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백제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6b6b, #008080 20%, #008080 80%, #016b6b)" {{{#fbe673 '''책계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백제의 왕자)] ---- [include(틀:고이왕계 왕실)]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6b6b, #008080 20%, #008080 80%, #016b6b); color: #fbe673" '''백제 제9대 어라하[br]{{{+1 책계왕 | 責稽王}}}'''}}} || ||<|2> '''출생[br]{{{-3 (음력)}}}''' ||연대 미상 || ||[[백제]] [[위례성]][br](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일대]]) || ||<|2> '''사망[br]{{{-3 (음력)}}}''' ||[[298년]] [[9월]] || ||[[백제]] [[위례성]][br](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일대]]) || || '''능묘''' ||미상 || ||<|2>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제9대 어라하}}}''' || ||[[286년]] [[11월]] ~ [[298년]] [[9월]] {{{-2 (11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부여(扶餘) / 우(優)(?) || || '''휘''' ||책계(責稽) · 청계(靑稽) / 청체(靑替)[* 《[[삼국유사]]》.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도 오기라 했다.] || || '''부왕''' ||[[고이왕]] || || '''왕후''' ||보과부인[*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 대방왕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대방이라는 '''나라''' 또한 사서에 언급자체가 없는 수준이다. 그냥 대방군 태수의 존칭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씨낙랑국]]처럼 막 대방군의 영향에서 벗어난 나라일 수도 있다.] || || '''왕자''' ||[[분서왕|분서]] || || '''신장''' ||약 165cm 이상[* 삼국시대 평균키가 [[https://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2016283|165cm]]였는데 책계왕의 외모에 대한 기록에서 체구가 장대하고 키가 컸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책계왕의 키는 165cm 이상으로 추정된다.] || || '''왕호''' ||'''책계왕(責稽王)''' ||}}}}}}}}}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방은 우리 장인의 나라이다. 그 요청을 돕지 않을 수 없다.” >“帶方, 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 >대방의 구원 요청을 받은 후 남긴 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발췌 [[백제]]의 제9대 군주이자 [[건길지]]. 제8대 [[고이왕]]의 장남. 체구가 장대하고 키가 컸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한다. == 생애 == 286년(책계왕 1), 허물어진 [[위례성]]을 수리했다. 이후 [[고구려]]의 [[서천왕]]이 대방군을 공격할 때 책계왕은 대방왕의 [[딸]] 보과를 [[아내]]로 삼은 상태였기 때문에 대방왕은 [[사위]]인 그에게 구원군을 요청했고, 책계왕은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맞붙은 첫 번째 기록으로 책계왕의 대방군 구원 때문에 백제는 고구려와의 사이가 나빠졌다. 책계왕 이전까지 백제는 [[부여]]와 고구려에서 분할되어 나온 [[나라]]였으므로 동류 의식이 있어서 직접 충돌은 자제해 왔는데 [[중국]] [[한족]](漢族)의 지배를 받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예맥-한인(韓人)의 혼합계열 [[국가]]인 백제와 [[예맥]]계 [[국가]]인 고구려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으니 직접 충돌할 사안도 별로 없었다. 책계왕이 죽고 17년 후인 315년 [[미천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키면서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을 맞대게 되자 양국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했는데 어쩌면 책계왕의 이 사건은 17년 후 고구려와 백제 관계의 [[프로토타입]]일 수 있다. 287년(책계왕 2년), 음력 1월에 동명묘에 참배했다. 책계왕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阿且城)[* 지금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성]].]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였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책계왕- 대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같은 해 <고구려본기> -[[서천왕]]- 대에는 기록이 없다. 그 해는 서천왕 17년으로 [[일우]]와 [[소발]]이 모반하였으므로 그런 여유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역사학자 [[이병도]]는 "당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낙랑이 개재(介在)하였으므로 이는 불가능하다"고 했고 "미천왕 15년에 대방군을 공격하였으므로 백제 [[비류왕]] 11년의 일이 옳은 이치"라 보았다. 