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KBO 리그 단장)] ||
<-5> '''{{{#fff 조계현의 수상 경력}}}''' || ||<-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3><:>'''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 '''[[1989년 한국시리즈|{{{#ffffff 1989}}}]]''' ||<:> '''[[1991년 한국시리즈|{{{#ffffff 1991}}}]]''' ||<:> '''[[1993년 한국시리즈|{{{#ffffff 1993}}}]]''' || ||<#f01e23><:> '''[[1996년 한국시리즈|{{{#ffffff 1996}}}]]''' ||<#f01e23><:> '''[[1997년 한국시리즈|{{{#ffffff 1997}}}]]''' ||<#131230> '''[[2001년 한국시리즈|{{{#FFFFFF 2001}}}]]''' || ---- ||<-5>
'''1982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MVP''' || || 조광덕 [br]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등학교]]) || → || '''조계현 [br] (군산상업고등학교)''' || → || 김광윤 [br] ([[북일고등학교 야구부|북일고등학교]]) || ---- ||<#151B54> [[KBO 리그 역대 타이틀홀더/투수#s-1|[[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width=150]]]][br] '''{{{#ffffff 1993,1994 KBO 리그 다승왕}}}''' || ---- ||<#151B54> [[KBO 리그 역대 타이틀홀더/투수#s-2|[[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width=150]]]][br] '''{{{#ffffff 1995 KBO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 }}} || ---- ||
<-5> '''{{{#fff 조계현의 단장직 / 역대 등번호}}}''' || ||<-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5><#C70125><:> [[KIA 타이거즈|[[파일:KIATIGERS_1.png|width=80]]]]''' {{{#ffffff KIA 타이거즈 역대 단장}}}''' || ||<:> [[허영택]] [BR] (2014~2017) || {{{+1 →}}} ||<#1e376d><:> '''{{{#ffffff 조계현}}}'''[BR]'''{{{#ffffff (2018~)}}}''' || {{{+1 →}}} ||<:> || ---- ||<-5> '''[[해태 타이거즈|{{{#FFF 해태 타이거즈}}}]] {{{#FFF 등번호 26번}}}''' || || 조도현(1984~1988) || → || '''조계현(1989)''' || → || [[이대진]](1993-1999) || ||<-5> '''[[해태 타이거즈|{{{#FFF 해태 타이거즈}}}]] {{{#FFF 등번호 17번}}}''' || || 강만식(1982-1988) || → || '''조계현(1990~1997)''' || → || [[곽현희]](1998~2004) || ||<-5> '''[[삼성 라이온즈|{{{#FFF 삼성 라이온즈}}}]] {{{#FFF 등번호 27번}}}''' || || 김훈(1997) || → || '''조계현(1998~1999)''' || → || 남기헌(2000~2001) || ||<-5><#131230> '''[[두산 베어스|{{{#fff 두산 베어스}}}]] {{{#fff 등번호 14번}}}''' || || [[김영수]](1998) || → || '''조계현(2000~2001)''' || → || [[고영민]](2002~2010) || ||<-5> '''[[KIA 타이거즈|{{{#FFF KIA 타이거즈}}}]] {{{#FFF 등번호 77번}}}''' || || 결번 || → || '''조계현(2003~2005)''' || → || [[김태룡(1968)|김태룡]](2006~2007) || ||<-5> '''[[삼성 라이온즈|{{{#FFF 삼성 라이온즈}}}]] {{{#FFF 등번호 77번}}}''' || || [[김종모]](2001~2004) || → || '''조계현(2006~2009)''' || → || [[김종훈(1972)|김종훈]](2010~) || ||<-5><#131230> '''[[두산 베어스|{{{#fff 두산 베어스}}}]] {{{#fff 등번호 75번}}}''' || || [[권명철]](2006~2009) || → || '''조계현(2010~2011)''' || → || [[권명철]](2012~2017) || ||<-5> '''[[LG 트윈스|{{{#FFF LG 트윈스}}}]] {{{#FFF 등번호 71번}}}''' || || [[김기태(1969)|김기태]](2010~2011) || → || '''조계현(2012~2014)''' || → || 최경훈(2015~2018) || ||<-5> '''[[KIA 타이거즈|{{{#FFF KIA 타이거즈}}}]] {{{#FFF 등번호 76번}}}''' || || 한혁수(2014) || → || '''조계현(2015~2017)''' || → || 결번 || }}} || ---- |||| [[파일:image_1954379601523524143528.jpg|width=500]] || ||||<:><#C70125> {{{#ffffff KIA 타이거즈 단장}}} || ||||<:><#1e376d> {{{#ffffff 조계현 (趙啓顯 / Cho Kye-Hyeon)}}} || ||<:> '''생년월일''' || [[1964년]] [[5월 1일]] || ||<:> '''국적''' || [[대한민국]] || ||<:> '''출신지''' || [[전라북도]] [[군산시]] || ||<:> '''학력''' ||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 - [[연세대학교|연세대]] || ||<:> '''포지션''' || [[투수]]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 입단''' || [[한국프로야구/1988년/신인드래프트|1988년 1차 1순위 (해태 타이거즈)]] || ||<:> '''소속 팀''' || [[농협 야구단]] (1988) [br] '''[[해태 타이거즈]] (1989~1997)'''[br][[삼성 라이온즈]] (1998~1999)[br][[두산 