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380년 출생]][[분류:1390년 사망]][[분류:개성시 출신 인물]][[분류:고려 국왕]][[분류:몽골계 한국인]][[분류:폐위된 군주]][[분류:참수된 인물]]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백제 위덕왕의 이칭 창왕(昌王), rd1=위덕왕)] [include(틀:역대 고려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창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고려의 왕자/선종 ~ 공양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제33대 국왕[br]{{{+1 창왕 | 昌王}}}'''}}} || || '''출생''' ||[[1380년]] ([[우왕]] 6년) [[9월 14일]][* [[9월 6일]]이라는 설도 있다.] || || '''즉위''' ||[[1388년]] [[7월 20일]] [* 고려의 국왕중 '''7세'''에 '''최연소'''로 왕위에 올랐다. 즉, 오늘날로 따지면 '''유치원생'''의 최연소로 대통령이 된 셈 이다.] || ||<|2> '''사망''' ||[[1390년]] [[1월 8일]][* [[1389년]] [[12월 31일]]이라는 설도 있다.] (향년 9세)[* 고려뿐만 아니라 역대 한국사 왕들 중 가장 [[단명]]한 왕이다. 즉, 오늘날로 따지면 '''초등학교 2~3학년'''의 나이에 단명한 셈이다.] || ||[[고려]] [[강화군|강화부]] 유배지[br](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제25대 충렬왕 때 '양광도 강화현'으로 강등됐지만 제32대 우왕 때 '강화부'로 승격되었다.] || || '''능묘''' ||미상 || ||<|2> '''재위기간''' ||'''{{{#670000 제33대 국왕}}}''' || ||[[1388년]] [[7월 20일]] ~ [[1389년]] [[12월 9일]] (1년 4개월)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개성 왕씨]][* 창왕이 왕씨 핏줄이 아니라 [[신돈]]의 씨앗이라는 것은 조선 건국 세력의 주요 명분이었으므로, 조선 500년 내내 ''''신창''''으로 지칭되었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도 '신창'이라고 써 놨다. 조선이 멸망하고 창왕이 왕씨냐 신씨냐 논의가 자유로워진 현대에도 신(辛)씨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긴 하나, 이는 이성계를 비롯한 신진사대부 일파의 왜곡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19230&cid=40942&categoryId=33382|두산백과]]와 [[https://ko.wikipedia.org/wiki/고려_창왕|위키백과]]에도 창왕의 본명을 '왕창'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는 선대 군주인 우왕 역시 마찬가지이다.] || || '''휘''' ||창(昌)[* 이때문에 [[수창궁]]을 잠시 [[피휘]]하여 수창궁을 일시 '수령궁'(壽寧宮)으로 개칭하고, 대비 이씨를 옮겼다.][* [[백제]] 제27대 군주인 [[위덕왕]] 부여창과 휘가 같다.] || || '''부모''' ||부왕 [[우왕]][br]모후 [[근비 이씨]] || || '''형제자매''' ||[[외아들]] || || '''왕호''' ||'''창왕(昌王)'''[* '창왕'은 후대에 붙여진 왕호로, 이름인 '창'에다 '왕'을 붙인 것이다.] || || '''별호''' ||후폐왕(後廢王) || || '''사시''' ||윤왕(允王)[* 고려 유학자들이 부른 사시. 참고로 이 '윤'이라는 한자에는 '맏아들'이라는 뜻 외에도 '진실되다, 참되다, 마땅하다, 합당하다' 등의 좋은 뜻이 있다.]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제33대 군주. == 생애 == 아버지 [[우왕]]이 [[위화도 회군]]으로 폐위되자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모후인 [[근비 이씨]]가 실각한 [[이인임]]의 족질녀로[* 이인임의 고종사촌 [[이림(고려)|이림]]의 딸. 애초에 근비가 [[우왕]]의 왕비가 된 이유도 족질녀를 왕비로 보내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할려는 이인임의 의도였다.] 