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미관계]][[분류:미국의 외교]][[분류:외교공관]][[분류:관저]][[분류: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분류:중구(서울)]] [include(틀:대한제국 내의 외교공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35deg, #39386E 40%, #B31C31 34%, #B31C31 76%, #FFF 76%, #FFF 80%, #B31C31 80%, #B31C31 84%, #FFF 84%, #FFF 88%, #B31C31 88%, #B31C31 92%, #FFF 92%, #FFF 96%, #B31C31 96%)" [[미국|[[파일:미국 국장.svg|width=26]]]]''' {{{#fff 주한미국공사관 관련 틀}}}'''}}} || ||<^|1>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5>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131호 ||<|2> ← || '''132호''' ||<|2> → || 133호 || || [[일민미술관|동아일보 사옥]] || '''미국 공사관''' || [[사현사 석불좌상]] || ---- [include(틀:한미관계)] ---- [include(틀:아관파천)]}}}}}}}}} || ---- ||<-3> [[파일:대한제국 국장.svg|width=28]] '''[[틀:대한제국 내의 외교공관|{{{#ffd800 대한제국 내의 외교공관}}}]]''' || ||<-3> [[파일:미국 국장.svg|width=9%]] [br] {{{+1 {{{#fff '''주한미국공사관'''}}}}}}'''[br]'''{{{#fff '''駐韓美國公使館 | The American Legation in Korea[* 공사관은 영어로 Legation이라고 하며, 공사는 Minister라고 한다.]'''}}} || ||<-2><#fff,#12121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width=100%]]}}} ||<#fff,#12121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미국 국장.svg|width=40%]]}}} || ||<-2><#131230> {{{#fff '''국기'''}}} ||<#131230> {{{#fff '''국장'''}}} || ||<-4>{{{#!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미국공사관,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2><#fff> '''한성부 서부 황화방 정동''' || || {{{#fff '''상급기관'''}}} ||<-2><#fff> '''미국 국무부''' || || {{{#fff '''공사관 설립'''}}} ||<-2><#fff> '''1883년''' || || {{{#fff '''공사관 폐쇄'''}}} ||<-2><#fff> '''1905년''' || ||<-3>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28]]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2호}}}]]''' || ||<-3> {{{#fff {{{+1 '''미국공사관'''}}}[br]{{{-1 美國公使館}}}}}} || || '''{{{#fff 소재지}}}''' ||<-2><#fff>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덕수궁길 83 (정동) || || '''{{{#fff 분류}}}''' ||<-2><#fff>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근대정치국방 / 외교 || || '''{{{#fff 수량 / 면적}}}''' ||<-2><#fff> 건물 1棟 || || '''{{{#fff 지정연도}}}''' ||<-2><#fff> [[2001년]] [[4월 6일]] || || '''{{{#fff 시대}}}''' ||<-2><#fff> 1883년 ([[고종(대한제국)|고종]] 20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구한말 미국공사관.png|width=100%]]}}} || || {{{#fff '''19세기 말 ~ 20세기 초 즈음의 미국공사관[*A [[https://blog.naver.com/ohyh45/20147859018|사진 출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현재 미국공사관.png|width=100%]]}}} || || {{{#fff '''미국공사관의 현재 모습[*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08110600065|사진 출처 - 《경향신문》.]]]'''}}} || [목차] [clearfix] == 개요 ==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에 위치한 [[미국]]의 옛 [[공사관]]이다. == 역사 == 1883년([[고종(대한제국)|고종]] 20년) [[한미관계#s-3.1|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국]]은 서양 국가 최초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미국 정부는 첫 [[공사]]로 루시어스 하워드 푸트를 파견했다. 