베어스]] (2000~2001) || ||<:> '''지도자''' ||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03~2005)[br][[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05)[br][[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6~2008)[br][[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08)[br][[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2008~2009)[br][[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9)[br][[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0)[br][[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0~2011)[br][[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1)[br][[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2012~2014)[br][[LG 트윈스/2군|LG 트윈스 2군]] 감독 (2014)[br][[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15~2017) || ||<:> '''프런트''' || [[KIA 타이거즈]] 단장 (2018~) || [목차] == 개요 == 전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두산 베어스]]에서 활동했던 투수. 현재는 [[KIA 타이거즈]]의 단장이다. 2014년 4월 23일 김기태 감독이 사퇴한 후, 5월 11일까지 18일간 수석코치 보직으로 감독 대행을 맡다 [[양상문]] 감독이 선임되면서 2군 감독으로 보직변경되었으나, 김기태가 KIA 감독으로 부임하자 LG를 나와 다시 친정 팀의 수석코치로 복귀했다. 이후 2017년 12월에 팀 최초의 선수 출신 단장으로 영전됐다.~~(김기태를 위해)~~ 싱커볼 마스터이자, 1990년대 중반 최고의 [[콩라인]]. 93, 94, 96년에 3번이나 골든글러브 2위 득표자가 되었다. [[해태 타이거즈]] 올드 팬에게 [[선동열]]을 제외하고 [[이강철]]과 비교해서 누가 1990년대의 에이스냐 물으면,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정도의 행복한 고민일 것이다. 1993~1996은 조계현이지만 1989~1998은 [[이강철]]이 아닐런지.. == 고교 시절 == ||[[파일:YvRmuza.jpg]]||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 시절. 사진 맨 오른쪽이 조계현.|| 야구 명문인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 출신이다. 고교시절인 1981년 1학년 때 이미 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알렸으며, 팀을 대통령기에서 우승시켰다. 1982년 [[천안 북일고등학교 야구부|북일고]]와 맞붙은 [[청룡기]]에서는 당시 또다른 초 에이스급 선수였던 [[안성수]]와 결승전에서 1:1로 12회 완투+ 다음날 다시 연장전을 계속하는 강행군을 하는 무지막지한 혹사를 당하면서도 결국 팀을 우승시켰다. [[청룡기]] 준결승도 치열했다 .당시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광주일고]] [[문희수]]는 2학년이었는데도 둘은 치열한 투수전을 벌였다. 둘 다 강속구 투수들이었고, 타자들은 그들 앞에서 추풍낙엽이었다.이 게임도 연장전 승부가 아니었을지.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명 승부였다. 1981년 [[박노준]], [[김건우]]의 선린상고, 1985년 [[박동희(야구선수)|박동희]]의 부산고, 1991년 [[조성민]]의 신일고와 함께 군산상고 조계현은 고교야구에서도 가장 화려한 별이었다. 그러나 이런 무지막지한 혹사 때문에 [[안성수]]는 완전히 야구 인생이 맛이 가서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가 소리없이 사라졌고, 조계현도 어깨가 맛이 가서 파이어볼러에서 평범한 구속의 투수로 전락했다. 혹사와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당시 한일고교야구 정기 교류전에서 조계현은 3차전 내내 혼자 마운드를 책임지다 시피하여 2승 1패를 거뒀다. 당시 감독이었던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 [[구수갑]] 감독이 라이벌 팀 에이스를 일부러 굴렸다는 얘기가 있었을 정도. 1981년에는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동열]], [[김건우]][* 이때 선린상고 동기였던 [[박노준]]은 차출되지 않았는데 이유는 1963년생인 [[선동열]], [[김건우]]와 달리 [[박노준]]은 1962년 생으로 1살이 많아서 나이제한에 걸렸기 때문.]등과 차출되어 1981년 제1회 [[WBSC U-18 야구 월드컵|IBAF 청소년야구대회]]의 초대 우승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혹사로 인해 [[연세대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타자로 전향도 고려했다고. 그러나 [[연세대학교|연대]] 재학 후반부에 조계현은 팔색조 변화구라고 불리는 다양한 구질을 연마하여 변화구+컨트롤 위주의 기교파 투수가 되었고, 이것 덕분에 그는 전성기 못지않은 투수 시절을 보내게 된다. 조계현 하면 승부사처럼 조금은 경직되고 무서운 인상으로 기억하는 팬들이 많은데, 대학 시절 그는 귀여운 곰돌이처럼 푸근한 인상의 매력남이기도 했다. 연세대 에이스는 박철순, 최동원, 윤학길, 김정수, 조계현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윤학길만 순둥이다. 김정수가 가을 까치요 이순철 김성래 조계현이 큰경기 명승부를 펼친 이유는 광적인 응원을 펼치는 정기연고전의 살떨리는 큰승부를 체감한 덕분이리라. 조계현은 초등시절 학교의 요청으로 1년을 꿇었다.프로 진출도 올림픽 때문에 1년을 유예했고. 고졸 선수보다 6년 늦게 프로에 진출한 것은 팬으로서 아쉬운 점이다. == 선수 시절 == || [[파일:attachment/nonghyupjogye.jpg|width=300]] || || 1988년 농협 입단 사진 || [[19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농협 야구단|실업야구 농협 야구단]]에 1년간 몸을 담고 나서, 이듬해인 1989년에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당시 프로선수는 대륙간컵 등 국제경기에 참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아마추어 선수 신분이어야 했다. 