원래는 아버지의 폐위와 함께 폐세자될 운명이었으나 [[태조(조선)|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조민수(고려)|조민수]]와 [[이색(고려)|이색]]의 주도로 옹립됐다. 하지만 곧 조민수가 실각하고 이색도 실권이 없었던터라 뒷받침할 세력이 없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창왕의 치세 1년 동안 [[토지]] 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 시도가 있었으나 [[정도전]] 등을 위시한 [[신진사대부]]들의 개혁안이었고, 창왕은 그럭저럭 왕좌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조민수가 [[탄핵]]되고 이색이 [[이숭인]]의 탄핵을 계기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즉위 원년에 이미 지지 세력을 모두 잃어버렸다. 짧은 치세 동안 군사적으로는 제법 큰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박위]]의 [[쓰시마 섬]] 정벌'''이었다. 이 원정에서 박위는 전함 100척을 인솔하여 쓰시마 섬을 원정해 [[왜구]]의 배를 무려 300척을 불태우는 대공을 세우고 개선했다. 훗날 [[세종(조선)|세종]] 때 이루어진 쓰시마 원정이 속사정을 알고 보면 의외의 고전이었던 반면에 이 원정의 전과는 대단한 편이었다.[* 다만 왜구의 준동을 완전히 막아버렸다는 역사적 의의를 보자면 세종 때의 원정이 크다고 볼 수 있는데 박위가 비록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세종 초기까지도 왜구의 준동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고려 말에 비하면 세종 때는 조선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일본]]도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가 안정되어 왜구가 많이 뜸해졌기에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를 단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박위는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이끈 인물이었고 당시 창왕은 실권이 없었으므로 창왕의 업적이라 하기는 어렵다.[* 한편 박위는 창왕 폐위에도 주도적으로 나서서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었으나 훗날 [[1차 왕자의 난]] 때 [[궁궐]]의 경비를 맡다가 살해당했다.] 우왕 폐위 후 [[사돈]]인 정창군 왕요를 즉위시켜 공손히 선위받는 그림을 그렸던 이성계는 홀로 남겨진 어린 왕을 밀어낼 빌미를 노리고 있었다. 1389년 11월 '''[[김저]]와 [[정득후]]의 우왕 복위 사건'''이 터지자 결심을 굳힌 이성계는 창왕을 몰아내기 위해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우창비왕설>'''을 들고 나왔다. 우왕의 출생에 대한 뒷소문 자체는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우왕의 뒤를 이어 창왕이 즉위한데서 알 수 있듯 '<우창비왕설>'은 적어도 우왕이 폐위될 때까지는 소문에 불과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공식화된데는 창왕을 폐위시킬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왕이야 실정을 명분으로 내쫓을 수 있었지만 겨우 8세에 왕이 된지 1년 남짓인 창왕은 그럴 수가 없으니 혈통 자체를 부정한 것이다. 우왕은 폐왕의 지위까지 빼앗겼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도 신돈의 손자라는 명분으로 폐위당하고 만다. 폐위된 뒤엔 [[강화도]]로 쫓겨났다가 [[강릉시|강릉]]에 [[유배]]되어 있던 아버지 우왕과 함께 [[공양왕]]에 의해 처형당했다.[* 의외로 당시 이성계는 주위의 보는 눈 때문에 우왕과 창왕의 신변 처분을 미루려고 했었다. 오히려 공양왕이 이들을 빨리 처리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결국 공양왕의 뜻대로 창왕은 폐위된 지 1개월여 만에 아버지와 함께 처형된 것이다.] 보통 [[사극]]에서는 [[사약]]으로 사사당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칼에 목이 베여[* 《[[고려사]]》 원문에도 우왕과 창왕의 죽음에 모두 '誅'(벨 주)자를 쓰고 있다.] 사망했다. 