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봉모당'''}}}[br]{{{-1 昌德宮 奉謨堂}}}}}}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덕궁 규장각,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777년]] {{{-1 (창건)}}}[br][[1857년]] {{{-1 (이전 건립)}}}[br][[2004년]] {{{-1 (복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unggu.com/changdeokgung115_6.jpg|width=100%]]}}} || || {{{#gold ''' 봉모당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kYsls9SWEC8)] }}} || || {{{#gold '''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영상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s-5.2.2|창덕궁 궐내각사 구역]]에 있는 [[건물]]이다. [[창덕궁 규장각|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역대 [[임금]]들의 [[글]]과 [[글씨]], [[어진]], [[도장]], [[족보]], [[고명]], [[유고]], [[장지]] 등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 이름 == '봉모(奉謨)' 뜻은 '모훈(謨訓) 자료를 봉안(奉)한다'이다.[[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jsessionid=aj2um4L2SD6rpinOTFdaZrjD1vOzdMPLGXLtaKhpRjI66DYh432qelGUP0z1TKWw.cha-was02_servlet_engine1?newsItemId=155629255§ionId=ocp&pageIndex=12&pageUnit=10&strWhere=&strValue=&sdate=&edate=&category=&mn=NS_01_02|#]] 모훈은 ‘후대 임금들에게 귀감을 줄만한 교훈’이다. == 역사 == [[정조(조선)|정조]]는 즉위 직후인 1777년(정조 1년)에 [[창덕궁#s-5.4.1|창덕궁 후원]]에다 [[창덕궁 주합루|주합루]]를 짓고 그곳에 [[창덕궁 규장각|규장각]]을 두었다. 그리고 [[창덕궁 부용정|부용정]] 서북쪽에 있는 옛 열무정의 이름을 봉모당으로 바꾸고 선대왕들의 유품을 보관했다. [[규장각]]의 규모가 커져서 1781년(정조 5년)에 옛 오위도총부 자리에 규장각을 옮겼을 때도 봉모당은 자리를 지켰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봉모당.png|width=100%]]}}} || || {{{#gold ''' 《동궐도》의 봉모당. 열무정 시절의 모습이다. '''}}} || 그러나 공간이 좁아 많은 유품을 보관하기 힘들어지자, 1857년([[철종(조선)|철종]] 8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B%B4%89%EB%AA%A8%EB%8B%B9(%E5%A5%89%E8%AC%A8%E5%A0%82)|#]]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현재 봉모당 터.png|width=100%]]}}} || || {{{#gold ''' 《동궐도》에 나온 현재 봉모당 일대. 붉은색 원 안이다. '''}}} || 1908년([[융희]] 2년) [[규장각]] 기구를 분과별로 나누면서 봉모당 관련 일은 전모과(典謨課)에서 담당했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7%B4%EB%AC%B4%EC%A0%95(%E9%96%B1%E6%AD%A6%E4%BA%AD)|#]]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기존의 건물을 헐고 옛 소유재 터에 [[일식|일본식]] [[건물]]을 새로 지어 [[족보]] 종류를 뺀 [[왕실]] [[자료]]를 보관했다.[* [[족보]]는 새 건물 보각(譜閣)을 지은 후 그곳에 보관했다.] [[8.15 광복]] 이후 1969년 7월에 일본풍 [[전각]]을 철거하고 자료를 분산 배치했는데 그 중 일부는 [[창경궁]] 장서각에 두었다. 그리고 1981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옮겼다.