당시 이로 인해 발이 묶였던 선수는 [[송진우(야구선수)|송진우]], [[강기웅]], [[노찬엽]] 등이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덕분에 1989년은 국가대표급 신인들이 다수 쏟아져나온 해로 기록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 신인왕은 아마 시절 그들에 비해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 한 [[박정현(투수)|박정현]]이 차지했다. ||[[파일:/img/img_link7/147/146369_2.jpg]]|| ||[[파일:external/appdata.hungryapp.co.kr/SuAxd47yS7P65ZCdJqQiUYMPo33vCibc.jpg|width=268]]|| 기아 투수진의 삼대장이었던 영광의 [[해태 타이거즈]] 시절. [[선동열]], [[이강철]]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 마운드의 3인방 중 한 축이었으며, 통산 320경기에 등판해, '''126승 92패 17세이브에 [[평균자책점]] 3.17'''을 기록했다. 전성기에는 유난히 [[LG 트윈스]]에 강해서, 1993년 ~ 1995년에[* 결정적으로 이 기간은 [[LG 트윈스]]의 '''전성기'''였다.] LG를 상대로 12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1993년 LG [[김태원(야구선수)|김태원]][* 1993년에 조계현과 [[김태원(야구선수)|김태원]]의 맞대결은 세 차례 있었는데 각각 0-0 무승부(더블헤더 1차전), 조계현의 1-0과 2-1의 두 차례 1점차 승리였다. 당시 [[김태원(야구선수)|김태원]]은 141.1이닝 방어율 2.42라는 엄청난 호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조계현과의 맞대결에서 전혀 승리를 챙기지 못하는 등 불운이 겹쳐 시즌 8승에 그치고 말았다. 결정적 요인은 조계현과의 맞대결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과의 맞대결은 1980년대 [[선동열]] 대 [[최동원]] 못지 않은 명승부였고, 엘지 해태의 3연전 모두 잠실야구장이 매진되기도 했다. 조계현의 LG전 연승은 1995년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의 1-0 완봉승으로 간신히 마감됐다. 조계현은 투수왕국 해태에서 최고 투수는 못 됐을지 모르지만 열혈 팬들도 거느리고 있다. 그는 팬들에게 투혼의 승부사처럼 비췄다. 대단한 구속도 아닌데도 강심장의 자신있는 투구 모습은 정말 짜릿한 희열을 선물했다. 특히 삼성, LG 등 라이벌 팀과의 대전엔 더 짜릿했다. 해태는 군산상고 주축에 광주일고가 보조하는 식으로 출범했고 해태의 전성기 마지막엔 군산상고 출신 조계현이 있었다.그가 떠난 후 해태의 우승도 끊기고, 결국 부도가 난 건 묘한 느낌을 준다. 그후로 해태나 기아에서 군산, 전주 출신은 줄어드는데 쌍방울의 출범도 이유가 됐겠다. 해태에서 빛나는 선수들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조계현은 성적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선수로 기억된다. 그가 던질때는 야구 승부 정신의 처절함과 치열함이 있었기에 그만의 팬덤과 아우라를 남길 수 있었다. 당시 명 투수들이 그렇지만 문희수처럼 대학을 안 가고 프로에 진출했다면 더 막강한 해태와 좋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지. 1992년까지는 셋업+마무리로 입단동기 [[이강철]]에 비해 큰 활약은 하지 못했지만 1993년 그가 만개했다. [[선동열]]이 마무리로 내려가면서 [[선발 투수]]로 보직을 바꾸는데, 17승6패 방어율 2.15로 다승왕과 [[평균자책점]] 4위를 차지한다. 게다가 한국시리즈 2승으로 해태의 V7를 견인했다. 조계현은 고교 1학년시절 강속구 투수로 등장했다. 그후 어깨에 무리가 있었는지 속구가 무뎌졌지만, 프로에 나타날 때 그는 강속구도 자주 구사했다. 한데 1992년 200이닝에 가까운 투구를 한후 무지 힘들었다고 한다. 이대로는 야구를 오래 못할 것같은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 그후 본격적으로 변화구와 제구력 투수로 변신한다. 그리고 큰 성과를 얻었다. 그는 겨울전지훈련에 자주 동행치 않았다. 주로 따스한 남쪽 완도의 섬에서 보내곤했다. 보길도였을까? 아마도 체력적 부담도 있었겠고 자율훈련에 자신도 있었겠지만 구질개발이 중요하다고 보고 개인훈련을 택했을지도. 1994년은 그의 전성기였다. 그 해 해태는 LG의 맞대결에서 7승 11패를 당했지만 그 중 '''5승'''이 조계현이였다.~~본격 쌍둥이 킬러~~ 81승을 올리며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신바람 야구 LG에게 유일한 저승사자가 있었으니, 그건 조계현이었는데 2년 연속 다승 1위를 하였다. 라이벌 팀 LG의 [[이상훈]]과 함께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 하지만 그해 투수 골든글러브는 최초로 40세이브 고지를 찍은 태평양의 마무리 [[정명원]]이 받았다. 그 해 8월 14일에는 쌍방울을 상대로 1안타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의 노히트노런을 저지한 주인공은 [[김기태(1969)|당시 쌍방울 부동의 4번타자이자, 감독이 된 후에는 드러눕기를 취미삼는 분]].[* 후에 김기태가 LG와 KIA에서 감독을 맡을 때 조계현이 수석코치가 되어 옆에서 그를 보좌한 걸 보면 참 인연이다.] 1995 시즌은 부상으로 인해 2달가량 출장을 못 하며 9승에 그쳤으나[* 이건 당시 방위복무 중이었던 [[이종범]]이 없는 타선의 무기력함도 있었다.]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의 트리플 크라운을 저지하면서 1.71로 방어율왕에 올랐다. 1996 시즌은 1993이나 1994랑 비교되지만 그해 못지않게 압도적인 투구를 보이며 1점대를 늘 유지하다가, 마지막에 2점대를 찍고 그걸 만회하려던 최종전에서 부친상을 당하고 만다. 결국 ERA 2.07에 16승을 찍고 끝난다. ||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40109184459299.jpg]] || || (출처 : 포토로) || 순탄치 못했던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6년의 활약을 마지막으로 [[이대진]], [[김상진(1977)|김상진]] 등 신예 에이스들이 나타나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김응용]] 감독의 눈밖에 나서[* [[하와이]] 전지훈련 중 '''[[이순철]]''', [[송유석]], [[김정수(1962)|김정수]], [[이건열]], [[정회열]] 등과 같이 [[해태 타이거즈 항명사건|항명사건]]을 터뜨린 게 원인이었다. 결국 이 선수들은 1996~1997시즌 사이에 대거 정리된다. 