죄인으로 몰려 처형당했기에 무덤에 관한 기록은 전무하며, 무덤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다른 역사의 여러 폐주들과 달리 창왕은 조선 건국 세력에 의해 반역자인 신돈의 손자로 간주당해 처형되었으므로 무덤에 제대로 안장되었을지도 의문이다. 아버지인 우왕과 함께 역적의 시신으로 간주해 들판에 버려진 채 방치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당시 백성들도 창왕을 불쌍하게 여겼으므로 엄흥도의 사례와 비슷하게 무덤을 만들어 주었을 가능성은 있다.] 이 때 창왕의 나이는 만 9세, 세는나이로 10세였다. 폐위된 후부터 신진사대부 일파에 의해 신돈의 손자라는 의미에서 '신창'(辛昌)으로 불렸다. 창왕은 우왕의 아들이지만 우왕이 [[여말선초]]를 거쳐 신돈의 아들로 취급되면서 창왕 역시 신돈의 손자로 취급되었다. 이후 《[[고려사]]》와 《[[동국통감]]》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작성된 서적들에는 '신창'이라는 이름으로 <[[반역]] 열전>에 실렸다. 따라서 시호도 받지 못했고 오늘날 '창왕'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냥 휘호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 개국의 명분인 '''<폐가입진론>'''[*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 '<우창비왕설>'[* 우와 창은 왕씨가 아니다.]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폐가입진론>은 조선 건국의 주된 명분 중 하나였으므로 조선시대 500년 내내 비판할 수 없었다. 이걸 비판하는 건 당장 이 나라에서 군림하는 왕실의 존립 근거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를 전후해 조선의 식자층 사이에서도 <폐가입진론>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중환의 경우 《[[택리지]]》에서 우왕이 죽으며 고려 왕족은 '''용의 후손'''이라 겨드랑이에 용의 비늘이 있는데 너희가 나를 왕씨가 아니라 하니 그럼 내 겨드랑이를 살펴보라 하여 살펴보았더니 용의 비늘이 있었다는 설화를 실으며 기이하다는 중립적인 평가를 남겼다.] 물론, 조선 후대의 식자들이 <폐가입진론>을 비판했다고 해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태조 이성계의 행적은 천명에 순응하는 것이었으나, 정도전 등이 무리하게 <폐가입진론>을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선이 멸망하여 역사 연구가 자유로워진 현대 한국 사학계에서는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주장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고, 우왕이 왕씨 혈통을 지닌 [[공민왕]](제31대)의 아들이라고 보는 의견이 대세이므로 창왕 역시 왕씨 혈통을 지녔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 기타 == * 창왕은 똘똘하고 영특했다고 《[[고려사]]》 기록에 전해졌다. 다만 [[단종(조선)|단종]]이나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과 달리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아 별로 동정받지 못하고 있다. 단종은 [[숙종(조선)|숙종]] 대에 이르러, 그리고 영창대군은 [[인조반정]]을 통해 신원이 된 데 비해서 창왕은 신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단종과 영창대군은 군주와 왕족인 것은 둘째치고 각각 제5대 [[문종(조선)|문종]]과 제14대 [[선조(조선)|선조]]의 적통이었다는 [[정통성]]이 있었던 반면 창왕은 [[조선]] 왕조의 창업 세력 입장에서는 반대 세력인 이색과 조민수 세력에 의해 옹립되었고, [[신돈]]의 손자일 수 있다는 이유로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고려의 군주라서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시대때 당연히 복권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충선왕]] 이래 고려 왕조의 마지막 [[한몽혼혈|한•몽 혼혈]] 군주이다. 