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채송대}}}'''[br]'''蔡松大'''}}}}}} || || '''자 / 호''' ||성안(聖顔) / 난정(蘭汀) || || '''본관''' ||[[채(성씨)|인천 채씨]][* 소감공파(少監公派)-양전헌공파(兩傳軒公派) 28세 희(熙) 항렬. 족보명은 채희복(蔡熙復).] || ||<|2> '''출생''' ||[[1896년]] [[11월 20일]][* 음력 10월 16일.] ||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내동[br](현 [[대구광역시]] [[동구(대구)|동구]] [[공산동|내동]])[*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미대동을 본적지 내지 출생지로 기록하고 있으나,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79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5858&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당시 수형인명부]]에는 미대동을 본적지로, 내동을 출생지로 기록하고 있었다.] || || '''사망''' ||[[1966년]] [[3월 22일]][* 인천채씨대동보 3권 303쪽에는 1965년 4월 25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189호 || || '''상훈'''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채희각]]은 그의 친형[* 채송대가 이후 첫째 숙부 채효식(蔡孝植, 1879. 7. 14 ~ 1959. 1. 1)에 입양되면서 족보상으로는 사촌 형이 되었다.]이며, [[홍연흠]]은 그의 고모부, [[홍묵]]은 그의 손위 처남이다.[* 채송대의 부인 [[홍(성씨)|부림 홍씨]](1898. 6. 20 ~ ?)는 홍기순(洪祺舜, 1858 ~ 1948)의 장녀로, 홍묵은 부인 부림 홍씨의 오빠이다.] == 생애 == 1896년 11월 20일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내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내동)에서 아버지 채규식(蔡奎植, 1873 ~ 1903. 12. 19)과 어머니 [[성주 도씨]](? ~ ?. 6. 20)[* 도응호(都應浩)의 딸이다.]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첫째 숙부인 채효식(蔡孝植, 1879. 7. 14 ~ 1959. 1. 1)에 입양되었으며, 이후 대구군 해북촌면 [[공산동|미대동]]으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조선 각 지방에서 발발한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격문을 살포,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00302010000237|#]] 그해 4월 28일 밤 10시에는 [[권재갑]]·[[채갑원]]·[[채경식]]·[[채명원]]·[[채봉식]]·[[채학기]]·[[채희각]] 등 7명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의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그날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50&evntId=0034987185&evntdowngbn=Y&indpnId=000001851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아]] 곧 항소하였으나 5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3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2437&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공소가 취하되어]], 결국 원심 판결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66년 3월 22일 별세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대구광역시 동구 내동에 안장되었다가 2017년 7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인천 채씨]][[분류:동구(대구) 출신 인물]][[분류:1896년 출생]][[분류:1966년 사망]][[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