단 김정수만큼은 예외, 어느정도 사건 수습을 했기 때문에 비교적 오래 살아남았는데 이 덕인지 2000년 [[김응용]] 감독의 추천을 통해 SK로 이적했다.] 1997 시즌이 끝나고 [[삼성 라이온즈]]로 '''4억원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이 시기삼성은 우승의 한을 풀기 위해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타 팀에서 여러 선수들을 데려오는 등 [[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례들을 살펴보면 삼성의 막대한 자금력에 감탄할 정도인데, 먼저 김영진과 양용모(...)가 주전을 하던 포수진을 보강하기 위해서 1998년에는 해태에서 방출된 정회열을 자유계약으로, OB로 입단해야 했던 신인포수 김지훈을 지명권 양도로 데려왔고, 1999년에는 우완투수 이상훈과 4억원을 주고 두산에서 진갑용을 사온다. 그리고 1999시즌이 끝나자마자 LG에서 주전포수인 [[김동수]]를 3년 8억의 조건 + FA 보상금 + 김상엽을 주고서 사왔다. 또한 투수진 보강을 위해 1997 시즌이 끝나고 해태에서 4억원을 주고 조계현을 영입했으며, 1999년 시즌을 앞두고 OB의 에이스 투수 [[김상진(1970)|김상진]]을 6억 5,000만원을 내주고 데려왔다. 그리고 동시기에 해태의 젊은 마무리투수 [[임창용]]을 무려 간판타자 '''[[양준혁]]'''에 곽채진, 황두성을 얹고 거기에 현금 '''30억'''까지 줘가면서 데려왔다. 그리고 쌍방울의 주축 선수들이었던 불펜투수 [[김현욱(야구)|김현욱]]과 좌타자 [[김기태(1969)|김기태]]를 무려 '''20억'''을 주고 데려왔다. 여기서 끝이 아닌데, 사이드암/언더핸드 투수를 보강하기 위해서 1999년 말 FA 제도가 도입되자마자 해태에서 이강철을 3년 8억 + FA 보상금 + 박충식을 주고서 영입했다. 그리고 당시 최고대우로 9회 우승신화를 일군 '''해태 타이거즈 감독 김응용과 코치진들'''까지 모셔오는 투자를 단행했다. 1997~2000년 4시즌 동안에 삼성이 선수영입에 쓴 돈은 자그마치 '''100억''' 이상이다.~~하지만 정작 바라고 바라던 우승은 2002년 이후에 했다~~ 그리고 이 당시 삼성과 현대가 서로간의 전력 상승을 위해 야구판에 돈X랄을 한 탓에 강한 팀들과 약한 팀들의 전력 양극화가 심해졌고 결론적으로 '''리그 흥행 저하'''의 큰 이유가 되었다.] 여기서 1998 시즌과 1999 시즌을 보냈지만 1998 시즌은 2년전의 그 선수는 어디 갔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범했고, 1999 시즌은 말 그대로 몇경기 못 올라오면서 퇴물이나 다름없던 모습을 보여 1999년 시즌을 마치고 삼성에서 방출되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해태 시절 투수코치로 인연이 있었던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두산 베어스]]로 이적했다.~~지금은 킬인식이라 부르지만 사람보는 눈 하나는 타고났다~~ ||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414165949560B2.jpg]] || || (출처 : 포토로) || 현역 마지막을 보낸 [[두산 베어스]] 현역 선수시절. [[두산 베어스]]에서는 예전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팀의 최고참으로 활동하며 [[2000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선발 투수로 나와 승리를 거두며 만 36세 6개월로 역대 한국시리즈 최고령 승리투수 신기록을 세우는 등 2001년까지 현역 선수로 뛰며 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하기도 했다.[* 당시 김인식 감독에게 재활신 별명을 붙여주게 한 사례 중 하나.] [[파일:JQAOktA.gif]] 이름 가운뎃글자가 [[닭]]을 떠올리게 하는 '계'인데다 '변화구의 마술사', '팔색조', '싸움닭' 등의 별명을 얻은 탓에 팬들 사이에서는 ~~투수코치로 있을 때 투수진이 망가지면~~ 조닭이라고 부르며 대차게 깐다.[* 투구 동작시 다리를 반대쪽 다리 위로 꼬아서 내려오는 게 닭싸움하는 듯한 모습이라 싸움닭이라 하기도 함.] LG에 무척 강해서 [[엘나쌩 클럽]]의 대표 멤버였다. 이렇게 LG에 강했던 조계현이 훗날 [[김기태(1969)|김기태]] 감독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인해 LG 감독 대행이 된 게 아이러니.(...) == 코치 생활 == === [[KIA 타이거즈]] 1기 시절과 [[삼성 라이온즈]] 시절 === ||||<#f01e23>{{{#ffffff KIA 타이거즈 No.77}}} || ||||<#09081c>{{{#ffffff 조계현(趙啓顯)}}} || ||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50120160406001.jpg]] || || (출처 : 포토로) || 6년만에 친정팀 코치로 다시 시작된 [[KIA 타이거즈]] 코치 시절. ||||<#074CA1> {{{#ffffff 삼성 라이온즈 No.77}}} || ||||<#c0c0c0> {{{#000000 조계현(趙啓顯)}}} || ||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70322131027010.jpg]] || || (출처 : 포토로) ||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2001년 시즌을 마치고 두산에서 방출되어 은퇴한 후 2002년에는 [[한국방송공사|KBS]]의 해설위원으로 있었고 2003년 [[KIA 타이거즈]]의 투수코치로 영입되어 6년 만에 친정 팀으로 돌아와 2005년까지 활동했으며,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로 활동했다. 이 당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는데, KIA 투수코치 시절에는 [[김진우(1983)|김진우]]에게 너클볼을 장착시키려다 제대로 망한 전적이 있고 삼성에서는 [[윤성환]]을 조련시킨 것을 제외하면 잉여 투수들을 올리고 털리느라 팬들로부터 까였다. 특히 2009 시즌에는 [[조현근]]-[[최원제]]-[[김상수(투수)|김상수]] + [[박성훈(야구선수)|박성훈]]-[[차우찬]], 소위 '''[[조원수박차]]'''라 불리는 ~~화약고~~ 미완성된 투수들을 심심할 때마다 올리고 털리는 일을 반복하여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후 위의 잉여 라인(...)에서 [[조현근]]은 2009 시즌 후 [[경찰 야구단]]에 입대했으나 군 복무 중 2군 리그에서도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제대 후 토미 존 수술까지 받고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채 2016 시즌 후 방출당한 후 은퇴했고, [[최원제]]는 군 제대 후 결국 타자로 전향했다. [[김상수(투수)|투상수]]와 [[박성훈(야구선수)|박성훈]]은 시즌 후 [[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됐다. 