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백제의 13대 왕 근초고왕, rd1=근초고왕)] [include(틀:역대 백제 국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6b6b, #008080 20%, #008080 80%, #016b6b)" {{{#fbe673 '''초고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백제 왕실)]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6b6b, #008080 20%, #008080 80%, #016b6b); color: #fbe673" '''백제 제5대 국왕[br]{{{+1 肖古王 | 초고왕}}}'''}}} || ||<|2> '''출생[br]{{{-3 (음력)}}}''' ||연대 미상 || ||[[백제]] [[위례성]][br](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일대]]) || ||<|2> '''사망[br]{{{-3 (음력)}}}''' ||[[214년]] [[10월]] || ||[[백제]] [[위례성]][br](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일대]]) || || '''능묘''' ||미상 || ||<|2>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제5대 국왕}}}''' || ||[[166년]] [[11월]] ~ [[214년]] [[10월]] {{{-2 (49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부여(扶餘) || || '''휘''' ||초고(肖古) / 소고(素古) / 초고(肖故)[* 《[[삼국유사]]》.] || || '''부왕''' ||[[개루왕]] || || '''왕후''' ||[[구수왕|부여구수]]의 모후 || || '''태자''' ||[[구수왕|부여구수]] || || '''시호''' ||'''초고왕(肖古王)''' ||}}}}}}}}} || [목차] [clearfix] == 개요 == [[백제]]의 제5대 국왕이자 [[건길지]]. 제4대 [[개루왕]]의 맏아들이며 제8대 [[고이왕]]과의 관계는 불확실하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 생애 == 전임자인 [[개루왕]] 시기에 155년에 신라의 반역자 [[아찬]](阿飡) 길선(吉宣)의 송환 문제로 양국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이로 말미암아 초고왕의 즉위 후 신라와의 공방전이 되풀이되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맥락상 165년으로 가야 약간은 《삼국사기》 다른 기록들과 아귀가 맞아지지만, 어차피 이 시기 신라와의 공방전은 전부 연대가 의심된다. 길선의 송환 문제는 적어도 165년보다 훨씬 나중에 벌어졌던 일로 봐야 하며 초고왕 자체도 재위기는 《삼국사기》 문헌을 그대로 믿기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 [[신라]]와의 공방전 === * 167년 7월에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해 2개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1,000여 명을 사로잡아왔다. 신라는 167년 8월 반격으로 일길찬 흥선이 20,000여 명의 병력으로 백제 동쪽의 여러 성을 공략했고 곧이어 신라 왕이 직접 정예 [[기병]] 8,000여 명을 이끌고 한수([[한강]])까지 침입해 초고왕은 신라 대군을 보고 점령했던 지역을 돌려주고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 170년 10월 신라의 변경을 침공했다. * 188년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했다. * 189년 9월 구양(狗壤)[* 現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신라와 싸웠으나 500명의 전사자를 내며 패배했다. * 190년 8월 신라의 서쪽 변경의 원산향[* 現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을 공격한 뒤에 구도[* [[미추 이사금]]의 아버지다.]가 이끄는 신라군이 추격해오자 와산[* 現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 199년 신라의 변경을 공략했다. * 204년 신라의 요차성[* 現 [[경상북도]] [[상주시]].]을 함락시키고 성주 설부(薛夫)를 전사시켰다. 신라의 [[내해 이사금]]이 분노해 백제 사현성에 반격했다. 기록으로 보아 신라와 싸운 곳은 [[소백산맥]] 일대로 나타난다. 기록된 병력 규모도 초기 기록이라기에는 과장된 면모가 있어 이 연대에 백제와 신라가 그대로 전쟁했다곤 믿을 수 없다. 백제국이 [[목지국]]을 무력화시키고, 쉽사리 복종하지 않는 충남북 북부 일대 목지국계 직속 마한 거수국들을 병탄해가는 과정이 고고학적으로 아직 분명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백제가 포함된 [[마한]] 소속 거수국들과 신라가 포함되어 있던 [[진한]] 소속 거수국들의 대결로 여겨졌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마한과 진한은 백제가 성장해서 목지국을 타고 넘어 충북 일대의 진한 일대 거수국들을 쫓아내거나 복속시키는 3세기 후반 ~ 4세기 초반까진 그다지 다툴 일이 없었고 우호적인 입장에서의 활발한 교류도 고고학적으로 입증된다. 아무래도 여기 쓰여진 일들은 초고왕보다 훨씬 후대인 책계왕~비류왕 시기에 일어났을 개연성이 크다. === [[말갈]]과의 공방전 === [[북한강]] 상류를 타고 내려오는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210년 적현(赤峴),사도(沙道)[* 후보지라도 있는 적현성과 달리 초고왕의 사도성은 대체 어딘지 연구조차 되어 있지 않다. [[한국사]]에 등장하는 사도성은 沙道城으로 하나 더 있는데 [[경상북도]] [[영덕군]] [[후포면]] 일대로 추정된다. 이 사도성은 [[아달라 이사금]] 시절 이미 있었고 [[유례 이사금]]이 사도성을 [[재건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초고왕 시절 백제가 영덕까지 지배하지 못했을 것이라 추정하여 영덕 사도성이랑 별개의 성이라는 점만 연구되어 있다.] 