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진옥련}}}'''[br]'''陳玉鍊'''}}}}}} || || '''자 / 호''' ||관부(瓘夫) / 청전(靑田) || || '''본관''' ||[[여양 진씨]][* 시중공파(侍中公派)-극재공파(克齋公派)-군위 동산문중 27세 련(鍊) 항렬.] || ||<|2> '''출생''' ||[[1860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59&evntId=0034987763&evntdowngbn=Y&indpnId=000001904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1919년 7월 3일 판결문]]에는 1850년 9월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는 우선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0587|독립유공자 공적조서]]의 기록을 따른다.] || ||[[경상도]] [[군위군|의흥현]] 부남면 황청리[br]{{{-3 (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여양 진씨]] 집성촌이다.[[http://efw.nfm.go.kr/service/book/text/107|#]] 독립유공자 [[홍묵]]도 이 마을 출신이다.] 황청리마을 826번지)}}}[* [[https://theme.archives.go.kr/next/acreage/viewCadastreDetail.do?packid=0000443001&docid=0011075551&mngno=BJCA320126&type=12&want=1&arch_tp_id=12&formType=old&rtURL=%2facreage%2flistOldnameSearch.do%3fpage%3d3%5edepth1%3d%25EA%25B2%25BD%25EC%2583%2581%25EB%25B6%2581%25EB%258F%2584%5edepth2%3d%25EA%25B5%25B0%25EC%259C%2584%25EA%25B5%25B0%5edepth3%3d%25EB%25B6%2580%25EA%25B3%2584%25EB%25A9%25B4%5edepth4%3d%25EB%258F%2599%25EC%2582%25B0%25EB%258F%2599%5earch_tp_id%3d12%5eserviceCode%3d1-1-3|1914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4년 당시 이 지번은 진옥련의 장남 진해상(陳海翔, 1881 ~ 1954. 4. 15)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 ||<|2> '''사망''' ||[[1944년]] [[11월 10일]][*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9월 26일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 ||[[경상북도]] [[군위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78호 || || '''상훈'''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진옥련은 1860년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황청리(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황청리마을 826번지)에서 아버지 진재만(陳在晩, 1834 ~ 1907. 6. 1) 슬하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유생으로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한 바 있었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뒤 줄곧 조선의 독립을 희망했지만, 형세가 어찌할 수 없었기에 번번이 단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9년 스승인 곽종석이 [[파리장서]] 사건으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자, 독립에 대한 생각이 더욱 커졌다. 그 뒤 그는 4월 26일 스승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노쇠한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http://www.blog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1341|#]] 당일 오전 10시경 부계면 동산리 남쪽 입구 도로에서 친구 홍장흠(洪璋欽, 1857 ~ 1925. 2. 25)[* 부림 홍씨 대율파-중파(仲派) 종손이다.]의 장남으로 구장(區長)을 지낸 홍연구(洪淵九, 1882 ~ 1965. 5. 17)가 인사를 하며 어디에 가시냐고 묻자, 진옥련은 홍연구에게 [[3.1 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스승 곽종석의 동정을 살피러 간다고 말하면서, "너는 친구의 아들이기에 믿음이 가는데, 이 지방의 독립운동은 어떠한가? 너도 이 마을에서는 원래 구장을 한 일이 있는 손꼽힐 만한 사람이니, 속히 마을 주민들을 규합해 시기를 골라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운동을 하여 함께 그 목적을 달성하자."고 권유하였다. 이에 홍연구는 "저는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얼마 후 이 사실을 파악한 일본 경찰은 위와 같은 말을 한 것으로 빌미삼아 진옥련을 체포했다. 그는 1919년 7월 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59&evntId=0034987763&evntdowngbn=Y&indpnId=000001904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이에 공소하여 그해 8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677&evntId=0034983715&evntdowngbn=Y&indpnId=000001527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어 결국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44년 11월 10일 별세하였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7년 5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군위군 출신 인물]][[분류:여양 진씨]][[분류:1860년 출생]][[분류:1944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