그나마 [[차우찬]]이 이듬해인 2010년 승률왕에 오르며 포텐이 터지긴 했는데, 이쪽도 이후 6점대 [[평균자책점]]을 찍는 등 2년 간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이다가 2013년부터 삼성의 주축 투수로 활동하며 2015년에는 탈삼진왕에 올랐고 시즌 후 [[2015 WBSC 프리미어 12|프리미어 12]] 국가대표팀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 2016 시즌 후 FA 자격을 얻어 무려 '''4년 95억'''~~이라고 쓰고 110억이라고 읽는다~~이라는 대박을 터뜨리며 LG로 이적했다.~~막내가 가장 출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투수코치로 있을 때 성장한 [[윤성환]]은 조계현과 마찬가지로 빠른 구속보다 뛰어난 제구력으로 타자와 승부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윤성환]]은 다양한 변화구보다는 속구-커브의 투 피치로 타자와 승부할 때가 많다는 게 차이점. 결국 팬들의 열화 끝에, 2009 시즌 막판에는 2군 투수코치로 내려갔다. 이후 [[김용국(야구)|김용국]]과 함께 2009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했고, 삼성 팬들은 [[만세]]를 불렀다. 그의 후임으로 [[오치아이 에이지]]가 온 후 삼성의 불펜진이 철벽 포스를 내뿜기 시작하자, 조계현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바닥으로 떨어졌다. 김용국은 나중에 [[류중일]] 감독이 요청하여 복귀하긴 했지만.... === [[두산 베어스]] 시절 === ||||<#131230> {{{#ffffff 두산 베어스 No.75}}} || ||||<#ed1c24> {{{#ffffff 조계현(趙啓顯)}}} || ||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1110032115372874.jpg]] || || (출처 : 포토로) || 9년 만에 코치로 돌아왔으나 초단기 코치 생활에 흑역사를 안긴 두산 베어스 시절 ~~코치님 여기서 시구하시면 안됩니다!!!~~ 2010 시즌부터 본인이 현역 말년을 보냈던 [[두산 베어스]]의 투수코치로 부임하며 2001년 이후 9년 만에 두산으로 돌아왔는데, 선발-불펜 할 것 없이 두산의 투수진을 초토화시켜 놓는 위업을 달성했다. 용병들과 [[김선우(야구선수)|김선우]]를 제외하고 선발진이 모조리 개박살났으며, 패전조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롯데의 [[양상문]], 한화의 [[이상군]], 기아의 [[이강철]]과 함께 KBO 최악의 ~~[[사대천왕]]~~막장 투수코치로 꼽혔으며, 두산에서도 2군으로 밀려난 후에야 겨우 두산 투수진이 기사회생했다. 하지만 2011년 5월 이후부터 다시 1군 투수코치로 올라왔다. 헌데 그전에 올라왔던 사람이 [[윤석환]]이었기 때문인지 이전보다는 평판이 조금 나아졌다. 예로 [[노경은]]-[[김강률]] 등의 투수들이 구위가 개선되며 호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에 일부 두산 팬들이 호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382&article_id=0000003261|'''노경은'''의 구속이 150km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이버 용병 투수~~ [[페르난도 니에베]] 역시 초반과 달리 불펜에서 각성해서 맹활약하였다. 페르난도의 초반 부진 이유는 성실하고 싹싹한 [[더스틴 니퍼트]]와 달리 투수코치들의 투구 조언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조계현이 그 자리에서 변화구를 몇 개 던져 주니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마운드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꼽는다면 일단 투수들을 다독여 주고, 격려해 준다는 것.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기존의 [[윤석환]]이나, [[김경문|달감독]]같은 경우 도망가지 말고 맞더라도 '''"걍 네 공 믿고 가운데 찔러넣어"'''를 주문하며 타자와 피하는 투구를 하는 투수들을 갈군다면, 조계현은 "괜찮어, 슬금슬금 던져, 변화구 가르쳐 준것도 쓰고..." 하면서 조용히 다독이는 편이라 한다. 어쩌면 직구앓이, 파워직구 위주의 두산 투수들에게 변화구를 가르치면서 슬금슬금 피하면서 승부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 두산 투수진에게 활력소가 되었던 듯. [[2009년]]까지 직구위주의 공격 투구를 했던 [[김선우(야구선수)|김선우]]가 2010 시즌 이후로 여러 구종을 장착하면서 2011년에 16승을 달성한 것도 [[조계현]]의 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대다수의 [[두산 베어스]] 팬들은 3~5선발 이후를 말아먹은 장본인으로 조계현을 꼽고 있다. 혹사로 기껏 발굴한 투수들이 나가떨어지는 것은 계속되고 있으며, 변화구를 잘못 장착시켜 두산 투수들의 구속이 일괄적으로 5km씩 감속했다는 비판도 있다. 결과적으로 두산이 2011 시즌을 말아먹는 데 한몫했다는 것이 대다수의 평.~~물론 가장 큰 지분은 [[김경문|이]] [[임태훈(야구선수)|분]]들한테 있지만~~ === [[LG 트윈스]] 시절 === ||||<#000000> {{{#ffffff LG 트윈스 No.71}}} || ||||<#c30452> {{{#ffffff 조계현(趙啓顯)}}} || ||[[파일:external/sports.donga.com/45662401.2.jpg]]|| LG 코치 시절. 어수선했던 2011 시즌이 끝난 후 [[두산 베어스]]의 코치직에서 사임하고 ~~DTD~~ 올림픽대표팀에서 코치로 함께한[* 사실 [[김기태(1969)|김기태]]와는 삼성에서 1999 시즌에 한솥밥을 먹기도 했었다.] [[김기태(1969)|김기태]] 감독의 부름을 받아 --자기가 노히트노런을 저지한 적이 있었던게 미안했는지-- [[LG 트윈스]]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 여태 맡았던 투수코치가 아닌 만큼 과연 수석코치로 어떤 활약을 할 지 ~~우려~~기대를 받았다. 