두 성을 쌓았다고 되어 있다. 214년 진과(眞果)로 하여금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공격하여 탈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말갈]]의 [[기병]]으로 인해 술천[* 現 [[경기도]] [[여주시]].] 지역까지 침략당하여 [[역관광]]당하기도 하였다. 말갈은 말갈 문서에 있듯 [[만주]]의 말갈이 아니라 [[위말갈]], 즉 [[동예]], [[대방군]] 등 [[예맥]]계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적현성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대라는 설과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일대라는 설 2개가 있는데, 문제는 《삼국사기》 문헌 연대상 초고왕~구수왕 재위기에는 백제가 어딜 지배하고 말고 이전에 아예 국가를 이룬 단계였는지도 의문시된다는 점. 한성 일대의 토돈 분구묘제 집단은 그 시기엔 임진강 유역에서 머무르고 있던 고구려계 적석총 집단과 연합하기도 전이었다. 쉽게 말하면 고고학적으로는 우리가 아는 백제가 있던 시기 자체도 아니란 말. 게다가 그 시기에 적성 일대는 [[신분활국]]이 건재했다. 초고왕~구수왕의 재위 연대가 실제보다 훨씬 후대거나 혹은 후대 임금의 다른 업적이 소급되어 적혀졌든지, 가능성은 둘 중 하나다. == 기타 == * 《[[삼국사기]]》에는 고이왕이 초고왕과 어머니가 같은 동생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고이왕은 초고왕이 [[사망]]한지 20년이나 지나 [[왕위]]에 올랐고, 다시 50년을 재위하였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개루왕의 아들이나 초고왕의 동생으로 보기 어렵다. [[기루왕]]의 사례에서 보듯이 [[개루왕]]은 38년을 재위했고 기루왕이 100살을 넘겼다면 아들인 개루왕도 최소 60살은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개루왕도 무려 38년을 재위했으니 아들인 초고왕은 50살이 넘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고이왕이 초고왕의 동생이라면 무려 70살이 넘는 나이에 50년을 재위하여 120살을 넘게 살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 책계왕이 고이왕의 증손자라면 모를까, 여긴 또 아들이랑 아버지 관계다. 이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고이왕이 초고왕의 동생이 아닌 초고왕의 동생의 아들, 즉 조카라는 견해도 예전에는 제기되었는데, 요즘 와선 고이왕 자체를 아예 그냥 초고왕계와는 성씨도 달랐던 임금으로 보는 추세다. 그냥 요약해서 말하자면 '''고이왕은 초고왕의 동생이 아닐 소지가 높고 《삼국사기》 문헌상 연대도 그대로 믿을 순 없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 [[근초고왕]]을 '''초고왕 2세'''라고도 한다. '근'이 [[서양]]의 '~~2세'를 의미한다고 한다. 여하튼 근초고왕이 초고왕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 [[대한민국]] [[역사학자]] [[노중국]]에 따르면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등장하는 백제 국왕 중 최초의 부여씨 계열(온조 계열) [[군주]]로 지목되는 군주다. 단계로 발전하는 시기가 초고왕 시기와 비슷하다는 점, 《신찬성씨록》에 초고왕을 시조로 하는 가문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실제 전임자 [[온조왕]],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은 《신찬성씨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출처: 《백제 정치사 연구》.] == 《[[삼국사기]]》 내용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74&categoryId=49615&cid=49615|《삼국사기》 <초고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초고왕이 즉위하다 二年秋七月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하다 二年秋八月 신라가 군사를 보내 동쪽 변경을 공격해 오다 五年春三月 [[일식]]이 일어나다 五年冬十月 신라 변경을 공격하다 二十一年冬十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二年夏五月 서울의 [[우물]]과 한강이 마르다 二十三年春二月 궁실을 중수하고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다 二十四年夏四月一日 일식이 나타나다 二十四年秋七月 신라와 구양에서 싸워 패배하다 二十五年秋八月 신라의 원산향을 공격하고 부곡성을 포위하다 二十六年秋九月 치우기가 각·항에 나타나다 三十四年秋七月 [[지진]]이 일어나고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三十九年秋七月 신라의 요차성을 공격하여 성주 설부를 죽이다 三十九年冬十月 혜성이 동정에 나타나다 四十年秋七月 [[금성]]이 [[달]]을 범하다 四十三年 [[곡식]]이 익지 않아 [[도적]]이 일어나다 四十四年冬十月 겨울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다 四十五年春二月 적현성과 사도성을 쌓다 四十五年冬十月 말갈이 사도성을 공격하다 四十六年秋八月 누리 떼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리다 四十六年冬十一月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四十七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四十八年秋七月 회회가 흰 [[사슴]]을 바치다 四十九年秋九月 북부의 진과가 말갈의 석문성을 공격하다 四十九年冬十月 말갈이 침입하여 술천에 이르다 四十九年 초고왕이 죽다 신라, 말갈과 투닥투닥. 그리고 자연 [[재해]]가 거의 전부다. 심지어 5~21년 사이는 공백이고 2~5년차 기록도 [[천문]] 현상 아니면 <신라본기>에서 베껴온 거라서 실질적인 백제 측 기록은 21년(서기 186년)부터 시작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분류:214년 사망]][[분류:백제 국왕]] [include(틀:포크됨2, title=초고왕, d=2022-07-09 08:0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