푸트 공사 일행은 자신들이 머물고 근무할 [[공사관]]을 [[한성부|한성]]에 설치했다. 처음에는 잠시 박동의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묄렌도르프]] 집에 두었다가 통역관 [[윤치호]] 등에게 새 공사관 부지를 알아보게 했고, 곧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에 있는 민계호, 민영교([[명성황후]]의 친족들)의 집을 2,200[[미국 달러|달러]]에 사들여 그곳으로 옮겼다. 민계호 집은 건물 125칸, 빈 공간 300칸, 민영교 집은 건물 140칸, 빈 공간 150칸 규모였으며 이외에도 주변 가옥을 몇 채 더 매입해 미국공사관 영역을 조성했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773.html|#]]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880년대 후반 미국공사관.png|width=100%]]}}} || || {{{#fff '''1880년대 후반 미국공사관[*A]'''}}}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수옥헌과 미국공사관.png|width=100%]]}}} || || {{{#fff '''1899년에'''}}} [[아펜젤러|{{{#fff '''아펜젤러'''}}}]]{{{#fff '''가 촬영한'''}}} [[덕수궁 중명전|{{{#fff '''경운궁 수옥헌'''}}}]]{{{#fff '''(맨 왼쪽)과 미국공사관(맨 오른쪽).[br]맨 왼쪽의 흰 탑이'''}}} [[주한러시아공사관|{{{#fff '''러시아공사관'''}}}]]{{{#fff '''이다.'''}}} || [[서양]] [[외교공관]] 중 처음으로 생긴 미국공사관의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 입주를 계기로, 정동은 [[한성부|한성]] 내 [[서양인]]들의 터전이 되어갔다. 1897년([[건양]] 2년)부터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인근의 [[덕수궁|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거주했고, 점점 경운궁의 영역을 넓히면서 미국공사관은 경운궁에 둘러싸인 모습이 되었다. 1900년([[광무]] 4년) 즈음에 부분적으로 개수했고, 실내도 고쳐지었다. 그리고 행랑도 만들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구한말 미국공사관2.png|width=100%]]}}} || || {{{#fff '''19세기 말 ~ 20세기 초 즈음의 미국공사관[*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OrgFilePopup.do?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5&content_id=cp071001750001&content_seq=11|사진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 미국공사관 건물은 다른 나라 [[공사관]]들과 차이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처음부터 [[을사늑약|단교]] 때까지 쭉 [[한옥]]이었고 자리도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조선]]의 [[전통]]을 존중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조선 주재 미국 외교관들은 당연히 자신들에게 편한 양옥을 세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본국에서 지원을 적게 해줬기 때문에 짓지 못했다.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에 [[공사관]]을 마련한 첫 미국공사 푸트는 [[미국]] [[정부]]에 [[양식|서양식]] 건물을 짓기 위해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에서는 자금을 주지 않았다. 푸트가 이유로 든 것이 ‘[[모자]]가 천장에 닿는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국무장관은 ‘실내에서 모자를 안 쓰는 것이 조선 풍습으로 안다’고 답하며 거절한 것. 표면적인 이유는 저렇지만 [[무관심|미국이 조선에 큰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실내에서 모자를 벗는것은 정작 서양의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관습은 실내에서도 의관을 정제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어전회의에서 신하들이 사모를 벗던가? 따라서 진짜 이유는 [[미국 의회]]에서 조선의 가치를 매우 낮게 보고 "납세자의 세금을 조선 공사관 같은 필요없는 곳에 쓸 수 없다." 고 지출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옥을 수리해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773.html|#]] 이 때문에 푸트 공사는 사비로 사들인 공사관 대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의회]]의 공사관 운영비 지출 거부와 더불어 공사 직위가 총영사 내지 변리공사로 강등당했다. 