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관련 문서, top1=대한민국/문화 검열)] [include(틀:사건사고)] [include(틀:1987~2020년 젠더 관련 이슈)] [목차] == 개요 == >'''이 사회가 기피하는 부분들을 [[검열|은폐하려고만 하면]] 아이들은 어디서 알고 어디서 느끼나요?''' 나는 마 교수가 잘했다고 봐요. >---- >[[김광석]][* 후술하겠지만 마광수와 함께 방송 출연정지에 오른 적이 있다. 초대 게스트로 출연한 마광수에게 [[간통죄]]에 대해서 먼저 물어봤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악법", "사람이 도덕적인 틀에 얽매여서 진실을 왜곡할 때가 많다. 도덕성보다는 솔직성이 중요하다."라는 등 비판적인 그의 발언에 "맞습니다"라며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에서였다.], 1993년 2월 월간 『길』과의 인터뷰 중 [[1992년]] [[10월 29일]]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마광수]]'''(1951~2017)가 집필한 [[소설]] 《즐거운 사라》가 [[형법]] [[음화반포|제243조]] 및 [[음화제조|244조]]의 [[음란물]]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강의 도중'''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체포]]된 후 법정에서 [[유죄]]가 확정되어 [[징역]]을 선고받은 사건. 이렇게 작가가 공권력에 의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것을 [[필화]](筆禍; 붓으로 인한 재앙)라고 한다. 대부분의 필화는 반체제 인사가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는 이유로 당하는 것이지만 이 사건은 단순히 '야한 소설을 창작했다는 이유'로 대학 교수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점에서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 소설 '즐거운 사라' == ||<-2>
{{{#000 '''{{{+1 즐거운 사라}}}'''}}}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bookimg.naver.com/115061.jpg|width=100%]]}}} || || '''저자''' ||[[마광수]] || || '''출판사''' ||청하 || || '''출간일''' ||[[1992년]] [[8월 20일]] || || '''쪽수''' ||363p || || '''ISBN''' ||8940301463 || 이 소설은 성에 대해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프리섹스를 지향하는 자유로운 [[여대생]] '사라'가 온갖 [[섹스]]를 즐기며 쾌락을 추구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한국에서 전반적으로 벌어지던 일들[* 21세기처럼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고 언론을 통제하기 상대적으로 쉬웠던 시기였기 때문에 묻혔을 뿐 훗날 재발굴된 당시의 성추문들을 보면 지금 기준으로도 혀를 내두를 만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웬만한 부자나 공무원들은 죄다 본부인 이외에 [[첩]]을 거느리고 사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86세대]]라고 불리는 당시의 젊은이들도 이들을 동경하여 권력자가 되면 자신도 수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 것이라든가 첩이라도 좋으니 부잣집에 들어가고 싶다든가 하는 대사들이 소설이나 드라마 등에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곤 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 벌어졌던 [[정인숙 살해사건]]만 보아도 당시 한국인들이 얼마나 방탕하고 난잡한 성생활을 즐겼는지 알 수 있다.]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그다지 반사회적인 사상을 내세우고 있지 않으며 소설에 등장하는 성애 묘사들도 비슷한 시기에 버젓이 출판되어 팔린 다른 소설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법적인 처벌을 받을 정도로 음란한 편이라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1980년대나 90년대에 웬만한 스포츠신문이나 잡지에는 즐거운 사라보다 훨씬 더 선정적인 묘사를 자랑하던 소설이나 만화들이 버젓이 실렸기 때문이다. 무협 소설들도 일명 [[노루표 무협지]]라고 하여 웬만한 작품들에 수위가 높은 섹스 장면이 꼭 들어가 있었으며 하다못해 [[춘향전]] 같은 [[고전]] [[문학]]조차 굉장히 자유로운 성적 묘사가 드러나는 판이다. 동시대 다른 외국 서적과 비교해 봐도 이 소설이 특별이 이상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일본]]과 [[프랑스]], [[독일]]처럼 서점에 [[야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나라와는 비교할 것도 없고 《[[롤리타]]》나 《[[소돔의 120일]]》에 비하면 양반이다. 당시 한국에 출판된 서적들을 봐도 그보다 훨씬 야한 [[일본]]의 에로티시즘 소설인 《여인의 추억》이나 《요마록》 같은 물건이 아무 문제 없이 버젓이 출판되었는데 누구는 체포되었다. 사법부에서는 '음란성의 정도를 사회 일반인의 기준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명시한 적이 있으나 사회 일반적으로 이 소설만이 특히 이상한 것이 아님에도 실형이 선고되었다는 것은 오판이라는 것이다. ==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 [include(틀:포르노그래피 합법 여부)] [[냉전]]기 자유 진영인 [[제1세계]]에서는 [[68혁명]]과 함께 전후 세대에 [[성적 자유주의]]가 확산되어 '''성인이 성인물을 향유하는 것'''을 개인의 권리로 생각하는 사상이 확산되었으나 [[대한민국]]은 [[소련]]이나 [[중국]] 못지않게 엄숙주의를 제도적으로 강요하였다. 