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759년 출생]][[분류:1820년 사망]][[분류:루아르아틀랑티크 출신 인물]][[분류:혁명 프랑스의 정치인]][[분류:프랑스 내무장관]] |||| [[파일:Edouard+Louis+Dubufe-Portrait+Of+Joseph+Fouche.jpg|width=350]] || || 이름 || 조제프 푸셰 (Joseph Fouché) || || 출생 || 1759년 5월 21일, [[프랑스 왕국]] 르벨르헝 || || 사망 || 1820년 12월 26일, [[오스트리아 제국]] [[트리에스테]][* 현재는 [[이탈리아]] 도시이다.] || || 국적 || 프랑스 || [목차] == 개요 == [[프랑스 대혁명]]에서 [[나폴레옹]] 정부, [[부르봉 왕정복고]]에 이르는 기간 동안 [[권력]]에서 멀어져본 적이 없는 [[처세술]]의 대가. '''현대 [[정치경찰]], [[사찰#s-1|민간인 사찰]](査察) 같은 억압적인 근대국가의 [[공안]]통치의 [[대부]]'''격인 인물이다. == 본문 == === 생애 초기 === 조제프 푸셰는 1759년 프랑스의 낭트 인근의 작은 마을 르 팔레랑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라토리오 [[수도회]]의 [[수도자]]로서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 후 신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1789년,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를 만나며 사상적 변화를 겪는다. === 프랑스 혁명기 ===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푸셰는 [[환속]]하여 반신론자를 자처하며 [[자코뱅]] 클럽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이후 의회에서 [[지롱드파]]에 속하였다. 하지만 온건파인 지롱드 당의 성향과, 그가 대표하는 지역인 낭트 주민들의 의사에 반하여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후 지롱드 내에서 과격파로 꼽히던 그는 [[산악파]]로 이동한다. 이때 리옹에서 혁명세력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를 진압하기 위해 갔던 조르주 쿠통이 리옹 반란을 경미한 처벌로 다스렸다. 이에 분노한 과격파들이 선택한 건 조제프 푸셰였다. 푸셰가 다시 리옹 반란을 진압하러 가서는 2,000명이 넘는 사람을 학살하는 등 과잉 진압을 하였다. 이때부터 로베스피에르와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와 반목하게 된 조제프 푸셰는 로베스피에르의 독재정에 신물이 나있던 국민공회 의원들을 설득하여 로베스피에르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즉시 단두대에서 처형했다. 이 일을 [[테르미도르 반동]]이라고 한다. 이후 푸셰는 1799년, 새로 새워진 총재정부에서 경찰장관이 되었다. 경찰장관 시절 푸셰는 [[정치경찰]]을 거의 처음으로 만들어 정보를 장악하게 된다. === [[나폴레옹]]과 푸셰 === 1799년, 국민공회가 점점 인기를 잃어가고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인기를 얻는 것을 파악한 푸셰는 [[시에예스]]와 함께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동참하게 된다. 이후 푸셰는 나폴레옹 치하에서도 여전히 경찰장관으로서 정보를 독식하며 국내에서 실권을 독차지했다. 1813년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고 반나폴레옹 연합군이 파리를 치게된다. [[조아킴 뮈라]]를 보기 위해 로마에서 나폴리로 가고 있던 푸셰는 위기에 빠진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파리로 돌아온 푸셰는 다시 태도를 바꾸어 반나폴레옹 연합군에 의해 프랑스 왕으로 옹립된 [[루이 18세]]를 환영하며 나폴레옹을 [[엘바]] 섬으로 귀양보내도록 촉구했다. 하지만 이전에 루이 16세의 사형에 동의했던 푸셰를 왕당파들이 좋게 볼리 없었고 결국 푸셰는 [[라파예트]]와 손잡고 나폴레옹의 복귀를 실현시킨다. 이렇게 돌아온 나폴레옹 정부 하에서 푸셰는 다시 경찰장관 자리를 잡게 된다. 나폴레옹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다시 대패를 하고 이 소식을 접한 푸셰는 다시 발 빠르게 [[탈레랑]]과 협심하여 루이 18세와 손을 잡았다. 이 때 푸셰는 조건으로 그에게 내각 장관 자리를 줄 것을 약속 받았다. 결국 나폴레옹의 [[백일천하]]가 막을 내리고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거기서 최후를 맞았다. === 최후 === [[부르봉 왕정복고]]로 들어선 루이 18세 내각에서 일하길 원했던 푸셰는 왕당파들의 강력한 반대로 본래 약속했던 자리를 못 받음은 물론, 모든 신변보호도 거절 당한 채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였다. 일생 대부분을 [[무신론]]자로 살았던 푸셰는 죽기 직전에 [[신부(성직자)|신부]]에게서 [[병자성사]]를 받았다. 이후 경찰장관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수많은 왕가와 귀족들의 비밀이 담긴 편지들과 자료들을 모두 소각하고 1820년 오스트리아의 트리에스테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 여담 == 신학자에서 [[무신론]]자로, 왕정과 나폴레옹 정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권력에서 멀어지지 않았던 그의 능력은 뛰어난 상황 파악력과 정보력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푸셰는 계속해서 경찰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국가의 정보력을 장악했고, 이를 활용해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다. 푸셰는 이러한 [[정치경찰]] 조직을 대대적으로 운용한 첫 사례로 꼽힌다. 이후 '''[[FBI]] 초대 국장 [[존 에드거 후버]] 등 많은 [[흑막]] 정치가들'''이 푸셰를 모델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 그에 관한 어록 == >"나는 오직 한 사람, 참으로 완전무결한 배반자를 알았다. 그 사람은 푸셰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권력]]으로 사람을 다루는 능력을 놓고 보면 푸셰가 나폴레옹보다 한 수 위였다.” >---- >'''[[오노레 드 발자크]]''' >"태어날 때부터의 배신자, 시시한 음모가, 미끈미끈한 파충류, 타산적 변절자, 비열한 경찰 근성…" >----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그가 지조없이 충성의 대상을 늘 바꾸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가 충성한 대상은 오직 하나였다. 그 대상의 이름은 '다수파'였다.” >---- >'''슈테판 츠바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