이에 그는 갑신정변을 핑계로 제물포로 런한 다음 그길로 사퇴했고, 공사관 수장의 급은 총영사 대리로 낮아져 고작 해군소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가 혼자서 운영하는 막장상황에 이르렀다. 재정난이 심해 사퇴한 푸트 공사보다 월급도 5분의 1에 불과한 소위급 박봉으로 포크는 조선인을 고용하고, 정보 수집 보고를 훌륭하게 해냈다고는 한다. [[한옥]] 청사에 대한 [[외교관|공사관 직원]]들의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선교사]], [[의사]] 출신 [[호러스 뉴턴 알렌]] [[공사]]는 자신들의 공사관이 다른 나라 공관보다 초라한 것에 상당한 불만을 가졌고, 이에 대해 자신의 책 《조선의 이모저모(Things Korean)》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른 열강들은 각자 자신들의 대표자가 살 곳으로 미국공사관보다 훨씬 더 허세부린 건물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한때 조선 고관이 살던 진기한 모양의 아름다운 [[방갈로]]를 계속 사용했다. ...(중략)... 광활한 잔디밭이 있고 나무가 우거진 넓은 부지가 있어서 편하고 예술적인 거주지를 만들었지만, '''공사관 건물은 다른 나라가 세운 큰 건물에 비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https://blog.naver.com/minsu977/221243266679|#]]'''...(후략)... 반면 [[궁내부]] 찬의관 겸 [[외부]] 고문을 지냈던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는 만족스러워 했고, 자신의 회고록인 《비외교적 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에 이렇게 써두었다. >'''미국공사관은 서울에서 가장 편한 곳 중 하나이다.''' 다른 공사관, 영사관 건물들은 유럽건축물을 본따 지은 것들로 칙칙하고 어두운 느낌을 주었다. 이밖의 다른 공관들은 한옥을 고쳐 지은 것이었으며, 한옥은 고치기 매우 편리한 구조였다. '''그것은 잘 다듬은 화강암 기초 위에 튼튼하게 세운 건물이었다.''' 벽은 진흙 또는 벽돌이어서 '''기후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으며''', 육중한 참나무나 밤나무 대들보로 받친 지붕은 수 톤의 흙으로 채워서 높이 올리고 그 위에 기와를 놓아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강추위가 침범하지 못했다.''' ...(후략)...[[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71001750001|#]]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앨리스 방한 당시 미국공사관.png|width=100%]]}}} || || {{{#fff '''1905년에 주 대한제국 미국공사관을 방문한'''}}} [[시어도어 루스벨트|{{{#fff '''시어도어 루스벨트'''}}}]]{{{#fff '''의 큰딸 앨리스 루스벨트'''}}}[*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OrgFilePopup.do?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5&content_id=cp071001750001&content_seq=7|사진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본 제국|일제]]가 [[을사조약|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여 한국과 [[미국]]의 [[국교]]는 끊겼다. 당시 [[미국]]은 [[일본 제국|일본]]에 굉장히 우호적이었고 이미 그해 7월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대한제국 합병을 인정했다. 그래서 을사늑약 직후 제일 먼저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미국영사관 정문.png|width=100%]]}}} || || {{{#fff '''일제강점기 주 경성 미국영사관 정문[*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OrgFilePopup.do?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5&content_id=cp071001750001&content_seq=12|사진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 옛 미국공사관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까지 주일미국공사관 소속 주 경성 영사관으로 기능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미국이 일본의 적대국이 되자, 영사관 피해가 우려되어 경성 주재 미국영사관은 중립국인 [[스위스]] 국기를 내거는 보호조치를 해서 전쟁 중 일제에게 피해를 입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8.15 광복]] 후에는 [[미국 국무부]]에서 직원들의 합숙소로 사용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에 [[한국]]과 [[미국]]은 [[한미관계#s-3.5|재수교]]했고 구 공사관은 주한미국대사관저로 쓰였다. 