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조규설.png]] [*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조규설 38 무직, 신(초선) / 영천군 을 선거구 / 본적 경북 영천군 / 일본문화학원 졸업. 실업 종사] 曺奎卨[* 曺'''{{{+1 圭}}}'''卨로 [[http://db.history.go.kr/id/im_109_01491|표기하기도 한다]].] [[1912년]][* [[http://db.history.go.kr/id/im_109_01491|1977년 간행된 역대국회의원총람]]에는 1911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3월 20일]][* [[http://www.kwafu.org/korean/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21&num=10130|실향사민신고서]]] ~ ?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녕 조씨|창녕]](昌寧)[* 희천공파(熙川公派)-사의공계(司議公系) 25세 '''규(圭)''' 희(喜) 재(在) 기(基) 항렬.]. [[독립유공자]] [[조재만]]의 [[http://www.ysmnews.net/default/all_news_body.php?idx=11702&board_data=aWR4JTNEMTE3MDIlMjZzdGFydFBhZ2UlM0QxNDAlMjZsaXN0Tm8lM0QxMTQ3OSUyNnRvdGFsTGlzdCUzRDExNjE5%7C%7C&search_items=cGFydF9pZHglM0QlMjZ2aWV3X2NudCUzRDIwJTI2Z3JvdXBfaWQlM0QlMjZ2aWV3X3BhZ2UlM0QlMjZzZWFyY2hfb3JkZXIlM0Q=%7C%7C|장조카이다]].[* 아버지 조시환의 막내 동생이 독립유공자 조재만이다.] == 생애 == 조규설은 1912년 3월 20일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현고동(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현고마을)[* 인근의 귀호리·금호리와 함께 [[창녕 조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조병화(1908)|조병화]]·[[조재만]], [[조규창]] 전 국회의원, 정치인 [[조병환]]도 이 마을 출신이다.]에서 아버지 조시환(曺時煥, 1890. 7. 16 ~ 1933. 5. 7)과 어머니 [[광주 안씨]](1888. 4. 27 ~ 1959. 7. 2)[* 안종설(安鍾卨)의 딸이다.]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해 분카가쿠인(文化學院)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미주동지회(米洲同志會) 연락원을 지내다가,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국민혁명군]]에 입대해 [[펑위샹]] 휘하에서 문화과원(육군 중위)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그 뒤 전역하고 귀국해 1937년 1월 10일 [[대구광역시|대구부]] 전정(현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전동) 39번지[* 현재 이 지번은 폐지되어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전동 [[https://naver.me/GSUhXx6p|38번지]]의 일부로 편입되었으며, 당시 대구부 전정 39번지는 [[https://naver.me/50pJHqKk|동성로하우스디어반오피스텔]]의 [[지하주차장]] 입구 쯤으로 추측된다.]에 [[합자회사]] 동일상회(東一商會)를 [[http://db.history.go.kr/id/hs_001_1937_04_14_8290|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해 1939년까지 실업에 종사하였다.[[http://db.history.go.kr/id/hs_001_1939_03_14_7100|#]] 그 뒤 1940년대에 들어서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8033|조선춘추사]](朝鮮春秋社)에 입사해 연락원으로 근무했다. [[8.15 광복]] 후 1947년 9월 숙부 조재만의 권유로 재단법인 산동학원을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고향 영천군 화북면(현 화남면) 삼창동에 재단 산하의 산동중학교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7743|개교하였다]]. 1949년에는 [[경상남도]] [[밀양시|밀양군]] 밀양읍에서 고려요업주식회사(高麗窯業株式會社) 사장으로 [[http://db.history.go.kr/id/hs_003_1949_00_21_0020|재임하면서]] 조선요업협회 부회장에 취임하는 등 본업인 실업에 종사하였다. 한편, 1948년 11월 4일에는 대한식량공사의 이사로서 부이사장 겸 총무부장에 [[http://db.history.go.kr/id/dh_009_1948_11_04_0040|임명되었다]]. 그해 12월 3일에는 [[http://db.history.go.kr/id/npfp_1948_11_23_v0002_0190|이사장서리에 올라]] 1949년 2월까지 대한식량공사의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12080032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12-08&officeId=00032&pageNo=2&printNo=675&publishType=00020|이사장서리]] 및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121500209202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12-15&officeId=00020&pageNo=2&printNo=7773&publishType=00020|이사장]][[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122300209202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12-23&officeId=00020&pageNo=2&printNo=7780&publishType=00020|#]]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949년 2월 감찰위원회에 의해 공금부정소비 