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후한 말의 환관, rd1=조충(후한), other2=고려의 인물, rd2=조충(고려))] [include(틀:위서)] 曹沖 196년~208년 [목차] [clearfix] == 개요 == [[후한]] 말의 인물이며 [[자(이름)|자]]는 창서(倉舒)로 예주 패국 초현 사람. [[조조]]와 [[환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우(삼국지)|조우]]와 [[조거]]는 그의 동복형제였으며, [[조비]] 등 조조의 다른 많은 아들들은 그의 이복형제였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기 때문에 조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다만 [[삼국지연의]]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 생애 == 그 총명함에 대한 일화가 몇 개 있다. >[[손권]]이 조조에게 코끼리를 선물로 보냈기에, 조조는 이 코끼리의 무게를 재어보고자 했다. 하지만 코끼리는 본래 크고 무거운 동물이었던지라, 저울이 그 크기에 맞지 않을뿐더러 무게를 버티질 못해 곤란해하였다. 조조는 신하들에게 물어서 방법을 구하였으나, 아무도 마땅한 방책을 생각해내지 못하였다. 이때 아직 10살도 안 된 조충이 나서서 방법을 생각해 내었는데,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코끼리를 나룻배에 태워 배가 물에 잠긴 부분에 선을 그어두고, 같은 배에 돌을 하나씩 실어 앞서 표시해둔 부분까지 잠기면, 그 돌들을 다시 꺼내어 무게를 재어 더한다. 그렇게 하면 코끼리의 무게를 알 수 있다]]는 것이 그가 제시한 방책이었다. 이에 좌중이 감탄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는, >조조의 창고를 맡은 관리가 창고 관리를 소홀하게 하여 조조의 말안장에 쥐가 슬어 엉망이 된 것을 알고는 고민 끝에 이를 조충에게 상의했다. 조충은 일단 그 일을 조조에게 보고하지 말라고 한 뒤, 일부러 자기 옷을 칼로 베어 흠집을 낸 다음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조를 만났다. 조조가 조충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었냐고 묻자, 조충은 쥐가 슬어 옷을 버리게 되었는데 쥐가 옷을 슬면 그 사람에게 불행이 온다고 해서 걱정이라고 답했다. 이에 조조는 상냥한 목소리로 아들을 달래며 안심시켰다. 직후에 창고지기가 말안장 상태를 고하니 조조는 웃으며 "곁에 둔 자식의 옷조차 쥐가 슬었는데, 하물며 창고에 둔 말안장이야 말할 것이 있는가."라며 창고지기의 죄를 용서했다고 한다. 유경숙의 이원의 3권에는 한 가지 일화가 더 소개되어 있다. >손권이 조조한테 꿩을 바쳤다. 조조는 그의 생일날에 아들들한테 꿩을 춤추게 하라고 시켰다. 모두 다 꿩을 춤추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조충만이 꿩을 춤추게 하였다. 그는 거울을 꿩의 앞에다 놓았는데, 꿩이 자신의 모습이 비친 거울을 보고는 지칠 때까지 춤추다가 죽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것이 조창서감(操倉舒鑑) 또는 [[산계무경]](山鷄舞鏡)이라고 불리는 것의 어원이다. 그 꿩은 선물로 보내진 꿩이었으니, 아마도 꿩은 깃이 화려한 수컷 꿩이었을 것이다. 그 수꿩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른 수꿩으로 착각해서, 싸움을 건 것이리라. 이처럼 총명하고 인품도 좋았으나 겨우 13세에 병으로 요절하였다. 비통함을 감추지 못한 조조는 다른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창서가 죽은 것은 나에게는 불행이지만 너희들에게는 행운이다."라고 말했다.[* 손성은 적자를 세울 때는 현명함이 아닌 나이를 고려하는 것이니 조조의 발언은 지나치게 경솔했다고 지적했다. [[원소]] 또한 그렇게 해서 멸망했고. 물론 장자계승의 원칙을 조조가 무시하고 싶었을 정도로 조충이 현명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리고 <화타전>에 따르면 [[화타]]를 죽인 조조가 조충이 위독해지자 화타를 죽인 것을 후회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위략에 의하면 황제가 된 조비 역시 [[조앙]]이 일찍 죽은 것은 다 조앙의 운수이자 복이었지만 조충이 살아있었다면 나는 황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 술회했다. 하지만 [[손성]]의 말대로 후계자를 세울 때 그 사람의 능력만 보고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조충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후계자는 조비가 아니라 조식이 되었을 것이다. 적자였던 조식조차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밀려난 상황에서 적자조차 아니었던 조충이 살아 있었더라도 후계자가 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위의 일화들은 그만큼 조충이 뛰어났다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여야지 정말로 조충이 요절만 하지 않았더라면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영릉선현전>에 의하면 조충의 재주는 [[주불의]]와 견줄 만했다고 한다.[* 이건 조충을 높인다기보단 주불의의 영민함을 강조하기 위해 든 비유이다. <영릉선현전>이란 기록 자체가 영릉 일대의 명사들을 추켜세우는 목적이 강하다.] 조조는 그 재주를 높이사 그를 사위로 삼으로 했으나 주불의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의랑 벼슬도 받지 않았다. 조충이 죽은 후 주불의를 고깝게 여긴 조조는 주불의를 죽이려고 했다. 이에 조비가 자신이 써야 하니 주불의를 살려달라고 했지만, 조조는 "불의의 재주는 '''너 따위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자객을 보내 기어코 주불의를 죽였다. 또 병원전에 의하면 [[병원(삼국지)|병원]]의 딸도 일찍 죽어 조충과 병원의 딸을 합장하려고 하였는데, 병원이 예법의 선례를 들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조조는 병원을 승상의 징사(徵事)로 전임시켰다. 그리고 조충을 견씨의 죽은 딸과 합장시켰는데 여기서 말하는 견씨의 딸이 [[문소황후]]와 동일인이 아닌 성씨만 같은 인물일 것으로 보인다. 언급을 보면 조조 생전의 일인데 조조는 220년, 문소황후는 22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시기가 전혀 안 맞는다. 그리고 요절한 조충과 합장을 시켰다는 건 이 견씨의 딸도 요절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조조가 아끼던 아들과 합장시킨 걸 보면 조조와 매우 친분이 있는 집안 딸이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조예]]가 황제가 된 시기인 서기 231년에 '등 애왕(鄧哀王)'에 추증되었다. [[정사 삼국지]]에는 조조 아들들의 전기인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에 전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조충의 전기 제목은 시호를 따서 '등애왕충전'이다. == 미디어 믹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충(삼국지)/기타 창작물)] [각주] [[분류:후한의 인물]][[분류:삼국시대(중국)/황족]][[분류:196년 출생]][[분류:서출]][[분류:208년 사망]][[분류:안후이성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