다만, 대한제국 시기처럼 대사관과 관저가 같은 영역에 있지는 않았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을지로]] 옛 미쓰이물산 경성지점 건물로 옮겨갔다.[* 1968년 [[주한미국대사관]]이 [[세종대로]] 현재 자리로 옮겨간 후 미국문화원이 되었다가 현재는 그레뱅 뮤지엄으로 쓰이고 있다.] 이후 대사관에 대한 내용은 [[주한미국대사관]] 문서 참조.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으로 인하여 주한미국대사관저는 북한군의 공습과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완전히 파괴당하지는 않았고, 서울 수복 후 복구하여 대사관저의 기능을 회복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o3BxlrDOgEs)]}}} || || '''[[주한미국대사관|{{{#fff '''주한미국대사관'''}}}]]{{{#fff '''에서 제작한 미국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 영상'''}}} || 1976년 5월에는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 대사관저 부지 내에 현대건축기법으로 지은 새로운 [[한옥]] 관저를 지었다. 1974년 처음 신축 계획할 때 [[미국 국무부]]에서는 완전한 [[양식|서양식]] 건물로 지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필립 찰스 하비브 (Philip Charles Habib)가 아주 강력하게 한옥으로 짓기를 주장했다고. 그래서 새 관저의 별칭이 하비브하우스(Habib House)이다. 단, 완공할 때 하비브 대사는 이미 물러나있었다.[* 완공 당시 대사는 리처드 스나이더(Richard Lee Sneider).] 1976년에 새로 지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한미국대사관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비브 하우스]] 문서 참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보수전 미국공사관.png|width=100%]]}}} || || {{{#fff '''보수 전 미국공사관[*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317&ccbaKdcd=21&ccbaAsno=0132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후 기존 대사관저는 [[게스트하우스]], 영빈관으로 쓰였다. 2001년 4월 6일에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받았고, 2003년부터 2004년에 복원, 수리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른다. == 역대 공사 / 총영사 (1883 ~ 1905) == '''※ 임기 시작일은 취임일을 기준으로 한다.''' ||
'''{{{#fff 행정부}}}''' || '''{{{#fff 이름}}}''' || {{{#fff '''임기 시작일'''}}} || '''{{{#fff 임기 종료일}}}''' || {{{#fff '''지위'''}}} || || [[체스터 A. 아서]] || 루시어스 하우드 푸트[br](Lucius Harwood Foote) || 1883년 5월 20일 || 1885년 2월 19일 || 특명전권공사 || ||<|4> [[그로버 클리블랜드]] || [[조지 클레이턴 포크]][br](George Clayton Foulk) || 1885년 1월 || 1886년 6월 12일 || 총영사 대리 || || 윌리엄 하워 파커[br](William Harwar Parker) || 1886년 6월 12일 || 1886년 9월 3일[* 부임 중에 객사한 것은 아니고, 워낙 술고래에 술주정도 심했던 터라 본국에서 소환시켰다고(...).] || 변리공사 / 총영사 || || [[조지 클레이턴 포크]][br](George Clayton Foulk) || 1886년 9월 3일 || 1886년 4월 13일 || 대리공사 || || 휴 앤더슨 딘스모어[br](Hugh Anderson Dinsmore) || 1887년 4월 13일 || 1890년 5월 26일 || 공사 || || [[벤저민 해리슨]] || 어거스틴 허드 2세[br](Augustine Heard II)[br] || 1890년 5월 26일 || 1893년 6월 27일 || 공사 ||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존 매험 베리 실[br](John Mahelm Berry Sill) || 1894년 4월 30일 || 1897년 9월 13일 || 공사 || || [[윌리엄 매킨리]] ||<|2> [[호러스 뉴턴 알렌]][br](Horace Newton Allen) || 1897년 9월 13일 || 1901년 10월 1일 || 공사 || ||<|2> [[시어도어 루스벨트]] || 1901년 10월 1일 || 1905년 6월 9일 || 특명전권공사 || || 에드윈 버넌 모건[br](Edwin Vernon Morgan) || 1905년 6월 26일 || 1905년 11월 17일 || 특명전권공사 || == 건물 == * 이미지는 [[http://archive.much.go.kr/data/JD008/folderView.do?jobdirSeq=529|여기]]에서 볼 수 있다. == 여담 == === 고종의 미관파천(美館播遷) 시도 === [[고종(대한제국)|고종]]은 1894년(고종 31년)부터 약 10년 간 미국공사관으로 파천을 시도했었다. 