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서인]] [include(틀:조선의 붕당)] [include(틀:서인)] [목차] == 개요 == [[인조반정]] 후 서인에서 비공신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기보단 대후금 정책에서 의리명분론에 동의하는 인물등이 형성되었다. 청론(淸論)으로도 불린다. == 상세 == [[인조반정]] 후 여당인 [[공서]]의 [[소북]]·[[남인]] 포용 정책에 반대하고 [[후금]]과의 척화론을 주도한 [[김상헌(조선)|김상헌]]의 의리명분론에 동조한 강경파이다. [[인조]] 정권은 [[광해군]] 정권의 [[인목왕후|폐모살제]](廢母殺弟)[* ’즉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동생을 살해한 비윤리적인 행위]를 불식시키고 향[[명나라|명]]배[[후금|금]](向明排金) 정책을 중심으로 정국의 운영 기조를 잡았다. 그러나 [[인조]]조 초기부터 [[인조반정|반정]] 주도 세력 내부의 갈등과 [[후금]]의 군사적 압력에 대한 외교 정책, 인사 정책을 둘러싸고 공신 세력의 일방적 운영 방식에 대해 갈등이 일어났다. 우선 [[광해군]] 정권 참여 인사 등용정책에 대한 반발이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인목대비]] 폐비 논의 참여자에 대한 포용 정책은 비공신 서인계 인사인 [[김상헌(조선)|김상헌]]이 반정 명분에 모순이라며 반발했다[* 『인조실록』 2년 12월 18일]. 또한 [[대북]]을 제거한 인조 및 [[공서]]파 [[김류]]는 여러 옥사/반란[* [[이괄의 난]], 이인거작변(李仁居作變), 유효립(柳孝立) 옥사]을 이용하여 [[서인]]·[[남인]]·[[소북]][* 사실상 [[청소북]]]의 연립 정권을 출범시키려 했다. 그러나 [[남인]]·[[소북]]을 정권에 참여시켜 정국 안정을 꾀한 국정 운영 방식을 김상헌이 비판하고 나섰다[* 『인조실록』 3년 1월 17일]. 운영 주도권 장악을 시도하는 [[공서]]파를 저지하려는 비공신 청서파 결집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후금]]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서 청서는 척화론을 기조로 모든 백성이 저항을 하다가 한계에 다다랐을때 강화를 고려해 '''볼 수 있다는''' 강경책을 주장했다. 또한 [[공서]]의 대후금 유화는 반정의 명분을 부정하는 거라며 비판을 거세게 가했다. 결론적으로 [[공서]]나 청서나 혼란스러운 반정 후 정권의 국정 운영 방식을 두고 강경 정책과 온건 정책으로 다툰 것에 가까우며 이 대결의 참가자는 [[서인]] 일부 인사에 한정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집단적 정치 활동을 별도의 정파로 분류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나, [[병자호란]]이라는 중요한 [[조선]]의 역사적 전환점을 설명하려 붕당으로 분류해 놓은 것에 가깝다. 이들의 정치 노선은 [[효종(조선)|효종]] 초반에 역시 강경파인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산당]](山黨) 계열 인사들이 계승했다. == 주요 인물 == * '''[[김상헌(조선)|김상헌]]''' * [[김장생]] * [[강석기]] * [[성문준]] * [[윤원거]] * [[윤황]] * [[이식]] * [[정홍명]] * [[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