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rge Álvares (? ~ 1521. 7. 8) [목차] == 개요 == [[포르투갈]]의 탐험가.[* 포르투갈어 표기법에 맞는 올바른 표기는 조르즈 알바르스이다.] '''[[홍콩]]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이다. 1513년 3월에 [[미얀마]] 내륙 페구에서 [[말레이 반도]] 말라카로 항해하는 함대의 선장인 [[후이 드브리투 파탈링]]의 항해에 따라갔으며, 1513년에는 [[중국]] 남부의 [[광둥성]]에 도착해 [[주강]] 삼각주 하구의 린틴 섬에 착륙했다. 1513년 그의 함대가 현재 [[홍콩]] [[구룡반도]] 북부 지역인 [[신계(홍콩)|신계]]지 튄문(屯門, Tuen Mun)에 상륙해 이 지역을 활보하고 다녔다. 당시 이 지역은 광동성 신안현에 속해 있었는데, [[광저우]] 총독은 정체불명의 코쟁이 해적 떼(...)가 상륙해 행패를 부린단 보고를 받고는 바로 관군을 보내 탐험대 일부를 생포해 관아에 억류했다. 그때 [[명나라]]에서 최초로 [[조총]]을 접하고 도입하게 되며 [[불랑기포]] 역시 들어오게 된다. 당시 왜구 대응이 급했던 명은 포르투갈인이 가져온 화약무기들을 곧바로 도입, 실전화해서 대 왜구 토벌전에 잘 써먹었고 척계광은 [[조총]]병을 장창병 및 궁수 호위 하에 운영하는 절강병법을 고안하며 이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된 남병도 잘 써먹는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건 [[명나라]]는 포르투갈이 그간 상대한 [[아프리카]] 국가들이나 [[아라비아 반도]] 부족국가들, [[인도]] 남부의 캘리컷이나 [[말레이 반도]] 말라카 세력 혹은 이웃 [[스페인]]이 상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아메리카 원주민]]들과는 달리 [[콘키스타도르]] 몇 명이 대포 들고 깔짝인다고 무쌍을 찍을 허접한 나라가 아니었고, 오히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등 유럽보다 앞서 있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스페인이야 [[북아메리카]]에서 부족 단위로 흩어져 문명이 비교적 뒤떨어져 있던 [[플로리다]] 세미놀 족, [[뉴멕시코]] 아파치 및 푸에블로 족, [[멕시코]] 북부와 [[텍사스]]에 걸쳐 살던 치치멕 족, [[멕시코]] 중남부의 틀락스칼라 족이나 이들보단 앞선 나라였지만 화약이나 바퀴, 말 등이 없어 한계가 있던 [[아즈텍]], 그리고 아즈텍처럼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국이긴 했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화약무기나 바퀴 따위 없던 [[잉카]] 등 [[남아메리카]] 선주민들을 [[콘키스타도르]] 몇 명이 무쌍 찍듯 단숨에 정복했고 포르투갈 역시 마찬가지로 콘키스타도르 몇 명이 앞선 무기로 대군이 버티던 말라카를 쉽게 정복하고, [[스리랑카]]나 [[인도]] 남단 캘리컷, [[아프리카]] 서해안이나 [[모잠비크]] 등도 아주아주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강력한 '''천자'''의 조정이 [[베이징]]에 버티고 있고, 삼안총이나 화창 등 총의 원조격인 개인화기들이나 화포 등 화약무기도 원래 중국이 원조인지라 화약으로 무장한 대군이 버텨서 국력 차이 때문에 콘키스타도르 몇명이 대포 들고 얼쩡거려 될 일이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협상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방법을 택했고 그 결과 명나라 조정에 '''세금'''을 뇌물 대신 내는 조건으로 명 조정이 마카오 조차를 허가해줬으며, 이 계약관계는 이후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서도 계속된다. 1513년과 1514년 사이에 [[구룡반도]] 북부 툰문에서 [[명나라]] 조정과 무역에 관한 합의를 했고 또한 [[마카오]]에 도달했으며, 이 때 도달한 마카오는 그가 죽은 지 32년 후인 1553년에 무역항을 설치하고 1557년에 정식으로 무역권을 얻는다. 당초 알바레스는 튄문을 요구할려다 막상 탐사 결과 대부분 땅이 못 쓰는 늪지대인 관계로 이를 포기했고 대신 바다 건너 개활지가 꽤 있는 섬을 하나 발견하고는 이를 아마묘에서 이름을 따온 마카오라 불렀는데 현재 마카오의 마카오 반도가 그 곳이다. 당시엔 섬이었으나 [[주강]]의 토사 퇴적 후 현재는 주하이와 접하는 부분이 매립되어 반도화되었다.[* 이 토사 퇴적은 고대부터 주강을 따라 대륙의 모래들이 퇴적된 건데, 현재는 중국 때문에 더 가속화되었다. 그래서 타이파-콜로안 간 간척지인 코타이 지구를 개발한 후 항만시설을 수심이 깊은 타이파 섬으로 옮긴다. 이웃 [[홍콩]]도 토사 퇴적 문제로 빅토리아항에 대형 선박 입항이 불가능해 1970년대 항만을 [[구룡반도]] 북부 콰이충으로 옮겼다.] 어찌 됐든 알바레스 함대가 튄문 영유를 포기하고 마카오로 간 뒤 홍콩은 한동안 계속 [[객가인]] 어부들이나 [[푸젠 성]] 출신 해적들이나 오가는 곳이 되다가 1841년 [[아편전쟁]]으로 영국이 [[청나라]]를 크게 이기자 영국 왕령식민지로 할양되어 역사에 제대로 전면등장한다. 이로 인해 그는 [[마카오]]에 도달한 최초의 [[포르투갈인]]으로 알려지게 되며, 1517년에 포르투갈 이주민이 중국인들과 전투를 했다고 알려졌고 알바레스가 이 전투에 참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마카오]]를 처음 발견하고 [[명나라]]와 무역을 시작한 사람답게,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 세나도 광장(Largo Do Senado)[* [[마카오]] 시내의 동명의 광장과는 다른 곳인데 후자가 포르투갈의 원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근처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마카오]] 시내인 마카오 반도에도 그의 동상이 있다. [[분류:1521년 사망]][[분류:포르투갈의 탐험가]][[분류:아시아 탐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