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523년 출생]][[분류:564년 사망]] [include(틀:진서(남조역사책))] [include(틀:남사)] ||<-2> '''{{{+1 陳詳[br]진상}}}''' || || '''작위''' ||수흥현개국후(遂興縣開國侯) || || '''성''' ||진(陳) || || '''이름''' ||상(詳) || || '''자''' ||문기(文幾) || || '''생몰''' ||523년 ~ 564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세]] [[중국]]의 [[남북조시대]] [[진(남조)|남진]]의 [[황족]]. 자는 문기(文幾). == 생애 == 어린 시절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글을 잘 지었고 청아한 담론을 즐겼다. [[진패선]]이 [[후경]]을 [[토벌]]할 때 진상을 불러들이자, 진상은 진패선의 부름에 응하여 환속하고 병마를 받아 종군하였다. 진패선이 [[두감]]을 토벌할 때 진상은 별도로 안길현(安吉縣), 원향현(原鄕縣), 고장현(故鄣縣)을 탈환하였다. 두감이 토벌된 뒤 진상은 산기시랑(散騎侍郞), 가절(假節), 웅신장군(雄信將軍), 청주자사(靑州刺史)에 제수되었다. 이후 고장현과 광덕현(廣德縣)을 분할하여 광량군(廣梁郡)을 설치하면서 진상은 [[태수]]로 임명되었다. 557년, 진패선이 [[양(남조)|양나라]]의 마지막 [[황제]] [[경제(양)|경제 소방지]]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즉위하니 이가 초대 황제인 [[무제(남진)|무제]]였다. 이때 광량군이 진류군(陳留郡)으로 개칭되면서 진상은 진류태수가 되었다. 558년, 수흥현후(遂興縣侯)에 봉해졌고 [[식읍]] 500호를 받았으며, 뒤이어 명위장군(明威將軍),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로 제수되었다. 559년, [[후안도]]에게 종군하여 궁정호(宮亭湖)에서 왕림의 부하 상중애(常衆愛)를 물리쳤다. 같은 해 무제가 붕어하고 진천이 즉위하니 이가 제2대 황제 [[문제(남진)|문제]]였다. 문제가 즉위한 뒤 진상은 선성태수(宣城太守)에 제수되고 [[장군]]은 예전과 같이 받았다. 왕림이 남하하여 책구(柵口)를 점령하자, 진상은 [[오명철]]과 함께 분성(湓城)을 습격했으나 패배하고 남호(南湖)로 달아났다가 파양(鄱陽)에서 보도로 귀환하였다. 그리고 왕림이 평정되었음에도 진상과 오명철은 아무런 공적도 세우지 못했다. 560년, 진상의 식읍은 1,500호로 늘어났으며, 통직산기상시로 제수되고 우위장군(右衛將軍)을 겸임하였다. 562년, 가절(假節), 도독오주제군사(都督吳州諸軍事), 인위장군(仁威將軍), 오주자사로 전출되었다. 주적이 임천(臨川)에서 거병하자, 진상은 오주에서 출병하여 유성(濡城)의 군영을 습격하여 주적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주적이 패주하자, 진상은 임천을 탈환하였다. 564년, 주적이 다시 임천으로 출병하자, 진상은 [[도독]]으로 임명되어 수군과 보군을 이끌고 주적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남성(南城)에 이르러 주적과 전투를 벌이다 패배하여 결국 전사하였다. 진상이 전사할 때 군율을 상실했기 때문에 [[추증]]과 [[시호]]는 없었다. 아들인 진정리(陳正理)가 후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