그런데 정작 시즌이 개막한 이후 별다른 언론 노출도 없었으며, 투수 기용 및 관리에 있어서도 주로 [[차명석]] 1군 투수코치가 부각되는 등 투수 쪽에 개입하기보다 ~~[[김기태(1969)|성질 부리는 감독]] 달래기~~수석코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듯하여 LG 팬들에게 까이지 않았다. ~~아예 잊혀진 수준~~ --[[김태한]]이 그러길 바란다-- 2012년 9월 12일 [[SK 와이번스|SK]]전에서는 5살 연하인 [[김기태(1969)|김기태]] 감독이 경기를 포기하는 것[* 9회 2아웃 2루 상황에서 박용택 대타로 '''신인 투수''' [[신동훈]]을 기용한 것. 그것도 이전에 투수로 등판한 적이 없기 때문에 데뷔전을 대타로 치룬 것이었다.]을 말리다가 맞을 뻔(..)한 사건이 있었다. 다음날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나타난 걸 보면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본인 말에 의하면 말리는 걸 [[김기태(1969)|김기태]] 감독이 뿌리치는 과정에서 저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20914093718620.jpg]] 2013년 LG의 성적이 좋아지면서, [[김기태(1969)|김기태]] 감독을 잘 보좌하고 있는 것같다는 평가가 나왔다. 감독이 야수~~[[지명타자]]~~ 출신인 만큼 투수 출신으로서 이것저것 조언해준 듯. 물론 투수진의 안정화는 [[차명석]] 투수코치의 공이 크지만... 2014년 4월 23일, [[김기태(1969)|김기태]] 감독이 갑작스럽게 사퇴했지만, 구단이 사퇴를 수리하지 않은 상태이고 여전히 엔트리에는 [[김기태(1969)|김기태]] 감독이 올라와 있어서 사실상 감독 대행임에도 공식 직함은 여전히 수석코치인 어정쩡한 상태에서 팀을 이끌었다. LG [[프런트]]에서는 조계현에게 감독 제의를 했으나, [[김기태(1969)|김기태]] 감독과의 의리를 지켜 사양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http://sports.media.daum.net/sports/baseball/newsview?newsId=20140512063503756|#]] 조계현이 사실상 감독 대행역을 하면서도 처음부터 자신을 "수석코치"로 못박아 둔 것을 보면, 일부 조계현까들이 주장하는 대로 겸손을 가장한 [[언플]]은 아닌 듯하다.[* 수석코치는 대체로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감독이 자신을 보좌하기 위해 데려오는 경우고 두번째는 감독을 중간에 잘랐을 때, 보험을 위해 프런트에서 선임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조계현, 그리고 2011년 [[선동열]]이 KIA에 부임할 때 데려온 [[이순철]]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계현이 [[김기태(1969)|김기태]]가 사라진 이후 감독대행을 계속 맡기도 좀 껄끄러웠을 것이다. ~~올해 LG를 맡아 감독이 되는건 자신의 커리어에 해가 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았기도 하고..~~ 후자의 범주는 2009년 당시 [[조범현]] KIA 감독 아래서 수석코치를 맡았던 [[김종모]], 그리고 2006년 [[이순철]]이 LG 감독을 사임한 후, 감독대행을 맡았던 [[양승호]]가 있다. ([[김기태(1969)|김기태]] 자신도 [[박종훈(1959)|박종훈]] 밑에서 프런트 보험용 수석코치를 했다.) 기아가 해당년에 우승한 후, [[조범현]]의 발언권이 높아지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자신과 인연이 전혀 없고 껄끄러운 관계였던 [[김종모]]를 자른 것이었다.] 어쨌든, 기대한 성적반등은 없었지만,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백창수]]를 1군에 꾸준히 기용한 것만큼은 호평을 받고 있다. 2014년 5월 11일, [[양상문]] 감독이 선임되고, 5월 12일 [[LG 트윈스/2군|LG 트윈스 2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된다.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20140917_1410933968.jpg_99_20140917150820.jpg|type=w540]] 시즌 막판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차출되었다. === 다시 [[KIA 타이거즈|KIA]] 코치로 === ||||<:><#af1e2d> {{{#ffffff KIA 타이거즈 No.76}}} || ||||<:><#1e376d> {{{#ffffff 조계현(趙啓顯)}}} ||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201503281415662227_1_99_20150328141609.jpg|type=w540]]|| [[김기태(1969)|김기태]]가 2015년부터 [[KIA 타이거즈]]의 감독을 맡게 됨에 따라, [[김기태(1969)|김기태]]를 따라 친정 팀 [[KIA 타이거즈]]로 팀을 옮겼다. --10년 만에 친정 앞으로-- KIA에서도 보직은 LG 시절과 똑같이 수석코치다. 당초 [[kt wiz]]에서 '''2군 감독'''으로 영입을 타진했지만, [[김기태(1969)|김기태]]가 KIA의 감독을 맡게 되면서 고민 끝에 [[KIA 타이거즈]]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조계현이 KIA로 옮기자, [[kt wiz]]는 [[두산 베어스]]에서 2군 감독을 맡고 있었던 [[황병일]]을 2군 감독으로 영입하였다. [[김기태(1969)|김기태]] 감독과의 호흡은 여전히 잘 맞는 편. 무지 재미있고 유쾌한 성격이라 선수들이 많이 존경하고 좋아한다고 한다. ~~[[나지완]]이 보는 앞에서 나지완의 모습을 대놓고 따라한 바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109&aid=0003033046|있다.]]~~ 2차 드래프트 1라운드로 데려온 [[배힘찬]]이 드럽게 못하고 있는데, [[배힘찬]]을 데려온 [[김기태(1969)|김기태]]만 욕 먹었지만 사실 [[배힘찬]]을 뽑자고 얘기한 사람은 조계현 수석코치라고 한다.--선수 보는 눈이 이렇게 없다-- == 프런트 시절 == === [[KIA 타이거즈]] 단장 === 전임이던 허영택 단장이 기아 타이거즈 역사상 최초의 전임 대표이사로 가게 되면서 단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는데, 그전부터 선수출신 단장을 선임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고, 결국 [[2017년]] [[12월 6일]], 단장으로 승진하였다. ~~자고 일어나니 [[김기태(1969)|위치가]] 바뀌었다~~ ~~어이 [[김기태(1969)|김 감독]]~~ --[[송구홍]]과 반대의 테크를 타게 되었다--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서는 '''닭장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타이거즈 역대 최초의 선수출신 단장인데, 염경엽과 송구홍의 명암 때문에 우려하는 바도 있지만, 대부분 2017의 기운을 받아 기대하는 바가 큰 편이다. 