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조문환}}}'''[br]'''曺文煥'''}}}}}}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조문환(독립운동가).jpg|width=100%]]}}} || || '''본관''' ||[[창녕 조씨]][* 24세 '''환(煥)''' 섭(燮) 열(烈) 항렬.] || ||<|2> '''출생''' ||[[1907년]] [[11월 24일]][* 1945년 3월 작성된 《昭和二十年([[쇼와 시대|쇼와]] 20년, 1945) 朝鮮人要視察人略名簿(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 - 特高課(특고과)》에는 11월 10일생으로 등재돼 있다.] || ||[[전라남도]] [[영암군]] 군시면 교리[br](現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인근의 남풍리와 함께 [[창녕 조씨]] 집성촌이다. [[김준연]] 전 법무부장관도 이 마을 출신이다.] 39번지) || || '''사망''' ||[[1949년]] [[10월 21일]] (향년 41세)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58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907년 11월 24일 전라남도 영암군 군시면 교리(現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39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영암면 교동리 30번지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304&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1255&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이주했다]]. 일찍이 [[조선일보사]] [[목포시|목포]]지국 기자로 근무했고, 1926년 목포[[무산계급|무산]]청년회와 목포청년동맹 상무서기로 활동하면서 청년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1926년 12월에는 조선일보사 목포지국 회계국원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26120200239101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12-02&officeId=00023&pageNo=1&printNo=2235&publishType=00010|선임되었다]]. 또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장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의 역량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소년운동에도 힘을 기울여 갔다. 소년운동의 통일을 목적으로 1927년 7월 30일 [[경성부]] [[시천교]]당에서 열린 조선소년연합회(朝鮮少年聯合會) 발기대회 때 [[방정환]] 등과 함께 창립준비위원으로 [[http://db.history.go.kr/id/su_008_1927_07_30_1310|선출되었으며]], 그해 10월 16일 [[천도교]] 기념관에서 열린 조선소년연합회 창립대회에서 마찬가지로 방정환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 및 조사연구부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http://db.history.go.kr/id/su_008_1927_10_16_1210|#]] 또한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목포지회 설립에도 힘을 쏟아 그해 12월 목포지회 정기대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이후 1928년 8월 [[광주광역시|전라남도 광주군]]에서 개최된 전남소년연맹(全南少年聯盟) 간담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그 직후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광주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다가 23일 [[불기소처분]]으로 [[http://db.history.go.kr/id/npda_1928_08_23_v0005_0920|석방되었다]]. 그해 12월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목포야체이카[* 세포조직.] 소속으로 활동하였는데, 이후 [[조선공산당|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결국 1930년 12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http://db.history.go.kr/id/su_009_1930_12_22_1830|선고]][[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304&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1255&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받아]] 2년 7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5년 5월 20일 [[동아일보사]] 영암지국장에 [[http://db.history.go.kr/id/npda_1935_05_23_w0003_0740|임명되었다]]. 1945년 3월 작성된 《昭和二十年([[쇼와 시대|쇼와]] 20년, 1945) 朝鮮人要視察人略名簿(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 - 特高課(특고과)》에 등재돼 있던 것으로 보아, [[8.15 광복]] 이전까지도 일본 제국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후 1949년 10월 21일 별세하였다. == 기타 ==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11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945년 3월 작성된 《昭和二十年([[쇼와 시대|쇼와]] 20년, 1945) 朝鮮人要視察人略名簿(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 - 特高課(특고과)》에 따르면, 키가 5척 4촌이었다고 한다. 일본의 곡척에 따라 1척이 약 30.3cm, 1촌이 3.03cm 정도 되므로, 5척 4촌이면 163.62cm 정도였을 것이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영암군 출신 인물]][[분류:창녕 조씨]][[분류:1907년 출생]][[분류:194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조선일보 관련 인물]][[분류:동아일보 관련 인물]][[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