다음 왕인 [[공양왕]]은 [[원 간섭기]] 이전의 군주인 제20대 [[신종(고려)|신종]]의 직계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충선왕 이후 직계는 몽골 왕후의 피가 직간접적으로 섞여있다.] == 대중매체에서 == [[드라마]]에서는 실제 인물의 당시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역 배우들이 연기한다. 본래 역사서에는 주살(誅殺)당했다(칼을 맞고 죽었다)고 쓰여 있고, 죄목이 왕위를 참칭한 역적이었던 만큼 [[사약]]을 내릴 이유가 없지만 대부분 드라마에서는 우왕은 베어 죽여도 창왕은 사약을 받아 죽는 것으로 묘사하거나 처형 장면을 묘사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창왕이 죽었을 때 10세밖에 안 된 어린 소년이었기에 어린아이를 칼로 베어 죽이는 것을 차마 영상으로는 묘사할 수 없어서 순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태종 이방원>에서 처음으로 주살당하는 묘사가 나왔다. 어린 나이에 정쟁에 휘말려 왕위에 올랐다가 폐위당하고 참혹하게 죽었기 때문인지 평가가 갈리는 [[우왕]]과 달리 창왕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정적인 반응이 우세하다. * 1983년 [[KBS]] 드라마 <[[개국(드라마)|개국]]>에서는 아역 배우 강태호가 연기했다. [[역사]]대로 유배지에서 주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주살 장면은 묘사되지 않는다.]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아역 배우 윤동원[* [[예명]]은 서후.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어린 [[견양검]] 역.]이 연기했다. [[조선]] 건국까지 빠르게 진행하는 만큼 초기 몇 화만 등장한다. 관료들과 조정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하품을 하거나 귀를 후비는 등 무능한 군주였음을 묘사하는 장면도 있으나 애초에 철없는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하거니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기에 그런 모습이 부각되지는 않는다. 4회에 폐위되는데 굴욕적이게도 병사들이 폐위된 그를 한 팔로 덥석 집어들고 나온다. 이후 [[공양왕]]이 즉위하자 사사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죽음의 공포 앞에 떠는 어린 폐주의 입을 강제로 벌려 사약을 들이부어 죽인다. 이후 우왕이 그 소식을 듣고 "그 어린 것마저 살려두지 않았단 말인가... 하긴 살려둘 리가 있겠는가."라고 독백하고는 윗옷을 벗어 겨드랑이에 나 있는 용의 비늘을 보여준 뒤 사약을 먹고 따라 죽는다. [[이성계(용의 눈물)|이성계]]가 죽기 전 꾼 꿈에서는 먼저 죽은 사람들 중 1명으로 나타나 조용히 독기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는 아역 배우 김준성[* 팬들 사이에서도 창왕 역할을 맡은 아역 배우의 연기력에 대한 논란은 있었지만 [[이성계(정도전)|이성계]], [[정도전(정도전)|정도전]], [[남은(정도전)|남은]], [[조준(정도전)|조준]], [[윤소종(정도전)|윤소종]], [[이방원(정도전)|이방원]] 등 무서운 신하들 사이에서 눈치나 봐야 하는 어린 창왕을 가여워하는 반응이 대다수. 비슷하게 발연기로 유명했던 [[이방석(정도전)|이방석]]과는 딴판이다. 창왕은 원치도 않았던 왕좌에 억지로 올라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죽었지만 이방석은 올라서는 안 되는 자리에 올라 마치 자기 것인마냥 기세등등했다.]이 연기했다. 왕자 시절에 첫 등장했을 때에는 [[이인임(정도전)|이인임]]을 "할아버지"라 부르면서 어린 시절의 [[우왕(정도전)|우왕]]처럼 이인임을 크게 믿고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이 폐위되자 [[조민수(정도전)|조민수]]와 [[이색(정도전)|이색]] 등에 의해 추대되어 즉위하기는 했지만 너무 어린데다[* 확실하게 생몰년도가 남아 있는 군주들만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창왕과 비슷하거나 더 어린 나이에 즉위한 군주들은 [[고구려]]의 [[태조왕]], [[신라]]의 [[진흥왕]], [[고려]]의 [[충목왕]], [[조선]]의 [[헌종(조선)|헌종]] 정도 밖에 없다. 