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목차] == 개요 == 周智光 (? ~ 767년) [[당나라]] 중기의 장수로, 본적은 불명인 인물이다. 반란 행적으로 인해 [[신당서]] 반신전에 열전이 수록된 인물이다. == 생애 == 주지광은 미천한 출신에서 일어났고 기마술과 궁술에 뛰어나, 종군하면서 항상 전공을 세워 편장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주지광은 환관 어조은(魚朝恩)과 친하였고, [[대종(당)|대종]]으로부터 상을 받아, 화주(華州) 자사, 동화(同華) 절도사, 동관 방어사, 검교공부상서, 어사대부를 역임하였다. 765년(대종 영태 원년), [[복고회은]]이 반란을 일으키고 토번과 회흘을 끌어들여 당나라를 침공하자, 주지광은 징성(澄城)에서 토번을 물리쳐 부주(鄜州)까지 쫓아냈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주지광은 두면(杜冕)과 사이가 안 좋았다. 당시 두면이 방주(坊州)에 있을 때 두면의 가족들은 부주에 있었는데, 주지광은 부주 자사 장린(張麟)을 독단적으로 살해하고 두면의 집안 사람 81명을 생매장하였으며 방주를 약탈하였다. 766년(대종 영태 2년), 주지광은 이후 대종의 부름에 죄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조정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한편 조정에서는 두면을 양주(梁州)로 피신시켜 주지광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였다. 주지광은 당나라에 불만을 품은 이들과 망명한 이들을 모아 그들의 약탈을 방조하여 인심을 모으기 시작한다. 또한 수도인 장안으로 운송되는 쌀 2만 석을 중간에 가로챘으며, 조정으로 보내지는 공물들을 빼앗기도 하였다. 이후 주지광은 괵주 자사였던 방충(龐充)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또한 합주(陜州) 절도사 황보온(皇甫溫)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감군 장지빈(張誌斌)을 홀대하기도 하였다. 장지빈이 주지광을 꾸짖자, 주지광은 >“복고회은이 어째서 배신했겠는가! 모두가 이 쥐새끼 같은 놈들로 인해 권세를 부렸으니, 죽음을 두려워하여 감히 조정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나는 본래 배반하지 않았지만, 지금 너로 인해 배반하게 되었다.” 라고 말하였고 좌우에 명령하여 장지빈을 살해하였다. 회남 절도사 최원(崔圓)이 특산물을 바치려고 장안으로 갈 때, 주지광은 이를 가로채기도 한다. 조정의 관리들은 주지광의 잔학함을 두려워하여 동주(同州)를 조용히 지나가기도 했으나, 주지광이 부하들을 파견하여 중간에 관원들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많은 관리들이 비명횡사하였다. 대종이 주지광을 좌복야로 제수한다는 조서를 내리자, 주지광은 분노하면서 >“나 주지광은 이미 나라에 큰 공을 세웠는데, 황제께서는 나에게 평장사를 주지 않고 좌복야의 관직을 내리셨는가! 또한 동주와 화주는 나의 재능을 펼치기에는 너무 협소한 땅이니 합주(陜州), 괵주, 상주(商州), 부주, 방주(坊州)를 나에게 내리신다면 그런대로 좋을 것이다. 여기는 장안에서 180리나 떨어져있고, 나는 밤에도 장안성이 함락될까 두려워 감히 잠을 잘 수 없다. 나의 아들들은 능히 200근의 활을 당길 수 있고 만인의 적을 감당할 수 있으며, 재상의 자리에도 충분히 오를 수 있다.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 주지광만이 가능한 일이다!” 라고 말하였고 거듭 대신들의 잘못을 들먹였다. 대종의 조서를 가지고 파견된 관리가 주지광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자, 주지광은 그에게 비단 100필을 내리고 도로 돌려보낸다. 767년(대종 대력 2년), 대종은 [[곽자의]]에게 주지광의 토벌을 명령하였다. 당시 동주와 화주가 조정으로부터 차단되자, 대종은 곽자의의 사위인 조종(趙縱)을 불러 그를 곽자의와의 연락책으로 삼았다. 한편 곽자의가 출병하자 주지광의 반란군 내부에는 민심의 이반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주지광은 산관과 훈봉은 예전과 같이 받았으나, 예주(澧州) 자사로 폄관되었다. 계속된 민심의 이반에, 주지광은 결국 부하에게 살해당하였고, 아들 2명과 함께 조정으로 압송되었다. [[분류:당나라의 장수]][[분류:76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