성격이 부드러운 편이라 팬들 대부분은 나이 때문에 서열정리 차원의 승진과 동시에, 김기태 감독의 사람을 프런트에 앉혀서 확실히 밀어주기 위함으로 인지하는 듯.--후임 수코인 정회열이 김기태보다 선배인건 함정-- 2017년 12월 28일 드디어 기아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양현종과 계약 체결에 성공하면서 단장으로써 1호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8년 1월 18일에는 정성훈도 영입했다. 이후 김주찬도 잔류시키며 FA문제를 깔끔히 해결하였다. 이후 2018 시즌에 김기태 감독이 열심히 삽질을 하면서, 수석코치로서 역할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단장으로서 충분히 감독을 제어할 수 있음에도 방관, 그리고 코칭스태프와 소통이 없음을 팻 딘 교체 문제로 드러났다. ~~바지단장이 따로없다~~ 게다가 10월엔 [[임창용]]마저 방출당하면서 김기태와 세트로 미친듯이 까이는 중. 그야말로 김기태의 철저한 마리오네트에 불과하다는걸 온 몸으로 보여주고 계시다. 그리고 임창용 방출 사유가 [[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109&aid=0003889445|젊은 투수들이 기회를 잡기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는 [[개소리]]를 날리며 더욱 까이고 있다. 이어서 해태시절부터 거의 한솥밥을 먹은 선후배 사이였는데 예우가 이런식이라며 강하게 팬들에게 까이고 있다. 또한 [[정성훈]]에게 플래잉코치를 제안했는데 은퇴를 권하거나 정식 코치를 제안한 상황은 아직 아니다. 먼저 현장에서 정성훈에게 플레잉 코치로 내년 시즌을 보내냐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 들어간 상태라고 하는데.. [[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529&aid=0000028287|기사]] ~~기아팬들에게 죽을려고 작정하고 있다~~ 다만 [[임창용]]의 재계약 불발 통보에 후폭풍이 이어지자 '''"임창용 선수는 특별하니까 묶어서 통보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해 따로 발표했다"'''면서 '''"(2018년 10월 23일) 선수와 따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재계약을 하기 힘들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개인적으로는 (임창용 방출이) 안타깝다"'''면서도 '''"신구조화도 필요하지만, 지금은 미래를 위해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방출 배경을 설명했다. '''"임창용 선수와 만난 자리에서 '올해 FA 신청할 거냐'고 물어보니 선수 본인이 '선수로 더 뛰고 싶다'고 말하더라"'''면서 '''"그런 상황에서 (코치직이나 은퇴식 제의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해명했다. [[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01&aid=0010427206|기사]] == 연도별 성적 == ||<-17><#000000> {{{#ffffff 역대기록}}} || ||<:> {{{#ffff00 연도}}} || {{{#ffff00 소속팀}}} || {{{#ffff00 경기수}}} || {{{#ffff00 이닝}}} || {{{#ffff00 승}}} || {{{#ffff00 패}}} || {{{#ffff00 세}}} || {{{#ffff00 홀}}} || {{{#ffff00 승률}}} || {{{#ffff00 ERA}}} || {{{#ffff00 피안타}}} || {{{#ffff00 피홈런}}} || {{{#ffff00 4사구}}} || {{{#ffff00 탈삼진}}} || {{{#ffff00 실점}}} || {{{#ffff00 자책점}}} || {{{#ffff00 WHIP}}} || || 1989 ||<|9><:>[[해태 타이거즈|해태]] || 31 || 174 || 7 || 9 || 4 || - || 0.438 || 2.84 || 153 || 3 || 73 || 97 || 64 || 55 || 1.27 || || 1990 || 30 || 178⅓ || '''14'''[br](4위) || 13 || 0 || - || 0.519 || 3.28 || 144 || 8 || 81 || '''130'''[br](5위) || 73 || 65 || 1.25 || || 1991 || 21 || 130⅓ || 9 || 9 || 0 || - || 0.500 || 3.25 || 100 || 6 || 52 || 75 || 50 || 47 || 1.12 || || 1992 || 37 || 156 || 10 || 6 || '''12'''[br](4위) || - || 0.625 || '''2.94'''[br](5위) || 123 || 13 || 59 || 98 || 64 || 51 || '''1.14'''[br](4위) || || 1993 || 28 || '''196⅓'''[br](3위) || '''{{{#red 17}}}'''[br](1위) || 6 || 1 || - || '''0.739'''[br](4위) || '''2.15'''[br](4위) || 141 || 8 || 58 || 118 || 54 || 47 || '''0.98'''[br](2위) || || 1994 || 27 || '''210'''[br](2위) || '''{{{#red 18}}}'''[br](1위) || 5 || 0 || - || '''0.783'''[br](2위) || 2.61 || 171 || 12 || 68 || 135 || 69 || 61 || 1.11 || || 1995 || 19 || 126 || 9 || 6 || 0 || - || 0.600 || '''{{{#red 1.71}}}'''[br](1위) || 97 || 2 || 43 || 59 || 28 || 24 || 1.06 || || 1996 || 27 || '''191⅔'''[br](5위) || '''16'''[br](3위) || 7 || 0 || - || '''0.696'''[br](3위) || '''2.07'''[br](2위) || 145 || 12 || 52 || 116 || 51 || 44 || '''0.99'''[br](3위) || || 1997 || 25 || 114 || 8 || 9 || 0 || - || 0.471 || 3.71 || 111 || 11 || 36 || 71 || 64 || 47 || 1.23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경기수}}} || {{{#ffffff 