당시 한국은 계획경제국가, 경찰국가로서 수십 년간 지속된 [[10월 유신|군사정권]] 하에서 '[[북한]]의 [[사회주의]] 이념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내로남불|국민을 계도・검열하기 위한 규제가 문화 산업 전반에 아주 팽배해 있었다.]] 음악계에서는 [[건전가요]]가 대표적인 사례다. 배경에는 성 문화를 부끄러운 것이라고 여기고 터부시하는 [[변질된 유교적 전통|성리학적 잔재]]도 깊게 깔려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정부의 [[미니스커트]] 단속 같은 것도 이러한 배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루어졌다. [[1987년]] 대한민국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민주화를 맞이하였지만 여전히 국민의 [[문화 지체]]는 계속되었고 특히 성 문화와 관련된 의식은 70-80년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호주제]]와 [[혼인빙자간음죄]], [[간통죄]]의 존재였는데 심지어 후자는 각각 [[2009년]]과 [[2015년]]에야 폐지되었다. 불과 20세기까지 한국에는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도 비교적 최근인 1992년에 일어난 것이며 '국민소득 2만불'을 목표로 하고 [[선진국]]의 반열을 넘본다던 한국에서 현직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야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징역을 선고받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이 유명해진 이유는 [[마광수]] 교수가 근대 문학 비평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천재라는 점과 [[쌍팔년도]][* 쌍팔년도를 1988년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서기로 쌍팔이 아니라 단기로 쌍팔이다. 즉 1955년이다. ]도 아니고 도화(圖畵)나 영상이 아니라 활자 매체인 '''소설'''에까지 공권력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맞는 것이냐는 비판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마광수 교수는 '즐거운 사라'만 그렇게 혹독한 처분을 받은 것이 일단 '''교수'''가 쓴 것이기 때문이고[* 만약 마광수가 대학 교수가 아니라 스포츠신문이나 잡지에 성인 소설을 연재하던 평범한 소설가였다면 처벌을 받기는커녕 그 이름조차 언론 매체에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들도 있다.] 주인공 '사라'가 방탕한 삶 끝에 불행해지거나 정신 차리는 교훈적, 도덕적 결말이 아니기 때문에 [[프로불편러|불편하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린 게 아닐까 하고 언급한 바 있다. == 사건의 진행 == === 체포와 유죄 선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206_376.jpg|width=100%]]}}} || || '''연행 당시 모습''' || [[https://www.law.go.kr/precSc.do?section=&menuId=7&subMenuId=47&tabMenuId=213&eventGubun=060101&query=%EC%84%9C%EC%9A%B8%ED%98%95%EC%82%AC%EC%A7%80%EB%B0%A9%EB%B2%95%EC%9B%90+1992.+12.+28.+%EC%84%A0%EA%B3%A0+92%EA%B3%A0%EB%8B%A810092+%ED%8C%90%EA%B2%B0#licPrec227427|당시 1심 판결문]][* '범죄사실'의 2번째 줄에 언급된 [[불교방송]]에서 [[김광석]]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인 '밤의 창가에서'에 출연하여 성적인 발언을 하였다가 출연금지 처분을 받은 일은 1991년이 아닌 1992년에 일어났다.] 1992년 [[9월 1일]] [[간행물윤리위원회]]는 출판 서적에 대한 검열 작업 도중 《즐거운 사라》를 발견해 [[검찰]]에 [[음화제조]] 및 [[음화반포]]죄로 마광수 교수와 청하출판사를 고발했고 [[9월 24일]] 문화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 마 교수에 대한 제재를 건의하였다. 10월 29일 강의 중에 형사가 들어와 그대로 마광수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 끌고 가면서 그대로 [[구속]]되었다. 출판사 직원도 줄줄이 체포되었고 검찰은 책을 인쇄했던 업체 고려제책(주)을 압수수색해 5천여 권의 서적을 수거했다. 당시 마광수는 검찰에 강력하게 항의하였으나 세간의 인식은 '''"뭐? [[연세대]] 교수씩이나 된다는 사람이 야한 소설을 써!? 세상이 망했구나! 저 놈을 매우 쳐라!!"''' 수준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작가 조경휘는 자신의 소설인 '마지막 손오공'에서 "요즘 인간 세상은 대학 교수나 되는 사람이 야한 소설을 쓰고 그게 무죄라고 징징거릴 만큼 품위가 떨어졌고 말세다."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손오공'은 작중 내내 온갖 섹드립이 난무한다.] 소수의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마광수를 옹호하였으나 결국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항소심에서는 재판장이 "이 판결이 불과 10년 후에는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판사로서 현재의 법감정에 따라 판결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 사건의 항소심 판결문이 공개된 바 없어 저 소문의 진위는 확인하기 어렵다.] 