그 외에 타국의 군사를 고구려의 군사로 착각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근데 사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예조'를 보면 [[강원도]] 지역의 [[동예]]가 늦어도 3세기 중반에 고구려에게 복속되어 있었으므로, 아마 고구려에게 복속된 강원도 지역을 통해 백제와의 접촉이 있었을 수 있다. 애초에 낙랑이 막아서 고구려와 백제가 접촉을 못하고 있었다면 백제와 똑같이 남쪽에 있는 대방은 어떻게 침공했겠는가.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爲敵兵所害薨 >13년 가을 9월에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298년 한군(漢軍 : 낙랑의 [[군대]])과 맥인(貊人 : 동예로 추정됨.)의 침입에 책계왕 본인이 친히 맞서 싸우다가 적병에게 피살되어 전사했다. 위의 기록에서 한군은 당시 [[중국]]의 [[서진]] 제국을 말하는데 중앙 정부 차원에서 백제를 침공했다기보다는 낙랑군 [[태수]]의 판단으로 추정되고 있다. 맥인은 고구려를 의미하는 [[단어]]로 많이 쓰였지만 이 시대 [[한사군]]이 고구려를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예로 [[해석]]하는 편이다. 사실 이 무렵은 강원도 춘천 일대에 [[맥국]]이 있었다고 전하는 등 예맥족 소국들이 여기저기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상한 건 아니다. == 기타 == * 가뜩이나 [[기록]]이 적은 백제의 군주들 중에서도 특히 기록이 적은 군주들 중 한명이다. 재위 기간이 13년이나 되지만 기록이 대단히 짧다. 특히 287년 동명묘 참배 이후 298년 왕이 사망할 때까지의 '''12년 동안 기록이 없다.''' 또한 책계왕이 대방태수의 딸인 보과와 언제 [[결혼]]했는지조차도 불명이다. 대방태수의 딸과 결혼한 것은 고이왕 대에 낙랑군을 공격했던 것 때문에[* 낙랑태수 [[유무]]가 침략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하자 고이왕은 잡아왔던 낙랑의 [[백성]]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대방태수와 [[정략결혼]]하여 화근을 덜어보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중국 한사군인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왜 사이가 나쁜지는 당시 중국이 삼국시대 혼란기에 [[조위]]도 내리막을 걷던 시절이라 변방의 군현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고 추정해볼 수도 있다. 문제는 책계왕 재위 후반부쯤 되면 중국에서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가 끝나고 서진이 등장해 이후 한사군 세력이 다시 [[부활]]해 반격을 시작한다는 점인데 책계왕이 [[목숨]]을 잃은 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추정된다. * [[풍납토성]]의 최초 개축 시점이 책계왕의 재위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고고학]]적 시료 분석이 있다. 분석 [[과학]] 제25권 제5호 2012.10 《OSL 연대 측정을 통한 풍납토성 축조 연대 산출이란 자료》는 풍납토성의 축조 연대 편년을 위해 각 [[토기]] 시료의 OSL 연대와 고고학적 맥락, 14C 연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풍납토성의 초축 시점을 294 ± 52 yrs AD (1σ SE), 제 III 단계 증축을 328 ± 30 yrs AD (1σ SE), 최종 [[성벽]]의 완성을 400 ± 76 yrs AD (1σ SE)로 비정한 바 있다. 294년이라는 연대에서 [[오차]]가 앞뒤 52년이니 고이왕 대에 개축했을 가능성도 있고, 이후 임금 대[* 최대 하한으로 미뤄보면 [[근초고왕]] 재위 초반까지 내려가기는 한다.]에서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으나 [[문헌]] 자료와 비교해볼 때 적어도 고이왕 대에 고대 [[국가]]의 모습이 갖춰져 풍납토성이 개축되었거나 고이왕 대에 개축이 이뤄지지 않았더라도 책계왕 때에는 개축이 완료되었을 개연성 정도는 생각해볼 수 있다. * 한편 풍납토성 발굴시 발견된 서진계 전문도기로 인해 풍납토성의 최대 상한은 3세기 4/4분기로 유력하게 추정되고 있다. 즉 275~300년이 최초 개축 시기로 추정된다는 얘긴[*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시리즈 1권 참조]데, 이 또한 앞서 시료 분석 결과와 묘하게 일치하는 부분이다.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78&categoryId=49615&cid=49615|《삼국사기》 <책계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책계왕이 즉위하다 一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다 一年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구원을 요청하다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다 十三年秋九月 책계왕이 죽다 재위 13년인데 기록이 고작 5줄이다. 심지어 재위 3년차부터는 [[사망]] 기사 전까지 기록이 전무하다. [[한국]], [[중국]], [[일본]]의 모든 [[역사서]]를 뒤져봐도 책계왕의 기록은 저게 전부.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백제 왕실)] [[분류:298년 사망]][[분류:백제 국왕]][[분류:전쟁 사망자]][[분류:송파구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