이닝}}} || {{{#ffffff 승}}} || {{{#ffffff 패}}} || {{{#ffffff 세}}} || {{{#ffffff 홀}}} || {{{#ffffff 승률}}} || {{{#ffffff ERA}}} || {{{#ffffff 피안타}}} || {{{#ffffff 피홈런}}} || {{{#ffffff 4사구}}} || {{{#ffffff 탈삼진}}} || {{{#ffffff 실점}}} || {{{#ffffff 자책점}}} || {{{#ffffff WHIP}}} || || 1998 ||<|2><:>[[삼성 라이온즈|삼성]] || 29 || 150⅓ || 8 || 11 || 0 || - || 0.421 || 5.21 || 171 || 19 || 76 || 94 || 99 || 87 || 1.56 || || 1999 || 12 || 20⅓ || 0 || 3 || 0 || - || 0.000 || 11.51 || 36 || 5 || 15 || 16 || 27 || 26 || 2.36 || ||<#131230> {{{#ffffff 연도}}} ||<#131230> {{{#ffffff 소속팀}}} ||<#131230> {{{#ffffff 경기수}}} ||<#131230> {{{#ffffff 이닝}}} ||<#131230> {{{#ffffff 승}}} ||<#131230> {{{#ffffff 패}}} ||<#131230> {{{#ffffff 세}}} ||<#131230> {{{#ffffff 홀}}} ||<#131230> {{{#ffffff 승률}}} ||<#131230> {{{#ffffff ERA}}} ||<#131230> {{{#ffffff 피안타}}} ||<#131230> {{{#ffffff 피홈런}}} ||<#131230> {{{#ffffff 4사구}}} ||<#131230> {{{#ffffff 탈삼진}}} ||<#131230> {{{#ffffff 실점}}} ||<#131230> {{{#ffffff 자책점}}} ||<#131230> {{{#ffffff WHIP}}} || || 2000 ||<|2><:>[[두산 베어스|두산]] || 16 || 89 || 7 || 3 || 0 || 0 || 0.700 || 3.74 || 81 || 7 || 31 || 53 || 40 || 37 || 1.20 || || 2001 || 18 || 87 || 3 || 5 || 0 || 0 || 0.375 || 5.28 || 99 || 7 || 38 || 38 || 53 || 51 || 1.52 || ||||<:> '''[[KBO]] 통산'''[BR](13시즌) || 320 || 1823⅓ || 126 || 92 || 17 || 0 || 0.578 || 3.17 || 1572 || 113 || 684 || 1100 || 736 || 642 || 1.19 || ||||||<#000000> {{{#ffffff 완투, 완봉기록}}} || || 연도 || 완투 || 완봉 || || 1989 || 7완투 || 0완봉 || || 1990 || '''{{{#red 10완투}}}'''[br](1위) || '''5완봉'''[br](2위) || || 1991 || 1완투 || 0완봉 || || 1992 || 3완투 || 1완봉 || || 1993 || '''10완투'''[br](공동 4위) || '''{{{#red 4완봉}}}'''[br](1위) || || 1994 || '''{{{#red 14완투}}}'''[br](1위) || '''{{{#red 5완봉}}}'''[br](1위) || || 1995 || 4완투 || 0완봉 || || 1996 || '''{{{#red 11완투}}}'''[br](1위) || '''3완봉'''[br](공동 2위) || || 1997 || 2완투 || '''1완봉'''[br](공동 4위) || || 1998 || 2완투 || 0완봉 || || 1999 || 0완투 || 0완봉 || || 2000 || 0완투 || 0완봉 || || 2001 || 0완투 || 0완봉 || ||<:> '''[[KBO]] 통산''' || 64완투 || '''19완봉'''[br](4위) || == 여담 == * [[신성호(성우)|모 성우]]랑 심히 많이 닮았다. * 야구인중에서 [[박희수]]는 물론이거나 [[이숭용]]도 반반 섞일 정도로 닮았으며, 심지어는 선수 시절에 생김새가 그럴싸해보여서 그런지 과거 [[날아라 슈퍼보드|모 어린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삼장법사#s-3.1|삼장법사]]까지 닮았다는 소릴 듣게 된다. ~~근데 당시 머리 빡빡밀었던 정황이 없어서 기분 탓으로 그런 별명이 붙었나 보다!!!~~ * 선수시절에도 유머러스하고 쿨한 성격인지, [[최해식]]에 인터뷰에서 하루는 피칭 중에 팜볼을 던지겠다고 하자 [[최해식]]이 팜볼이 아니라 힘이 없어서 느리게 오는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자 웃으면서 어디가서 그런 소리하지 마라면서 넘겼다고한다. 다만 [[박재홍]]이 고향 팀 해태와 계약과정에서 잡음이 생겨 입단을 거부하자 광주팬들에게 미운 털이 박혔는데, 박재홍이 프로 입단 후 조계현이 혼쭐내주겠다고 벼른적이 있다. 박재홍 항목 참조. * 1997년 4월 15일 당시 [[LG 트윈스]]의 신인이었던 [[이병규]]가 당시 LG에게 매우 강했던 조계현을 상대로 무려 3안타 4타점을 기록한 바 있는데 당시 이병규는 인터뷰를 통해 '''"(조계현 선배가)신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시고 좀 열심히 던져주시면 좋겠다"''' 라는 말을 하여 논란이 된 바 있다. 이 말은 상대팀이었던 해태 선수단을 자극하고 말았고, 당시 화가 난 해태 선수들이 조계현에게 이병규를 한 대 맞추겠다고 하자 후배들에게 "쟤는 분명히 야구 잘 할것 같다. 그냥 둬라." 라고 했다고 한다. 훗날 2014년 5월 6일 조계현이 잠시 LG 감독대행을 맡고 있었을 때 이병규는 통산 2000안타를 기록했고 조계현은 이병규의 신인 시절이던 1997년을 회상하며 이병규의 기록을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144&aid=0000244415|축하해 주었다.]] * [[정세균]] 국회의장이 그의 팬이라고 한다. 해태시절부터 조계현의 팬이었다고 하며, [[2017 한국시리즈]] 2차전 시구 당시에 정세균 의장이 입은 옷에도 조계현의 이름과 해태시절 등번호인 17번이 마킹되어 있었다. * [[감스트|모 BJ]]와 목소리가 상당히 비슷하다..[[https://m.youtube.com/watch?v=H3HjChvCmdQ|#]][* 실제로 [[감스트]]와 [[조계현]] 둘 다 [[호남]] 출신이라 [[서남 방언]]이 짙을 수 밖에 없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군산시 출신 인물]] [[분류:1964년 출생]] [[분류:투수]] [[분류:우완 투수]] [[분류:우투우타]] [[분류:해태 타이거즈]] [[분류:해태-KIA 타이거즈 은퇴/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