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의 서진의 역사가, rd1=진수(역사가))] [include(틀:진서)] 秦秀 생몰년도 미상 [목차] == 개요 == [[서진]]의 관리이며 박사(博士)[* 중국 고대 관직 이름. 문헌ㆍ기록 관리, 문서 편찬ㆍ작성, 학문 전수, 후학 양성 등의 일을 맡았다.]를 지냈으며 자는 현량(玄良)으로 [[진랑]]의 아들. == 내용 == 병주 신흥군(新興郡) 운중현(雲中縣) 사람으로 진나라에서 박사를 지내면서 278년에 [[하증]]에 대해 오만하고 사치해 천하에 이름이 있었지만 만약 시호를 주는 규정을 엄격하게 따른다면 시법(諡法)에 따라 명성과 실제가 부합되지 않은 것이 무(繆), 품행이 방탕한 것을 추(醜)라 하므로 그에게는 무추공(繆醜公)이라는 시호를 줘야 한다고 혹평했다. 아첨하거나 참소하는 것을 꺼리고 그러한 사람을 원수처럼 미워해 [[가충]]을 가벼이 여겼으며, 279년에 [[오나라]]를 공격할 때 가충이 대도독이 되자, 진수는 친한 사람에게 가충은 변변한 재능도 없는 문관이 오나라를 정벌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자신은 출진하는 군사들을 울면서 배웅하겠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춘추시대]] 때 건숙이 아들이 전쟁나기 전에 패배할 것을 알고 울면서 배웅한 것을 말하며, 그 때와 지금은 달라서 진나라가 오나라의 국경만 도달해도 싸우지 않고도 오나라를 무너뜨릴 것이니, 지금 우는 것은 진과 오의 상황을 무시한 처사라면서 진수가 우는 것을 그만두게 했다. [[손호]]가 [[왕준(삼국지)|왕준]]에게 투항한 때에 가충은 오나라를 평정할 수 없다면서 증원을 요청했는데, 가충의 증원 요청과 손호의 항복 소식이 낙양으로 동시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가충은 사람들보다 위의 자리에 올랐지만 지혜는 주위 사람보다 아래라면서 모두 진수의 올바름을 인정했다. 280년에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할 때 [[왕혼]]이 왕준을 모함하자 표문을 올려 왕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으며, 282년에 [[가충]]이 죽으면서 그에게 무슨 [[시호]]를 줄지 논의하면서 [[곽괴]]가 억지를 부려 외손자 한밀(韓謐)을 아들 가려민(賈黎民)의 양자로 들인 일을 두고[* [[일본]]에서야 [[기시 노부오]]의 사례를 보면 이런 게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이런 너그러움(?)은 일본에서만 먹히고 그나마도 [[일본 황실]]에서는 안 적용된다.] (비록 가충 본인이 한 게 아니지만) [[종족]]을 제치고 외손자를 후사로 삼음은 예법을 위반하고 개인적인 정에 빠져 윤리를 어지럽힌 일이라고 규탄하며 증[[자작(작위)|자]](鄫[[子]])가 외손자인 거자(莒子)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은 걸 [[춘추#s-4]]에서 거나라 사람이 증나라를 멸망시켰다고 쓴 걸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01A_0020_030_0010|제시]]하여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제사를 단절시켜[* 다시 말하지만 동아시아는 [[종족]]을 중시하고 [[소목#s-4]]을 중시하여 [[서양자]] 따위를 절대 안 인정하다.] 사회를 어지렵혔으므로, 가충은 기강과 절도를 혼란시켰기 때문에 시호를 황공(荒公)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무시되었다. 283년에 [[사마염]]이 [[사마유]]를 봉국(封國)으로 돌려 보내면서 태상(太常)[* 중국 고대 관직 이름. 종묘ㆍ사직의 제사, 장례, 의전 등을 맡았다.]에게 명령을 내려 사마유에게 하사할 물건을 의논하게 하자 박사 유부, 태숙광, 유돈, 무울, 곽이, 부진 등과 함께 사마유를 봉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사마염은 이들이 올린 표(表)를 보고 크게 노하여 상소문을 올린 이들을 처벌하였다. 진수도 이때 관직에서 쫓겨났다가 나중에 다시 복직되었다. 진수는 이처럼 강직하여 남들과 자주 충돌했다. 박사를 총 20년 동안 지냈고, 재직 중에 사망했다. [[분류:서진의 인물]][[분류: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