이 군주들은 모후를 따르는 사람들의 세력 기반이라도 탄탄해서 어린 군주를 지켜줄 수 있었지만 창왕은 아니었다.] [[권신]]들의 편의에 맞춰 옹립된 군주인지라 결국 허수아비 임금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결국 역사대로 폐가입진의 논리를 앞세운 [[정몽주(정도전)|정몽주]][* 정몽주는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했을뿐 우왕과 창왕을 끌어내리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에는 적극 찬동했던 [[흥국사]] 9공신 중 한 명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원래는 창왕의 선위를 도모했던 이성계 일파에게 근비와 정비의 부탁을 받고 이성계를 설득하러 간 정몽주가 폐가입진을 앞세워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정창군 왕요]]를 옹립할 것을 건의해 방향을 바꾼 것으로 되어 있다. 정몽주만 믿었던 정비와 근비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찍힌 셈이다. 그래서인지 극 중에서 결국 정몽주는 편전으로 군사를 몰고 들어가 어린 창왕과 근비를 끌어내린 뒤, 홀로 텅 빈 편전에 털썩 주저앉아 통한의 눈물을 삼키며 괴로워하는 장면이 나온다.]에 의해 폐위당한 뒤 [[유배]]지에서 사약을 마시고 쓰러지는 장면을 끝으로 극에서 퇴장한다.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고려 군주의 비중이 적은 작품이다 보니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 [[이색(고려)|이색]]과 [[조민수(육룡이 나르샤)|조민수]]에 의해 왕위에 옹립됐을 때 첫 등장해 [[이인겸]]을 복귀시키겠다고 선언해 [[이성계(용비어천가 시리즈)|이성계]]를 서늘하게 했다. 이후 등장은 [[정몽주(용비어천가 시리즈)|정몽주]]의 보고를 받을 때 다음에는 우왕이 주도하고 [[무명(용비어천가 시리즈)|무명]]이 숟가락을 얹은 이성계 암살 계획의 책임으로 귀양을 가는 장면이다. 초반 빼고 나머지 등장한 두 장면 모두 대사없이 아이 특유의 서럽게 펑펑 우는 장면만 나왔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드라마)|태종 이방원]]>에서는 아역 배우 [[기은유]][* 2021년 [[tvN]]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서 장영국([[인교진]] 분)의 아들 장이준 역.]가 연기했다. 32부작 특성상 짧게 등장하다 폐위당한 뒤 유배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다 후임인 공양왕의 명에 의해 처형당하는데, 창왕이 나온 드라마들 중에서 처음으로 주살당하는 묘사가 나왔다. 창왕의 처형 장면은 어린아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울먹이다가 눈을 꼭 감은 채 칼에 베여 유모 품에서 숨을 거두는 걸로 참혹하게 연출되었다.[* 그나마 어린아이라 그런지 우왕과는 달리 단칼에 비교적 편히 죽었으며 잔혹한 묘사도 덜하다.] 아무리 폐위된 군주라지만 어린아이를 잔혹하게 죽였다보니 [[이성계(태종 이방원)|이성계]]의 문객들은 물론 백성들도 대놓고 이성계를 비난하는 등, 우왕과 창왕의 주살로 인해 이성계 일파가 민심을 잃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 이러한 창왕의 죽음과 그 여파는 [[이방원(태종 이방원)|이방원]]이 정적의 숙청에 관해 신중을 기하는 계기가 될 정도.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개국 편에서 등장하는때 비중이 거의 병풍 수준이다.[* 어느 정도냐면 창왕의 대사가 “조시중을 삭탈 관직하고 유배형에 처하노라.”만 있을 정도.] [[조민수(고려)|조민수]]와 [[이색(고려)|이색]]이 대비의 힘을 빌려서 우왕의 자식인 자신을 왕위에 앉히는 걸로 첫 등장. 이후 조민수의 관직을 삭탈하고 유배 보내졌으며 [[김저]]가 반역모의를 실토할 때 창왕이 거론되면서 창왕은 9살의 나이에 [[우왕|자신의 아버지]]의 첫 유배지인 강화로 유배보내졌다. 이후 [[공양왕]]이 즉위하면서 우, 창을 베라고 지시하자 10살의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목이 베어지면서 등장종료. 이후 태조, 정종실록에서 정종이 고려 왕들을 되돌아보면서 공민왕, 우왕, 공양왕과 함께 엑스트라로 등장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고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