결과적으로는 다 실패했다. 첫 시도는 [[청일전쟁]] 직전에 했는데 무산되었다. 그리고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 이후 [[일본 제국|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번 더 미국공사관으로 망명하려다 실패했다. 이것이 [[춘생문 사건]]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그 이듬해인 1896년([[건양]] 원년)에는 미국공사관 대신 [[아관파천|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러시아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러시아 외교관들과 [[친러파]]가 도리어 고종을 압박하는 형세가 되었다. 서울역사편찬원의 전임연구원 장경호에 따르면, 러시아에 부담을 느낀 고종은 덕수궁 환궁 전후로 해서 더욱 미국 의존도를 더욱 높였고, 미국공사관으로 망명할 의도를 비공식적으로 몇 번 내비쳤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런 정황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경에 주한 미국 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이 [[미국 국무부#s-6|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자세히 나와있다.[* 장경호, 〈대한제국 선포 직후 고종의 미관파천 시도〉, 《한국학》 제42권 제2호, 2019, pp.181 ~ 182.] > (전략) 특히 [[고종(대한제국)|황제]]는 [[주한미국공사관|우리 공사관]]으로 오고 싶어합니다. 저는 황제가 다른 열강들을 불신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아관파천|러시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보호처를 말해줄 수 없다는 점을 기회가 있을 때 언급했습니다. (중략) '''황제는 지금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그가 여기로 영구히 파천해 온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소위 "왕립도서관"이라는 것을 우리 공사관 옆문에 설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곳은 미국인들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제가 그린 "왕립도서관"을 참조하십시오. 저는 황제가 위험이 닥치면 이 도서관으로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후략) >---- >1897년 10월 13일에 알렌 공사가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 장경호, 〈대한제국 선포 직후 고종의 미관파천 시도〉, 《한국학》 제42권 제2호, 2019, p.182.] 저 편지에 의하면, 미국공사관 행이 좌절되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차선책으로 미국공사관 바로 옆에 임시 피난처 개념으로 왕립도서관을 세웠다. 그 곳이 [[을사조약]]을 체결한 장소로 유명한 [[덕수궁 중명전|중명전]]이다. [[대한제국]]을 수립한 후에도 파천 시도는 이어져서, 1897년([[광무]] 원년) 12월과 이듬해 1월에 고종은 다시 미국공사관으로 가려 했으나 전부 거절당했고 심지어 [[러일전쟁]] 시기에도 다시 파천하려 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장경호, 〈대한제국 선포 직후 고종의 미관파천 시도〉, 《한국학》 제42권 제2호, 2019, pp.194 ~ 195.] 러일전쟁이 막바지이던 1905년(광무 9년)에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패색이 짙어지자 고종은 또 다시 미국공사관에 파천 요청을 하지만 알렌은 거부했고, 본국에 "고종의 행실로 보아 억지로 담을 넘어 올수도 있으나 그 경우에는 단호히 퇴거 조치를 하겠다"고 보고 할 정도로 고종을 부담스러워했다. 알렌의 일기를 보면, 고종이 공사관과 덕수궁 사이의 땅을 미국 측에 기부한 일을 두고, "고종이 유사시에 그 땅을 도주로로 활용하려 한 걸 알아채지 못했다."고 매우 후회할 정도로 여러 번의 파천 요청에 대해 매우 난감해했다. == 매체에서 == * 2018년 [[tvN]]에서 방영한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 분)의 근무지로 나온다. 실외 촬영은 [[충청북도]] [[청주시]]에 있는 운보의 집[* 화가 [[김기창]]이 살았던 집이다.]에서, 실내 촬영은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선샤인랜드의 한성전기회사 세트 2층에서 했다. == 같이 보기 == * [[주한미국대사관]] * [[하비브 하우스]] * [[춘생문 사건]] * [[한미관계]] * [[조지 클레이턴 포크]] * [[호러스 뉴턴 알렌]]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하비브 하우스, version=6, title2=덕수궁 중명전, version2=49, title3=주한미국대사, version3=26, paragraph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