[[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jsessionid=aj2um4L2SD6rpinOTFdaZrjD1vOzdMPLGXLtaKhpRjI66DYh432qelGUP0z1TKWw.cha-was01_servlet_engine1?newsItemId=155629255§ionId=ocp&pageIndex=12&mn=NS_01_02&strWhere=&strValue=&sdate=&edate=|#]] [[문화재청]]에서 2000년 ~ 2004년에 [[복원]]했고 2005년부터 일반에 개방하여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1층[*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으로 표현한다.] [[목조]] [[건물]]로 남향(南向)이다. * 장대석 2단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단 상부에는 [[벽돌|전돌]]을 깔고 기단 앞에는 댓돌을 3개 두었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초익공[* 창방과 직접 만나 보를 받치는, 쇠서(소 혀 모양의 자재)를 두 겹으로 낸 공포.]이다. 창방과 장여 사이에 소로를 두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용두]]는 용마루 위에 2개, 추녀마루 위에 2개 올렸다. 지붕 측면의 합각은 나무판으로 마감했다. *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이다. 전체 실내 바닥에 [[마루]]를 깔았다. * 정면 외면에는 띠살[[문]]을 달았다. 교창과 머름은 없다. 나머지 칸 외면은 전부 중인방을 두고 위, 아래를 [[벽]]으로 마감한 형태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dapsa.kr/2012_09_21-P9214264.jpg|width=100%]]}}} || || {{{#gold ''' 봉모당 북쪽 책고[* [[http://www.dapsa.kr/blog/?p=1283|사진 출처.]]] '''}}} || 봉모당 서쪽과 북쪽에 각각 [[책]]을 보관하던 책고가 있다. 책고는 맞배지붕에 홑처마, 민도리 양식이며 출입문과 교창을 제외하고 전부 붉은 나무판으로 벽을 마감했다. 고막이벽 가장자리에는 구멍을 뚫어 환풍 기능을 하게 했다. 《동궐도형》을 보면, 두 책고 다 6칸이었으나, 지금은 아래의 향나무로 인해 복원할때 서쪽 책고가 5칸으로 한 칸 줄었다. == 향나무 (천연기념물 제194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봉모당 향나무.png|width=100%]]}}} || || {{{#gold ''' 봉모당 향나무[* [[https://www.k-heritage.tv/brd/board/256/L/CATEGORY/614/menu/253?brdCodeField=CATEGORY&brdCodeValue=614&bbIdx=5134&brdType=R&tab=|사진 출처 - 문화유산채널: 문화유산칼럼 〈조선왕조 500년을 함께 한 창덕궁 향나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향나무.png|width=100%]]}}} || || {{{#gold ''' 《동궐도》의 봉모당 향나무. 초록색 원 안이다. '''}}} || 봉모당 마당에 [[향나무]]가 있다. 그러나 현재 일반인이 봉모당 마당으로 들어갈 수 없는 관계로, 창덕궁 후원 관람의 마지막 [[코스]]로써 볼 수 있다. 수령을 700년 ~ 750년 정도로 추정한다고 한다. 추정이 맞다면 무려 '''[[조선]] 건국 이전부터 살아있는 나무'''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8년 3월 4일에 [[천연기념물]] 제194호로 지정한 후 보호하고 있다. [[나무]]의 모양이 일반 나무들처럼 곧게 뻗지 않고, 구부러져있다. 높이는 6m, 뿌리부분 둘레는 5.9m, 가슴높이 둘레는 4.3m이다.[* 원래는 높이 12m, 뿌리부분 둘레는 6.8m이었다.[[https://www.k-heritage.tv/brd/board/256/L/CATEGORY/614/menu/253?brdCodeField=CATEGORY&brdCodeValue=614&bbIdx=5134&brdType=R&tab=|#]]] [[가지]] 역시 위가 아닌 수평으로 뻗어있다. 동서남북으로 1개 씩 뻗었는데, 동서길이 11.5m, 남북길이 5.5m이다. 단, 북쪽 가지는 현재 죽었고 남쪽 가지는 잘렸으며[[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5391|#]][[http://m.blog.daum.net/kheenn/15853832|#]], 동쪽 가지는 꼬불꼬불하다. 2010년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손상을 입었다. [[향나무]]의 윗부분이 반 정도 꺾이고 [[가지]] 일부도 부러졌지만, 다행히 나무 자체는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 부러진 가지는 [[왕실]] [[제사]] 때 향피우는 용도로 사용한다고 한다.[[https://www.k-heritage.tv/brd/board/256/L/CATEGORY/614/menu/253?brdCodeField=CATEGORY&brdCodeValue=614&bbIdx=5134&brdType=R&tab=|#]] [[분류:창덕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