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주진수}}}'''[br]'''朱鎭洙[* 신안주씨대동보 4권 1672쪽에는 朱鎭'''{{{+1 壽}}}'''로 등재되어 있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주진수.jpg|width=100%]]}}} || || '''자''' ||천로(天老) || || '''호''' ||백운(白雲)·송파(松波) || || '''본관''' ||[[주(성씨)|신안 주씨]][* [[http://uljin.grandculture.net/uljin/toc/GC01800668|#]]. 웅천파-교수공파 12대손 진(鎭) 항렬. 신안 주씨 31세.] || ||<|2> '''출생''' ||[[1875년]] [[3월 11일]][*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24&evntId=0034970598&evntdowngbn=Y&indpnId=000000304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1911년 7월 2일 판결문]]에는 7월 11일생, 1878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안주씨대동보 4권 1672쪽 참조.] || ||[[강원도]] 울진현 근북면 매정동[br](現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매정마을)[* 독립유공자 [[주병웅]]·[[주병책]]·[[주진욱]]도 이 마을 출신이다.][[http://uljin.grandculture.net/Contents?local=uljin&dataType=99&contents_id=GC01800668|#]] || ||<|2> '''사망''' ||[[1936년]] [[9월 16일]] || ||[[만주국]] 빈강성 영안현 해림보[br](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시)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주진수는 1875년 3월 11일 [[강원도]] 울진현 근북면 매정동(현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매정마을)에서 신안 주씨 교수공파 12세손인 아버지 주병휘(朱秉輝, 1861. 5. 12 ~ 1933)[* 신안주씨대동보에는 朱秉'''{{{+1 徽}}}'''로 등재되어 있다.]와 어머니 [[전(성씨)|담양 전씨]](潭陽 田氏, 1855. 2. 1 ~ ?)[* 전연기(田淵基)의 딸이다.]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울진현 원남면 금답동(現 울진군 매화면 금매리)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http://db.history.go.kr/id/im_109_10438|#]]] 어려서 한학과 지리·역사·수학 등 신학문을 독학하고, 『[[독립신문]]』·『[[황성신문]]』·『[[매일신보]]』 등을 읽고 민족의식을 키웠다. 1896년경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1907년 10월 관동학회 회원과 울진 지역민인 곽종욱·[[남상정]]·전오규(田五圭)·[[주병웅]]·진규환(陳奎煥)·전주석·최정순 등과 울진군 원남면에 울진 지역 최초의 사립학교인 매화만흥(梅花晩興)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또 [[황만영]]이 [[평해군]] 원북면(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세울 때도 자금을 지원했다. 1909년 봄, [[한성부]]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간부인 양기탁·[[안태국]]·[[이동녕]] 등이 [[만주]]에 제2의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계획하게 되자, 그는 강원도 책임자인 총감으로 임명되어 군자금 10만원을 마련하도록 지령을 받았다. 이후 상경해 1910년 8월에는 [[김구]]·양기탁 등과 함께 [[경성부]]에 [[조선총독부]]에 대항하는 도독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해 11월 [[간도]]로 가서 독립군 기지 후보지 물색 및 군자금 마련, 이주민 모집 등의 활동을 하던 중 1911년 1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 [[유동열]]·[[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동휘]]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그해 7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24&evntId=0034970598&evntdowngbn=Y&indpnId=000000304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당시 경성부 동부 연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종로구)|연지동]])에 살고 있었다.] 출옥 후 1912년 9월 가족을 이끌고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해룡부(海龍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의 추가가(鄒家街)[*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通化市) 류허현(柳河縣) 쩌우자촌(鄒家村). 싼위앤푸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과의 거리는 약 6km에 불과하다.]에 정착하여, [[이시영(정치인)|이시영]]·[[이상룡]]·이동녕·[[김동삼]] 등과 [[경학사]]를 조직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를 운영하는 등 독립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조선인들을 규합, 삼위기사단, 지인단, 애국부인회, 소년애국단 등을 조직하여 조국 광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북간도에서 조선 동포들을 모아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해 9월에는 신참(新站)[* 현 [[함경북도]] [[무산군]] 차유리.]·황지강(黃地江) 등지에서 [[상해임시정부]] 특파원 전영화(田榮化)와 [[우수리스크|니콜리스크]] 정부로부터 파견되어 온 그와 황만영(黃萬榮) 그리고 신참 지방의 윤인보(尹仁甫)·신상무(申相武)·안기완(安基完)·이순(李舜) 등이 모여 미국차관 3백만불의 도입문제와 순회강연 계획 등을 논의하였으며, 그는 니콜리스크 정부의 미국인 고문의 말을 인용하여 "일본인을 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일본국을 적으로 할 것이며, 따라서 일본인을 살해하는 일은 안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연단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1926년 4월 5일에는 정의부(正義府)의 유일당(唯一黨) 촉성에 참여하기 위하여 [[이규풍]](李圭豊)·최소수(崔素水)와 함께 소련에서 만주 길림(吉林)으로 돌아왔으며, 정의부의 양기탁·[[현정경]]·곽종대(郭鍾大)·[[오동진(독립운동가)|오동진]]·고활신(高豁信), 천도교의 김봉국(金鳳國)·[[이동락]]과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송헌(독립운동가)|송헌]] 등이 모여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중앙위원 및 선전부원에 선임되어 정의부의 산하 행정기관으로서 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차이로 고려혁명당은 분열되었으며, 그는 다시 [[소련]]으로 돌아갔다. 그후 1936년 9월 16일 만주국 빈강성 영안현 해림보에서 별세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1875년 출생]][[분류:1936년 사망]][[분류:신안 주씨]][[분류:울진군 출신 인물]][[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