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채학기}}}'''[br]'''蔡鶴基'''}}}}}}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채학기.jpg|width=100%]]}}} || || '''자 / 호''' ||내문(乃聞) / 우고(于皐) || || '''본관''' ||[[채(성씨)|인천 채씨]][* 소감공파(少監公派)-영모재공파(永慕齋公派) 29세 기(基) 항렬.] || ||<|2> '''출생''' ||[[1901년]] [[1월 6일]][* 인천채씨대동보 4권 47쪽에는 2월 25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미대동[br](현 [[대구광역시]] [[동구(대구)|동구]] [[공산동|미대동]][* 인근의 지묘동과 함께 [[채(성씨)|인천 채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채갑원]]·[[채경식]]·[[채명원]]·[[채봉식]]·[[채희각]] 등도 이 마을 출신이다.] 222번지) || || '''사망''' ||[[1987년]] [[3월 20일]] || || '''상훈'''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01년 1월 6일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미대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222번지)에서 아버지 채병대(蔡炳大, 1880. 7. 19 ~ 1960. 6. 27)와 어머니 [[벽진 이씨]] 이원대(李元大, ? ~ ?. 5. 11)[* 이승재(李承載)의 딸이다.] 사이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5촌 당숙 채병용(蔡炳容, 1879. 2. 26 ~ 1920. 3. 7)에 입양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채학기는 22촌 지간의 족조(族祖) [[채갑원]]과 자주 접촉하며 국권회복에 대해 논하고 그 의지를 다지곤 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조선 각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채갑원 등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자금을 마련, [[대구향교]]의 유림들을 선동하여 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앞장서서 궐기하기로 결의하였다.[[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30301.010350826160001|#]] 그리하여 그는 4월 26일 채갑원의 집에서 채갑원·[[채봉식]]·[[채희각]]과 함께 전국적인 추세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짧은 격문을 살포하면서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 날 밤 10시에 앞서 세 사람들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틀 뒤 28일에는 밤 10시에 [[권재갑]]·채갑원·[[채경식]]·[[채명원]]·채봉식·[[채송대]]·채희각 등 7명과 함께 같은 장소에 올라가 한국독립만세를 외치고 곧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50&evntId=0034987182&evntdowngbn=Y&indpnId=000001851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아]] 곧 항소하였으나 5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3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2435&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공소가 취하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에는 교육사업에 참여하여 1953년 7월 [[공산중학교|재단법인 공산학원]]이 설립되자 초대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1987년 3월 20일 별세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인천 채씨]][[분류:동구(대구) 출신 인물]][[분류:1901년 출생]][[분류:198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