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아우구스타)] || '''이름''' ||줄츠바흐의 베르타[br](Bertha von Sulzbach)|| || '''출생''' ||1110년대|| || '''사망''' ||[[1158년]] [[8월 29일]]|| || '''아버지''' ||베렌게르 2세|| || '''어머니''' ||불프라트하우젠의 아델레이드|| || '''남편''' ||[[마누일 1세]]|| || '''자녀''' ||[[마리아 콤니니]], 안나 콤니니|| [목차] [clearfix] == 개요 ==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동로마 제국의 [[로마 황제|황제]] [[마누일 1세]]의 [[황후]]. == 생애 == [[1110년대]] 줄츠바흐 백작 베렌게르 2세와 볼프라트하우젠의 아델레이드의 6남매 중 딸로 출생했다. 베렌게르 2세는 [[보름스 협약]]에 참가한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 중 한 명으로,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140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2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루지에로 2세]]에 대항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콘라트 3세]]에게 결혼 동맹을 제안했다. 2년간의 협상 끝에, 줄츠바흐 백작의 딸을 요안니스 2세의 아들과 혼인시키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1142년]] 8월 2일, 베르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녀가 막 도착했을 때 요안니스 2세는 이미 죽었고, 베르타와 결혼할 예정이던 마누일 황자는 [[마누일 1세]]로 즉위했다. 그는 [[그리스어]]도 할줄 모르는 외국 태생의 공주와 결혼하길 꺼려 3년간 결혼을 미뤘다. 1145년, 마누일은 콘라트 3세에게 지참금을 더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콘라트 3세는 500명의 병사를 먼저 파견하고, 필요하다면 2,000~3,000명의 병력을 더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1145년]] 말 뷔르츠부르크 주교 엠브리코의 사절단이 찾아와 황제를 설득했다. 그들은 시칠리아 왕국과의 전쟁이 잘 풀리면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남부의 지배권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마누일은 이 제안을 수락하였고, 마침내 1146년 1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마누일과 베르타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베르타는 결혼 후 [[정교회]]로 개종하였고, 그녀처럼 외국인 태생이며 요안니스 2세의 황후였던 [[헝가리의 이리니]]를 기리는 의미로 '이리니(Irene)'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제2차 십자군 원정]] 시기인 [[1147년]] 9월, [[콘라트 3세]]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동로마 제국은 독일군의 약탈에 못마땅해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망칠 생각은 없어 접촉을 시도했지만 콘라트 3세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콘스탄티노플 교외를 계속 약탈했다. 견디다 못한 마누엘 1세는 이들을 소아시아로 보내줬다. 콘라트 3세는 프랑스의 십자군을 기다리지 않고 안티오크로 진격했다가 투르크군의 급습을 받아 2만 명 중 1만 8천명을 잃어버렸다. 그 후 프랑스 십자군과 합류한 뒤 에페소스까지 진군했지만, 콘라트는 그곳에서 중병에 걸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마누일과 베르타는 콘라트가 병마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왔고, 콘라트가 말 경주 등 모든 종류의 오락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콘라트는 동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감정을 품은 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다. 한편, 베르타는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베르타는 예의가 바르고 신앙심이 깊고 신중하며, 어려운 이들을 가엾게 여기고 자선을 베풀 줄 아는 여인이었다고 한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그녀는 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후들이 화장에 열중한 걸 경멸하며, 맨얼굴을 유지하는 걸 선호했다고 한다. 당대 역사가들은 그녀의 내면이 매우 훌륭했다고 칭송하지만, 용모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아 외모가 볼품없게 보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마누일 1세는 그런 황후를 별로 총애하지 않았고, 수많은 정부를 사귀었다. 그래도 두 딸 [[마리아 콤니니|마리아]]와 안나를 낳은 걸 보면, 마누일이 아예 외면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남편에게 별로 총애받지 않았지만, 그녀는 황후로서 제 역할을 수행했다. 마누일은 자주 원정을 나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가 내정을 맡았으며 반역 음모를 번번이 적발했다. 1154년 [[안드로니코스 1세|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마누일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적발했고, 1158년 안드로니코스가 감옥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을 황제에게 보고하였으며, 전면적인 수색을 요구하는 칙령을 황제 대신 내리기도 했다. 또한 1159년 황제의 개인 비서들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적발하여 킬리키아에 머물고 있던 마누일에게 알리기도 했다. 또한 베르타는 본래 그리스어를 몰랐지만, 동로마 황후가 된 직후 빠르게 습득하였다. 그녀는 그리스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요안니스 체체스에게 [[일리아스]]를 그리스어로 요약한 책을 의뢰했고, 민중 문학을 후원하기도 했다. [[1158년]] 8월 29일, 베르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 로그고이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요안니스 2세]]가 세운 성 구세주 성당 묘지에 묻혔다. 마누일은 후계자를 가지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재혼하길 희망해 십자군 국가들에 새 신부를 문의하고자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후 수년간의 협상 끝에, 마누일은 1161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와 결혼했다. [[분류:동로마 황후]] [[분류:아우구스타(동로마)]] [[분류:콤니노스 가문]] [[분류:1158년 사망]] [[분류:독일계 그리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