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파일:차기벽.jpg]] 車基璧, Cha, Ki Pyok [[1924년]] [[11월 28일]] ~ [[2018년]] [[6월 23일]]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민족주의]], 정치변동론 등을 연구하였다. [[경북대학교]] [[정치학과]] 및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기도 하다. == 생애 == [[1924년]] [[11월 28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다. 신의주동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학부/경영대학|경성경제전문학교]] 재학 중 [[학병]]에 징집되었다. 해방 후 [[상하이]]와 [[경상남도]] [[부산시|부산부]]를 거쳐 고향 용천군에 귀향하였으나 급격히 [[사회주의]]화 되는 이북의 현실에 질려 월남, [[1946년]] 6월 [[경성제국대학|경성대학]] 정치학과 편입 시험에 응시하여 1학년에 편입하였다.[* 이때 같이 옮긴 동기 중 [[김운태]]가 있는데, 그는 차기벽과 달리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 경성대학이 [[서울대학교]]로 통폐합되면서 [[1950년]] [[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정치외교학부|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로 졸업하였다. [* 학번으로는 46학번이다. 정치학과 동기로는 [[구태회]] 전 국회 부의장, 유정회 국회의원을 역임한 [[박준규(1926)|박준규]] 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교수, [[김용성(1924)|김용성]] 국회의원, 고등고시 양과 합격자인 의사 출신 변호사 [[전용성]] 등이 있다.] 학부 졸업 직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을 일시 중단한 그는 1950년 6월부터 1950년 10월까지 [[배재고등학교]], 1951년부터 1954년까지 [[계성고등학교(대구)|대구 계성고등학교]] 등지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1953년부터 1954년까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1954년 [[경북대학교 법과대학|경북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에 전임강사로 부임해 이후 [[조교수]], [[부교수]]로 승진했다. 교수 재직 중이던 1957년 [[미국 국무부|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클레어몬트 대학교|클레어몬트 대학원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유학을 갔고, 이듬해인 1958년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61년]]에는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부교수]]로 이직하여 이후 1990년 퇴임 시까지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 사이 1962년부터 1973년까지는 모교인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서울대학교/학부|문리과대학]], [[서울대학교 대학원|대학원]]에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1966년부터 1973년까지 성균관대학교 부설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1969년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 박사 학위 논문 : [[http://www.riss.kr/link?id=T179051|近代化의 理論과 方向 : 政治的 리더쉽을 中心으로]](근대화의 이론과 방향 : 정치적 리더쉽을 중심으로).]를 취득했다. 1973년에는 [[일본]] 국제교류기금의 초청으로 [[도쿄대학]] 법학부에 방문교수로 1년간 머무르기도 했다. 그는 정치학자로 활동하며 추상적인 민족의식 차원에서 벗어나 서구에서 논의되는 이론으로서의 [[민족주의]]를 본격적으로 국내 학계에 소개하였다. 1960년대에는 [[사상계]] 등에 권위주의화 되는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정권을 비판하는 논객으로도 활동하였으며, [[1965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민족주의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하면서, 민족주의가 권위주의 정권을 정당화하는 어용 이념으로 악용될 위험성을 경계하였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한국정치학회 회장,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성균관대학교 법정대학 학장 등을 역임하고 1981년 9월 [[독일]] 학술교류처(DAAD)의 초청으로 당시 [[서독]] 킬 대학에 방문교수로 3개월간 다녀오기도 했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재직하고, 1984년부터 1985년까지 1년간 도쿄대학 교양학부에 비상근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1989년]] [[3월 28일]]에는 [[대한민국 학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제5분과 회원([[비교정치]] 전공)으로 임명되는 등, 정관계로의 외도가 잦은 초기 정치학자들과 달리 학계의 원로로 꾸준히 남아 연구를 계속하였다. 1990년 [[정년퇴임]]한 뒤 [[노태우]]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2018년]] [[6월 23일]] [[https://www.yna.co.kr/view/AKR20180623041900005|별세했다]]. == 연구 == 전술하였듯이 [[민족주의]]를 이론으로서 본격적으로 소개, 전개한 대표적인 정치학자이다. 아울러 [[근대화]]와 정치발전, [[민주화]] 이론 등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초기에는 저서 『차근대화 정치론』(1969) 등에서 드러나듯 선근대화 후민주화라는 전통적인 근대화론의 입장에 서있었다면, 1970년대 말부터는 근대화와 민주화의 동시 진행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제창하였다. [[2007년]]에는 전집『차기벽 저작집』이 완간되었다. [[분류:대한민국의 사회과학 교수]][[분류:용천군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정치학자]][[분류:대한민국의 교사]][[분류:1924년 출생]][[분류:2018년 사망]][[분류:서울대학교 출신]][[분류:클레어몬트 대학원대학교 출신]][[분류:경북대학교 재직]][[분류:서울대학교 재직]][[분류:성균관대학교 재직]][[분류:실향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