을 짓는 코비의 모습이 반드시 나온다. 챌린저 바로 다음의 비행 재개 미션인 STS-26에서 활동했고, 은퇴한 뒤에는 [[토머스 스태퍼드]]와 함께 [[STS-107]] 사후대책 연구위원회를 꾸려 활동했다.] 이후 1985년 통신 위성 3개를 궤도에 전개하는 미션인 STS-51-I(디스커버리) 미션에서 사령관으로 활동하였고 계속해서 우주왕복선을 조종할 예정이었지만, 1986년 1월의 [[STS-51-L]] 챌린저 폭발참사로 NASA의 모든 프로그램이 취소되며 사고 방지 연구에 전념했다. == 은퇴 == 이후 1986년 11월을 끝으로 NASA에서 나왔다. 미 공군[* 정확히는 연방군은 아니고 고향인 캔자스 주방위 공군에 군적을 두고 있었다.]에서도 잉글의 전역식날 [[소장(계급)|소장]] 계급을 달아주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커리어에서 조종해본 기종만 180여개가 넘고, 통산 15,400시간에 달하는 비행시간을 기록했다. 또한 두 종류의 서로 다른 고정익 항공기를 타고 우주에 올라갔다 내려온 유일무이한 인물. 2001년에는 오하이오주의 항공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함께 헌액된 인물들도 쟁쟁하다. [[제2차 세계대전]]-[[베트남 전쟁]]기 미 공군의 트리플 에이스 [[로빈 올즈]](Robin Olds)와 2차대전기 [[미 해병대]] 최초의 에이스 마리언 칼(Marion Carl), 현대 비행훈련 산업의 아버지 알버트 리 울치(Albert Ueltschi)가 잉글과 함께 헌액되었다.] 또한 케네디 우주센터의 우주비행사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나이 먹고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자주 곡예비행도 하며 정력적으로 사시는 듯하다. [[파일:external/www.defencetalk.com/IMG_1140a.jpg]] 이따금씩 [[척 예거]]와 함께 이런저런 기념비행에 참여하고 있다. 푸근한 할아버지가 된 예거와 달리 학구적인 외모가 되었다. == 평가 == [[테스트 파일럿]]의 입지적 인물이자, [[NASA]] 역사상 우주를 경험한 뒤 [[NASA 우주인단]]에 들어온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현재 생존한 유일한 X-15 파일럿. 하지만 미국의 여러 [[우주 비행사]]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업적을 남겼음에도 인지도가 너무도 낮은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NASA]]에서 근무하면서 한번 엄청 [[아폴로 17호|불미]]스러운 일을 겪었다. == 기타 == * [[스타 트렉: 디스커버리]]에서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엥글급 함선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