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1 朱齡石[br]주령석}}}''' || || '''작호''' ||풍성현후(豐城縣侯) || || '''성''' ||주(朱) || || '''이름''' ||령석(齡石) || || '''자''' ||백아(伯兒) || || '''생몰''' ||379년 ~ 418년 || || '''출신''' ||패군(沛郡) 패현(沛縣) || || '''부친''' ||주작(朱綽) || || '''조부''' ||주등(朱騰)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 말기의 장수로 자는 백아(伯兒). [[주초석]]의 형이다. == 생애 == === 초기 생애 === 주령석은 379년에 태어났으며, 처음에 전중장군(殿中將軍)이 되었고 환수 형제를 따랐으며, 환수의 참군이 되었다. 건무장군 유유가 환수 일당을 평정한 뒤 주령석은 유유의 참군이 되었다. 유유의 군대가 강승(江乘)으로 당도했을 때 주령석은 자신이 환씨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기에 자신을 후방에 배치해달라고 요청했고, 유유는 주령석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후 진군참군, 무강현령, 영삭장군을 역임했다. === 반란 진압 === 무강현에서 요계조가 망명한 이들을 모아 약탈을 일삼았다. 하지만 요계조가 있는 곳은 지세가 험준했고 군현에서는 요계조를 두려워하여 이들의 약탈을 진압하지 못했다. 주령석은 요계조에게 접근하여 거짓으로 요계조와 두텁게 지내고 요계조를 참군으로 삼았다. 요계조는 자신의 세력을 믿고 주령석이 자신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며 주령석의 부름에 응했다. 한편 주령석은 심복들을 몰래 모으고 요계조의 거처를 알아내어 요계조를 연회에 부른 뒤 참수하였다. 주령석은 또한 요계조의 집안 사람들을 붙잡아 난을 평정했다. 이후 주령석은 다시 유유의 참군이 되었다가 서주 주부로 옮겼고, 상서도관랑을 역임했다가 다시 참군이 되었다. 유유가 [[남연]]을 정벌할 때 종군했으나 어떤 일에 연루되어 면직되었고, 남연이 멸망한 뒤에 다시 참군이 되었다. 한편 [[노순]]이 석두(石頭)로 당도하자, 주령석은 노순의 침공을 막아냈다. 노순이 평정된 뒤 영원장군, 영만호군(寧蠻護軍), 서양군(西陽郡) 태수가 되었으며, 유의를 토벌할 때도 종군했다. === 초종 토벌 === 413년, 유유가 주령석을 [[초종]] 토벌의 지휘관으로 임명하며 건위장군, 익주 자사로 삼았다. 주령석은 영삭장군(寧朔將軍) [[장희(동진)|장희]], 하간군(河間郡) 태수 괴은, 하비군(下邳郡) 태수 유종, 용양장군(龍驤將軍) 주림(朱林) 등을 이끌고 강릉에서 출병하였다. 유유는 출병에 앞서 주령석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경선]]은 왕년에 황호(黃虎)로 출병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초종은 우리가 이번에 마땅히 외수(外水)를 따라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마땅히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오히려 내수(內水)를 따라 올 것으로 예상할 것이다. 이러하면 반드시 대군으로 부성(涪城)을 수비하고 내부에 대비할 것이다. 만약 황호로 출병하면 진실로 그들의 계략에 빠질 것이다. 지금 대군이 외수를 통해 성도(成都)로 진군하고 있고 의병이 내수로 출병하니 이것이 적들을 제압할 기책일 것이다. 그러나 초종이 계략을 간파할 것을 감안하여 서신을 밀봉하여 주령석에게 전달했고, 백제성에 이를 때 서신을 보라고 당부했다. 백제성에 도달한 뒤 유유가 주령석에게 보낸 서신을 열어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군은 모두 외수를 따라 성도로 진군하고, 장희와 주림은 중수(中水)에서 광한군으로 진군하되 허약한 사졸들은 10여 척의 함선에 태워 내수를 따라 황호로 향하게 하라. 유유의 서신에 따라 전군이 진군을 시작하자, 초종은 내수의 침공에 대비하여 초도복을 부성에 진수시켰고, 후휘와 초선을 팽모(彭模)에 진수시켰다. 6월에 팽모에 도착한 뒤, 주령석의 장수들은 북쪽이 험준하고 많은 병사들이 진수해있으니 남쪽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주령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록 적군이 북쪽에 있으나 지금 남쪽을 공격한다면 북쪽을 함락시키기엔 부족하지만, 만약 모든 정예를 이끌고 북루를 함락시킨다면 남쪽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7월이 되어 주령석은 유종과 괴은 등을 이끌어 북쪽을 공격했고 다음날에 정오까지 전투를 벌였으며, 촉군의 망루를 불태우고 사면으로 북성을 공격하여 후휘와 초선을 참수했다. 북쪽이 무너지고 남쪽을 공격하면서 남쪽에 진수한 촉군은 저절로 붕괴했다. 