이력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2020020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2-02&officeId=00020&pageNo=2&printNo=7814&publishType=00020|적발되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2030020920202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2-03&officeId=00020&pageNo=2&printNo=7815&publishType=00020|체포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공판에 회부되어 그해 10월 29일 [[조봉암]] 전 농림부장관과 함께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1029003292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10-29&officeId=00032&pageNo=2&printNo=978&publishType=00020|징역 1년을 구형받았으나]] 최종 무죄판결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111200329202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11-12&officeId=00032&pageNo=2&printNo=992&publishType=00020|선고받았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영천시|영천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정도영]]을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회현동1가]]로 이주해 납북되기 전까지 [[http://db.history.go.kr/id/im_109_01491|거주했다]]. 그러나 임기 1달이 채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했고, 곧 납북되었다. 납북된 이후 그는 [[조선인민군]]으로부터 국회의원들 중 '그리 저명치 않은 인사들'로 분류되었는데, 이 무리에 포함된 사람들은 조규설 외에 [[김장열]]·[[정광호(1897)|정광호]]·[[허영호(정치인)|허영호]]·[[김우식(1888)|김우식]]·[[구중회]]·[[홍순옥(1895)|홍순옥]]·[[조종승]]·[[이종성(1890)|이종성]]·[[이구수]]·[[김경도(1904)|김경도]]·[[장연송]]·김의환(金義煥)·유익수(柳翼秀)·[[김용현(정치인)|김용현]](金用鉉)·[[최병주(정치인)|최병주]](崔丙柱)·정인식(鄭仁植)·신용훈(辛容勳)·[[최석홍]](崔錫洪)·[[조옥현(1903)|조옥현]](趙玉鉉)·오택렬(吳宅烈)·조중현(趙重顯)·송창식(宋昌植) 등이 있었다.[[http://www.kwafu.org/korean/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8&num=10762|1962년 3월 31일 동아일보 - 납북인사 북한생활기 - 죽음의 세월 3회]] 1950년 말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할 당시, 병으로 [[평안북도]] [[강계시|강계군]] 만포읍 별오리(현 [[자강도]] [[만포시]] 별오동)의 어느 농가에 제헌 국회의원 출신 [[김우식(1888)|김우식]]과 함께 구금되었다.[[http://www.kwafu.org/korean/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8&num=10773|1962년 4월 13일 죽음의 세월 14회]][[http://www.kwafu.org/korean/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8&num=10778|죽음의 세월 19회]] 그후 1951년 6월 병에 차도를 보이자 다른 납북인사들이 있는 [[평양시]]로 돌아올 수 있었다.[[http://www.kwafu.org/korean/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8&num=14356|죽음의 세월 27회]] 휴전협정 체결 후 조규설은 정광호 등과 함께 평양 시내의 파괴된 고층건물 정지작업에 동원되었으며 1954년 8월에는 정광호·김우식·최석홍·조옥현·송창식 등과 함께 [[황해도]] [[은률군]] 과수원 분농장에 작업반으로 배치되었다.[[http://www.kwafu.org/korean/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8&num=14366|죽음의 세월 37회]] 이후 정규호(鄭圭好)와 함께 평양신흥섬유노동조합에 배치되어 일했다.[[http://www.kwafu.org/korean/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8&num=14665|죽음의 세월 53회]] [[http://www.kwafu.org/korean/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6&num=136|북한총람]]에 의하면, 그는 1956년 7월 재북 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그해 10월 병으로 요양소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의 [[외아들]]인 조영호(曺暎鎬, 1937. 6. 8 ~ )는 1968년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 스쿨]]에서 유학하였으며, 이후 1973년부터 [[템플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40년간 재직하다가 지난 2012년 5월 퇴직하였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20선거구(영천군 을)) || [[무소속]] || '''11,039표 (36.06%)''' || '''당선''' || ||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제2대 국회의원]][[분류:영천시 출신 인물]][[분류:창녕 조씨]][[분류:1912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무소속 국회의원]][[분류:고려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납북자]][[분류:국민혁명군/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