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진개}}}[br]秦開''' || || '''성명''' ||진개(秦開) || || '''가족''' ||아버지 진씨(秦氏), 손자 진무양(秦舞陽) || || '''참전''' ||[[고조선-연 전쟁]] || || '''주군''' ||[[연소왕]] || || '''생몰''' ||? ~ ? || [목차] [clearfix] == 소개 == [[전국시대]]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 [[연소왕|소왕]] 때의 [[명장]]. 후일 [[시황제|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형가]]의 수행원 진무양(秦舞陽)의 조부였다. == 생애 == 《[[사기(역사책)|사기]]》와 《[[한서]]》의 <흉노열전>에 따르면, 진개는 [[동호]](東胡)에 볼모로 가서 신임을 얻었다가, 고국으로 복귀한 뒤 동호를 기습해 영토 1,000여 리를 정복한 후,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요동]]의 5개 군을 두었다.[* 《[[자치통감]]》에서는 이 기사가 진 [[시황제]] 3년(기원전 244년) 조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전체적인 상황을 설명한 것으로 진개의 동호 공격이 꼭 이해에 있었다고 보장하긴 어렵다. [[남송]] 때의 사서인 《[[https://zh.wikisource.org/wiki/大事記/卷四|대사기]]》에서는 《사기》와 《한서》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되 [[난왕]] 15년(기원전 300년) 조에 실었다. [[청나라]] 때의 사서인 《[[https://ctext.org/wiki.pl?if=gb&res=566221&searchu=秦開|주계편략]]》 또한 이 일을 [[소양왕(연)|소왕]] 12년(기원전 300년)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위략]]》과 《[[자치통감]]》에 따르면 [[고조선]]의 영토 2,000여 리를 정복하고 영토를 만번한(滿潘汗)까지 넓혔다([[고조선-연 전쟁]]). 이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고조선의 강역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진개가 점령했다고 하는 만번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반도 북부 박천 일대, 압록강 서쪽 등으로 의견으로 나뉘는 등, 그 위치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만번한'(滿潘汗)을 '만(滿)과 번한(潘汗)'으로 끊어 읽어야 하며,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요동군의 지명인 '문현'(文縣)과 '번한현'(番汗縣)에 각각 대응한다는 학설도 있다. >그 뒤에 연나라에는 진개라는 현명한 장군이 있었다. 호(胡)에 볼모가 되었는데, 호가 그를 매우 믿었다. (연으로) 돌아오고 동호를 격파해, (동호가) 1,000여 리나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시황제|진나라의 왕]]을 암살하러 떠났던 진무양이 바로 진개의 손자였다. 연나라는 또한 장성을 조양에서 양평까지 쌓았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두어 호를 막았다. 이 무렵 의관과 속대를 할 줄 아는 곳이 [[전국칠웅|전국(시대)에 일곱이었는데]], 그중 셋[* 연, 제또는진, 조.]이 흉노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東胡, 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距胡. 當是時, 冠帶戰國七, 而三國邊於匈奴. >---- >《[[한서]]》 <[[흉노]]열전>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그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조선왕)''', 연나라는 이에 장수 진개를 보내어 그(고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2,000여 리를 취하고, 만번한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삼았다. 이에 조선이 약해졌다. >---- >《[[위략]]》 === 활동시기 === 《동북아역사지도》에서는 진개의 활동 시기를 기원전 281년이라 추측했는데([[http://nsimg.kbs.co.kr/data/news/2016/06/29/3303696_220.jpg|지도 사진]]), 지도 사업이 유사역사학자들의 농간으로 인해 폐기되는 바람에 비정 근거가 알려질 수 없었다. 다만 진개의 활약 시기를 BC 281년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정황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 진개의 손자이자 [[형가]]의 진시황 암살시도로 알려진 형가의 동료, 진무양(秦舞陽)은 진개의 손자라고 한다. 그리고 진무양은 이때 형가가 진시황 암살을 위하여 고용한 장사였다고 하는데,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노인은 아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 《[[사기]]》 <흉노열전>에서는 [[조무령왕]]이 조나라 북부에 군을 설치하고 요새를 쌓은 이후, 진개가 흉노들을 격퇴했다고 적으며, 진개 이후에 조나라의 명장 [[이목(전국시대)|이목]]이 흉노를 또 다시 무찔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목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의 활동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BC 272년 전후로 추측된다. 조무령왕은 기원전 300년 즈음에 요새를 쌓았으며, 이목이 흉노를 격퇴한 시기는 조나라의 기록[* 조나라의 기록에 마지막으로 흉노가 등장한 것은 《사기》 <조세가> -조혜문왕- 편에서 기원전 272년, 흉노의 이웃이었던 동호의 변경 불모지를 개간했다는 내용이 전부다. 그 이후로는 흉노가 등장하지 않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목이 흉노와 전쟁을 벌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과 그의 사망년도가 기원전 229년임을 생각하면[* 이목은 심지어 자연사도 아니고, 당시 전쟁에서 싸우던 장수였으나 모함을 받아 죽었다.] 기원전 272년~265년 즈음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진개의 활동 시기는 BC 300~BC 270년 사이로 추측되는데, 이는 연나라의 전성기이자 연나라 최고의 군주로 꼽히는 [[연소양왕]]의 재위 시기와 일치하므로, 연나라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시기도 적절하다. 왜냐하면 연나라는 연소왕의 즉위 전까지는 간신 [[자지(전국시대)|자지]]가 날뛰는 등 매우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 또한 연소왕의 아들인 [[연혜왕]]은 명장인 [[악의(전국시대)|악의]]를 쫓아내는 삽질에 집권하자마자 제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한, 위, 초 3개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 등 연혜왕 집권기엔 연나라 입장에서도 흉노에 신경쓸 시기가 아니기도 했다. [[분류:몰년 미상]][[분류:춘추전국시대/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