이때 동진군은 촉군의 대장 15명을 참수했고 물가에 상륙한 뒤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장희가 광한에 이르러 병으로 죽은 뒤, 주림은 광한에 당도하여 다시 초도복을 격파하고 다른 군대가 배에 올라 우비성을 함락시키고 촉군의 대장 초무(譙撫)를 참수하였다. 초종은 각지에서 군대가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성으로 달아났으나 왕지(王志)가 초종을 참수하여 수급을 보냈다. 초종의 상서령인 마탐(馬躭)이 창고를 봉하고 동진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초도복은 팽모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5천의 정예를 이끌었으나 초종이 이미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도복의 군대 또한 패배하였고 초도복은 달아나려고 했으나 두요(杜瑤)가 초도복을 포박해 압송하였고 군문에서 참수하였다. 환겸(桓謙)의 아우인 환념(桓恬)이 환겸을 따라 초종에게 귀순하여 영촉군(寧蜀郡) 태수가 되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역시 참수되었다. 초종을 토벌한 뒤 주령석은 사마 [[심숙임]](沈叔任)을 파견하여 부성에 진수시켰다. 이때 후산덕(侯産德)이 반란을 일으켜 부성을 공격하자, 심숙임은 후산덕을 격파하고 후산덕을 참수하였다. 주령석은 초종을 토벌한 뒤 초종의 일족을 처형하였으나, 후산덕의 반란에 가담한 이들이 많아서 가담한 이들을 철저히 추궁한 뒤에 처형했다. 주령석은 보국장군으로 진호되고 감양주파서재동탕거남한중진주안고회녕6군제군사(監梁州之巴西梓潼宕渠南漢中秦州之安固懷寧六郡諸軍事)로 진위되었으며, 풍성현후(豐城縣侯)에 봉해지고 식읍 1000호를 받았다. 유유는 초종 토벌을 논의할 때 적당한 지휘관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다가 주령석을 지명했다. 유유의 수하 장수들은 주령석의 경력과 명망이 아직 부족하다고 반발했으나, 유유는 반대 의견을 듣지 않고 주령석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유유는 군대의 절반을 주령석에게 주면서 용맹한 장수와 사졸들을 주령석에게 내렸으며, 주령석이 초종 토벌에 공을 세우자 장수들은 유유의 선임에 대해 납득했고 주령석의 능력에 대해 찬탄하였다. === 유유의 북벌과 죽음 === 415년, 주령석은 태위 자의참군으로 임명되고 관군장군(冠軍將軍)이 더해졌다. 416년, 유유가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 정벌을 단행하면서 좌장군으로 옮기고 궁성을 수비하였다. 이때 [[유목지]]가 주령석을 매우 믿고 의지하여 내외의 사무를 모두 주령석과 함께 의논하였다. 유목지의 부고를 접한 유유가 팽성으로 돌아갈 때 주령석은 상국 우사마가 되었다. 이듬해인 418년, [[왕진악]]과 [[심전자]]의 갈등이 폭발하고 유의진이 수도로 돌아갈 때 주령석은 지절, 도독관중제군사, 우장군, 옹주 자사가 되었다. 유유는 이때 주령석에게 관우를 반드시 지킬 수 없다면 유의진과 함께 돌아와도 좋다고 명하였다. 한편 [[북하]]의 [[혁련발발]]이 군대를 이끌고 동진군를 추격하자, 주령석은 장안의 궁궐을 불태우고 동관으로 달아났다. 당시 용양장군 왕경선(王敬先)이 조공루(曹公壘)에 진수하여 주령석은 왕경선과 합류했으나, 북하군에 의해 수도가 차단되자 동진군는 물이 부족하여 싸우지 못했다. 주령석과 왕경선은 사로잡혀 장안으로 돌아왔고 이때 살해되었다. == 집안 == 주령석은 패군(沛郡) 패현(沛縣) 출신으로, 집안이 대대로 장수를 맡았다. 주령석의 할아버지인 주등은 건위장군, 오국 내사를 역임했다. 주령석의 숙부인 주헌(朱憲)과 주빈(朱斌)은 모두 서중랑장 원진(袁眞)의 휘하였으며, 주헌은 양국 내사를, 주빈은 여남 내사를 지냈다. [[환온]]이 원진을 정벌하러 수양(壽陽)으로 출병할 때 원진은 주헌과 주빈이 환온과 내통했다고 보고 주헌과 주빈을 죽였다. 주령석의 아버지인 주작은 원진으로부터 달아나 환온에게 귀순했다. 수양이 평정된 뒤, 원진이 이미 죽어서 주작은 원진을 부관참시하였다. 환온이 주령석을 죽이려고 했으나, 환온의 아우인 환충이 말려서 주작은 목숨을 보전했다. 주작은 자신을 살려준 환충에게 감사하여 환충을 아버지처럼 섬겼고 환충의 참군사, 태수를 역임했으며, 384년에 환충이 죽자 그를 따라 죽었다. 환충의 아들들은 주령석을 형제처럼 대우했다. == 기타 == 주령석은 젊은 시절에 무예를 좋아했지만 매우 경박했고 언행을 다스리지 못했다. 주령석의 외삼촌인 장씨(蔣氏)는 회남 사람으로 성품이 연약했다. 주령석은 외삼촌을 청사의 한 구석에 눕힌 뒤 종이를 한 토막 잘라 장씨의 베개에 종이를 붙였고 거리를 8~9척 벌린 뒤 칼을 던졌는데, 전부 베개에 붙인 종이에 명중했다. 장씨는 주령석이 칼을 던지는 모습을 두려워했으나 겁을 먹어서 주령석이 칼을 던지는 모습을 계속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장씨는 머리에 큰 혹이 있었는데, 주령석은 장씨가 자는 틈에 장씨의 혹을 뗐고 장씨는 결국 죽었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79년 출생]][[분류:41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