사건 당시 보수 성향의 유력 일간지 등을 통하여 "마광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지식인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서울대학교]]의 [[손봉호]][* [[국어국문학과]]는 학과 문서에도 있지만 문과 기초학문의 보루이기 때문에 역사 깊은 학교들은 모두 나름의 역사와 고유의 업적, 학풍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연세대]]와 [[서울대]]는 그 중에서도 견원지간인 데다 연대 국문과 내부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마 교수는 이중고를 겪은 셈이었다. 손봉호는 국문학자도 아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소속이었는데도 이 정도 극딜을 해댔다. 특이한 것은 손 교수는 [[매춘]]을 막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논리에 의거해 [[공창제]]에 찬성했다고 한다.] 교수는 '''"마광수 때문에 [[에이즈]]가 유행한다, 마광수는 교수가 아니라 마광수 씨로 불러야 한다"''' 등의 공격적 발언을 쏟아내면서 자신의 위세를 높이기도[* 손 교수는 이후 [[동덕여자대학교]] 총장, 초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낸다.] 했으며 이태동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는 "<즐거운 사라>에 나오는 여대생과 그를 가르치는 교수 사이에서 문란하고 변태적인 [[성관계]]가 성실한 노력의 상징인 학점의 흥정대상이 된다는 것은 커다란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며 마광수와 여제자 사이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인신공격을 하기도 했고 [[이문열]]은 [[중앙일보]]에서 그의 작품을 '구역질을 동반한다, 보잘 것 없다'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1990년대부터 마광수는 [[이문열]]을 [[전두환]] 정권의 교육정책에 대한 문제점 덕분에 상업적으로 성공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어쩌면 정곡을 찌른 발언인데 이문열 본인은 전두환의 생일 잔치에도 참가했을 만큼 전두환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대표작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주인공인 엄석대가 바로 전두환에 대한 이문열의 그리움을 나타낸 것이라는 해석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정설로 통한다.] 다만 해당 칼럼에서 이문열은 동시에 검찰의 마광수 교수에 대한 대처도 구역질 나는 짓을 했지만 그렇다고 잡아가는 것도 구역질 나는 짓이라며 비난했다. 해당 칼럼의 링크는 이문열 항목에 있다. 실질적으로 마광수를 법적 처리하라고 검찰에 "명령"한 것은 당시 국무총리였던 [[현승종]]인데 현승종은 원래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이자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지냈던 인물로 정치적으로도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다. 민주당계 정권이 들어선 후 [[극우]]적인 시국선언에 단골로 나왔다.[* 다만 이 부분은 [[심재륜]] 전 대검 중수부장의 발언에 따르면 수사시작은 본인의 의견으로부터 시작했으며 훗날 검찰총장에 오르는 [[김진태(1952)]] (당시 특수 2부 소속)검사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한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206100042|#]] 여담으로 [[문재인 정부]] 초기 법무부 장관후보자였다가 자진 사퇴한 [[안경환]] [[서울대학교]] 교수는 마광수 교수의 항소심에서 <즐거운 사라> 2차 감정 때 재판부측 감정인으로서 감정했는데 그 감정서로 인해서 마광수 교수의 항소심이 기각되었다고 한다. [[http://blog.naver.com/dogshitlawyer/221031263679|#]] ==== 재판 ==== [include(틀:형사 주요 판례)] 이 판결의 판시사항 및 판결요지는 다음과 같다. > '''서울형사지방법원 1992. 12. 28. 선고 92고단10092 판결''' > [음란문서제조등][하집1992(3),393] >---- > '''【판시사항】''' > 변태적인 성행위를 선동적인 필치로 노골적,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소설 "즐거운 사라"가 음란문서에 해당한다고 본 사례 >---- > '''【판결요지】''' > 소설 "즐거운 사라"는 때와 장소, 상대방을 가리지 않은 각종의 난잡하고 변태적인 성행위를 선동적인 필치로 노골적,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데다가 나아가 그러한 묘사부분이 양적, 질적으로 문서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구성이나 전개에 있어서도 문예성, 예술성, 사상성 등에 의한 성적 자극 완화의 정도가 별로 크지 아니하여 주로 독자의 호색적 흥미를 돋구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는 점 등을 종합 고찰하여 볼 때 위 소설은 문학작품에 있어서의 표현의 자유의 최대한 보장이라는 명제와 오늘날의 개방된 성문화 및 작가가 주장하는 '성 논의의 해방'이라는 전체적인 주제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https://www.law.go.kr/법령/형법/(20211209,17571,20201208)/제243조|형법 