爨習 (? ~ ?) [목차] == 소개 ==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촉한]]의 인물이자 [[이회(삼국지)|이회]]의 고모부. 익주 건녕군 유원현 사람으로 건녕현의 령을 지내다가 법령을 위반했는데, 찬습이 법을 어긴 것으로 인해 이회는 친척[* 이회에게 찬습은 고모부라 찬습에게는 아내의 형제자매의 아들에 해당되기에 이자(姨子)에 해당한다.]이라 연루되어 파면되었지만 찬습은 그 지방의 호족이라는 점을 고려해 [[동화(삼국지)|동화]]가 이 일을 불문에 부치면서 찬습은 사직되지 않았다. 당시 호족의 위세를 알 수 있다. 225년에 [[제갈량]]이 남쪽을 정벌할 때 등용되어 영군에 이르렀으며, 북벌 도중에 [[이엄]]이 거짓 보고로 제갈량을 모함하려다가 발각되었을 때 제갈량이 이엄을 탄핵해 제갈량이 상서대에 올린 공문에서 행참군편장군으로 언급되어 이엄을 해임하고 그의 관록, 절전, 인수, 부책 등을 없애 작위, 봉지 등을 박탈하는 것에 서명한 사람 중 한 명이다. == 가문(건녕 찬씨) == 찬습 자체는 그야말로 삼국시대의 단역급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찬씨성 자체는 나름대로 지역에서 알아주는 가문이기는 했던 모양인지, 이회전에는 찬습의 가문이 그 지역의 대성(大姓) 가문이라고 언급된다. 아마 건녕군 일대 토착 민족의 유력 호족이라거나 하는 정도의 위치였던듯. 건녕 찬씨 가문은 이후 [[진서]]와 [[화양국지]], [[송서]] 등에서 아름아름 건녕 찬씨 가문의 인물들(찬곡, 찬능, 찬송자 등)이 언급되긴 하지만 별 다른 활약상은 없었는데 [[성한]]이나 [[위진남북조]] 시절에 자사, 태수직을 몇 차롄가 맡으면서 기틀을 다져 독자적인 정권을 이뤄 [[수나라]] 때 그야말로 전성기를 누렸으며 찬씨왕조는 동찬(東爨) 오만(烏蠻)과 서찬(西簒) 백만(白蠻)으로 갈렸다가 오만은 [[이족]]의 시조가 되고, 백만은 [[바이족]]의 선조가 되었으며 백만에서 갈려나온 육조(六詔), 그리고 육조를 통일한 남조에게 멸망하였다. [[청나라]] 시대에도 [[청사고]]에서는 [[남조]] 왕실인 몽(蒙)씨와 나란히 [[운남]] 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언급하고 있다. >[[운남]]은 옛 전국(滇國)이다. 월휴(越巂)의 만이(蠻夷) 임귀(任貴)가 태수를 자칭하자 한나라 [[광무제]]는 곧 인수를 수여하였지만, 내지의 관리의 법식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찬(爨)씨이든, 몽(蒙)씨이든 모두 본토(本土)의 대성(大姓)으로, 누대로 관에 나아가 일방(一方)의 장(長)이 되었다. >---- >청사고 청나라 시대에도 건녕 찬씨는 남중 일대에서 손 꼽히는 위상의 가문으로 있었던 것. 건녕이라는 행정소가 운남(남중)이라는 지역에 포함되어 있으니, 청대에는 아마도 '건녕에 찬씨 가문이라고 오래된 가문이 있는데, 운남에서 알아주는 가문이라더라.' 정도로 인식됐던 것 같다. 건녕군을 분할해서 진녕군을 설치한다던가하는 식의 행정지역 개편도 있었던걸 보면 꼭 건녕에만 모여 살았을 것 같지도 않긴 하지만. 비록 [[남조]]의 [[국성]]인 몽씨나 [[대리국]]의 국성 단씨같이 [[크고 아름다운]] 제국으로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천년이 훌쩍 넘는 역사의 굴곡 속에서 꾸준히 지역 내에서 기반을 다진 성장형 토착 가문으로 역사에 영향을 주고 종적을 남겼으니 그야말로 굵고 짧은 왕조들보다 가늘지만 길게 간 지역 유지 끝판왕. == [[삼국지연의]] ==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유선(삼국지)|유선]]에게 위나라로 출병하는 북벌을 허락받아 유선의 조서를 받고 승상부로 돌아와 장수들을 불러 명령했는데, 그 명단에서 편장군으로 언급되었다. [[분류:촉한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