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한국의 성씨)] [목차] == 鍾 == 종(鍾)씨는 [[대한민국]]의 [[성씨]]이며, [[중국]] [[송나라]]의 환공이 둘째 아들을 종성(鍾城)의 왕에 봉하여 이루어진 성으로 전해진다. 종(鍾)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816명으로 조사되었다. 파는 송문 황제파, [[본관]]은 영암(靈巖)·하음(河陰)·[[강화도|강화]](江華)·통진(通津)·두원(荳原)·정의(旌義)·풍덕(豊德) 등 7본이나, 대종은 영암 종씨(靈岩鍾氏)이고, 하음(河陰)·[[통진읍|통진]](通津)[[강화도|강화]](江華)를 관향으로 하는 종(鍾)씨는 영암 종씨(靈岩鍾氏)의 세거지이다. 영암 종씨(靈岩鍾氏) 종친회가 소장하고 있는 문헌에 의하면, 종(鍾)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서 송(宋)나라 환공(桓公)이 둘째 아들을 종성(鍾城)의 왕(王)으로 봉하고 종(鍾)씨를 하사하면서 비롯된 성으로 전해진다. 그 후에 종동수(鍾銅修), 종지란(鍾芝蘭)이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고 하나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1525년]]([[중종(조선)|중종]] 20) 식년시 역과에 3등 9위로 급제한 종세필(鍾世弼)과 [[1706년]]([[숙종(조선)|숙종]] 32) 정시 무과에 병과 190위로 급제한 종성달(鍾成達)이 나타난다. 종세필의 경우, 당시 거주지는 [[한양]]이었으며, 본래 사용(司勇)을 지낸 무관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전의감정(典醫監正) 종치선(鍾致善)이었다. 또한 종성달의 경우, 당시 거주지는 [[강화]]였으며, 향교의 교생(校生)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학생(學生) 종진원(鍾振遠)이었다. 참고로 두 사람 모두 본관은 영암이었다. [[조선 태조]]가 [[조선]]을 개국한 후에 낭주(郎州)를 영암(靈岩)으로 고쳐 종관수(鍾寬秀)를 영암백(靈岩伯)으로 봉하였다고 하는데, 그 후 세계(世系)는 [[실전]](失傳)되어 정확히 알지 못한다. 1세조 종석(鍾錫)이 [[강화군]](江華郡) [[하점면]](河岾面)에 터를 잡아 현재 15대째 세계(世系)를 이어와, 후손 대부분이 [[강화도]](江華島)에 살고 있다. 중시조 종석(鍾錫)은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었다. 1백여권의 필사(筆寫)로 된 세보(世譜)가 있고, [[1864년]]([[고종(대한제국)|고종]]1년)에 발간된 [[족보]]인 《갑자보(甲子譜)》는 종인서(鍾仁緖)가 소장한 보책(譜冊)이다. [[1930년]] 국세조사 때는 전국에 47가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2000년]] 인구조사 당시에는 영암 506명, 강화 142명, 통진 76명, 두원 53명, 하음 21명, 풍덕 11명, 정의 6명 등 816명이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宗 == 본관은 임진(臨津), 토율, 이파(泥波), 전주 등 4개가 있다. 2000년 인구조사 당시, 임진 59명, 토율 49명, 이파 35명, 전주 1명 등 146명이 나타났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에는 [[황해도]] [[서흥군]]과 [[곡산군]] 등 각각 2가구와 1가구씩으로 본관 불명의 3가구가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서흥군]] 구포면 신당리에 살던 종경철(宗慶喆)이 자신이 3살 때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지금의 위치로 이주해왔다고 했을 뿐 자신의 성씨의 내력에 대해선 전혀 몰랐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국내에서는 희귀성이지만 일본에서는 꽤 유명한 성씨인데 [[대마도]]를 지배하던 [[소 요시토시]] 등 종씨 일가의 성이기 때문. 일본식 발음으로는 소씨이다. 자세한 것은 [[소(성씨)]] 문서 참고. [[분류:성씨/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