제243조]][* 음란한 문서, 도화, 필름 기타 물건을 반포, 판매 또는 임대하거나 공연히 전시 또는 상영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https://www.law.go.kr/법령/형법/(20211209,17571,20201208)/제244조|제244조]][* 제243조의 행위에 공할 목적으로 음란한 물건을 제조, 소지, 수입 또는 수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에서 말하는 음란한 문서에 해당된다. ===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구명 운동 === 마광수를 지지한 [[연세대]] 학생들이 구명운동을 벌였는데 [[토마스 칼라일|"마 교수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가 '''[[주한인도대사관]]'''의 항의를 받는 일이 있었다. 플래카드를 건 사진이 신문 1면에 실리자 이를 본 인도대사관이 "아직도 우리가 [[식민지]]냐"고 항의했고 이에 [[연세대학교]] 학생회가 사과했다고 한다.[[https://www.hankyung.com/article/1994031000791|#]] === 유죄 선고 이후 === 이 사건으로 인해 마광수는 당시 [[연세대학교]]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가 1998년에 다시 교수직에 복직하였지만 <즐거운 사라>는 아직도 재판이 허용되지 않는 금서[* 시장에 극소수 풀렸던 1992년 초판본만이 수집가들 사이에서 괴랄한 가격으로 거래되는 실정이다.]이며 마광수는 국문학계에서 [[왕따|아웃사이더]] 취급을 받아 전공 수업을 하거나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고 교양 강의만 하는 교수로 좌천되고 말았다.[* 마광수도 강의 시간에 대놓고 다른 [[국문과]] 교수들을 깠다. 다만 필화 사건 이후 해임 및 복직과정에서 본인을 지지하는 교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본인의 개인주의를 반성하는 시간도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현세]] 화백의 <[[천국의 신화]]>와 함께 '예술과 외설의 경계가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답 없는 논쟁을 사회 전반에 일으키기도 하였다. 훗날 어떤 열성 팬이 마광수의 홈페이지에 <즐거운 사라>를 전부 손으로 쳐서 올렸다가 2007년에 마광수 본인이 [[약식기소]]되기도 하였다. '달라진 시대상에 비추어 봐도 음란물이기는 하지만 과거 정식기소했을 때보다는 음란성이 약하다'는 것이 약식기소의 이유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56252|#]] 마광수는 이 사건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즐거운 사라> 때문에 전과가 두 개나 생긴 것이다. 이때 마광수는 항소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이 책 하나 때문에 불거진 두 사건으로 생긴 전과는 마광수가 정년퇴임한 뒤 연금조차 못 받게 만들었고 퇴임한 지 1년 뒤 [[자살]]하는 큰 원인이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yfUzGqkCYs&t=1021s|2009년 인터뷰]] 마 교수는 [[2016년]] 강단에서 퇴임하였다. 전과 때문에 연금 수급에 문제가 있어[* 다만 징계를 받아도 50% 정도는 수급을 받은게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와중에 [[우울증]]까지 심해져 결국 [[2017년]] [[9월 5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마광수가 세상을 떠나면서 전 아내측도 이 사건에 대해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마광수는 이 사건에 대해 "10년 정도 지나면 어처구니 없던 해프닝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그 말대로 10년이 지난 [[2002년]]과 이후를 기준으로 야만적이었던 그 시절을 상징하는 비웃음거리로 여겨지고 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즐거운 사라>에서 묘사되는 삶의 태도는 소설 속에서가 아니라 일상의 영역에서 등장해도 별 문제가 안 될 정도로 성적인 개방이 이루어졌지만 마광수를 유죄로 만든 법조항은 아직도 살아 있으며 그 판결도 전원합의체로 변경되지 않았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1210004006|#]] 그리고 <즐거운 사라>는 재출판되지 않고 있다. 재출간되려면 유죄 판결을 재심을 통해 뒤집어야 하는데 마광수 본인이 상술한 '홈페이지 사건' 당시에도 항소를 아예 하지 않았을 정도로 법정 다툼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요원한 일이었고 결국 재심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앞으로도 <즐거운 사라>를 정식 출간물로 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 관련 문서 == * [[괘씸죄]][* 현직 교수라는 신분이 크게 작용하여 처벌까지 간 대표적인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큰 편이다.] * [[음란물]] * [[성인물]] * [[포르노]] * [[야설]] * [[검열]] * [[대한민국/문화 검열]] * [[대한민국/문화 규제와 탄압/일지/노태우 정부]]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마광수, version=614)] [[분류:연세대학교/사건사고]][[분류:1992년/사건사고]][[분류:대한민국의 검열]][[분류:필화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