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나치 독일의 군정청)] [include(틀:폴란드의 역사)] ||<-4> {{{#fff {{{+1 '''총독부''' [br] [[영어|{{{#fff '''General Government'''}}}]] [br] [[폴란드어|{{{#fff '''Generalne Gubernatorstwo'''}}}]]}}}}}} || ||<-2>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100%]] ||<-2> [[파일:나치 독일 국장.svg|width=100%]] || ||<-2> {{{#ffffff '''국기'''}}} |||| '''국장''' || ||<-4>{{{#!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폴란드 군정청.svg|width=100%]]}}} || ||<-3> '''1939년 ~ 1945년'''[* 1944년에 [[폴란드 임시정부|폴란드 해방을 선언했고]] [[바르샤바]]가 함락된건 1945년이기에 사실상 1944년 까지 유지되었다] || ||<-2> '''성립 이전''' ||<-2> '''멸망 이후''' || ||<-2><|2> '''[[폴란드 제2공화국|{{{#fff 폴란드 제2공화국}}}]]''' ||<-2>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FFD700 우크라이나 SSR}}}]]''' || ||<-2> '''[[폴란드 임시정부|{{{#fff 폴란드 임시정부}}}]]''' || || '''위치''' ||<-3>[[폴란드]],[[우크라이나]][* 1941년후에 현재의 [[우크라이나]] 일부도 추가되었다] || ||<:>'''수도''' ||<-3>1939년 10월 12일 ~ 1939년 11월 4일: [[우치(폴란드)|우치]] 1939년 11월 4일 ~ 1945년 1월 19일: [[크라쿠프|크라쿠프]]|| ||<:>'''정치체제''' ||<-3>[[군정]] || ||<:>'''언어''' ||<-3>[[독일어]][*공식 ], [[폴란드어]], [[우크라이나어]], [[이디시어]] || [목차] [clearfix] == 개요 == [[폴란드 침공]]이후 설립된 나치 독일의 군정청이다. == 상세 == 폴란드가 [[나치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된 후, 나치 독일이 점령한 지역은 다시 폴란드 서부[*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독일 제국 영토였다가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이 폴란드에 할양한 지역은 모두 여기에 속했다.]와 총독부 관할구역으로 구분되었다. 이 중 폴란드 서부는 나치 독일에 편입되었다. 나치 독일은 자신들이 점령한 폴란드 지역의 [[폴란드인]]들을 추방하거나 2등 국민으로 취급했다. 폴란드인들은 [[공공장소]]를 이용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폴란드인들이 이용하던 거의 모든 [[교육기관]]들이 폐쇄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대학]] 역시 폐쇄되었으며, 대학 [[교수]]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 외 [[정치]], [[문화]], [[과학]], [[예술]] 등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조직들이 해체되었다. 폴란드인들에게는 기초 노동에 필요한 초등 교육 정도만이 허가되었다. 점령 초기 3달 동안 6만 1천여 명[* 이는 독일 측이 기록한 것으로, 실제 수치는 10만여 명에 이른다고 본다.]에 이르는 폴란드 [[정치인]], [[폴란드군]] [[장교]], 경제인, [[성직자]], [[지식인]]들이 [[처형]]되었고 그 중 1천여 명은 [[전쟁포로]]였다. [[독일 국방군]], [[슈츠슈타펠]], [[게슈타포]], 자위단(Selbstschutz) 모두 폴란드인들에 대한 학살에 가담했다. 포모제(Pomorze) 지방에서만 2만 3천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 이후에도 AB조치(AB-Aktion)가 행해져 [[1940년]] 봄부터 여름까지 3만여 명의 폴란드인들이 체포되어 그 중 7천여 명이 학살당했다. [[독소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7월에는 [[르비우|르부프]](Lwów)의 대학 교수 25명과 그의 가족들도 학살되었으며, 그 중에는 전(前) 폴란드 총리 카지미에시 바르텔(Kazimierz Bartel)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9년]] 1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바르샤바]] 인근의 팔미리(Palmiry) 숲에서는 1,700여 명의 폴란드 지식인들이 처형되었다. 이러한 학살의 목적은 폴란드 민족을 말살하여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종전시까지 폴란드의 [[의사]]의 45%, [[판사]]와 [[변호사]]의 57%, [[교사]]의 15%, 대학 교수의 40%, 고급 [[기술자]]의 50%, 초급 및 중급 기술자의 30%, 성직자의 18%가 학살당했다. [[가톨릭]] 성직자들도 3천여 명이 학살당했다. [[독일]]이 자국 본토로 편입시킨 폴란드령에서는 폴란드인들에 대한 혹독한 동화정책과 강제이주가 행해졌다. 대략 250만에 이르는 폴란드인들이 총독부령으로 추방되었으며, 그 자리를 130만 명의 본토 [[독일인]]들이 차지했다. 남은 폴란드인들은 학살당하거나 독일의 강제 동화 정책에 희생되었다. 한편 총독부령은 5개 구역([[바르샤바]], [[크라쿠프]], [[라돔]], [[루블린]], [[갈리치아]])으로 나뉘었다. 폴란드인 탄압정책 중 가장 괴상한 것으로는 정책적으로 폴란드 [[어린이]]들을 납치한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렇게 납치된 아이들의 숫자가 20만에 이르렀다. [[자모시치]](Zamość) 지역에서만 3만여 명이 납치되어 이 중 4,445명이 독일화를 목적으로 독일 본토에 이송되었다. 독일 당국에 납치된 어린이 중 수만여 명이 [[강제노동]]에 혹사당해 사망했다. 그 중 다시 폴란드로 돌아온 이들은 15~20%에 불과했다. 폴란드인들은 나치 독일에게 있어 2등 국민이었으므로, 폴란드인들은 모든 편의를 [[독일인]]에게 먼저 양보해야했다. [[폴란드인]]과 [[폴란드 유대인]]들이 경영하던 모든 사업체가 [[독일인]]들에게 접수되었다. [[정류장]]과 [[버스]], [[기차]]에서도 폴란드인들은 맨 뒤쪽 칸을 이용해야만 했고, 필요시에는 독일인에게 양보해야 했다.[* 그나마 폴란드인들은 나은 경우였고, [[유대인]]은 이런 것들을 아예 사용할 수 없었다.] 성인은 [[제복]]을 입은 독일인에게 경례를 해야 했고, 상점주인들은 독일 손님들을 먼저 응대해야만 했다. 식량이 배급될 때도 폴란드인들은 독일인들보다 적은 양을 배급받았다. 독일인들은 1일 배급량이 2,310[[칼로리]]에 달했지만, 폴란드인들은 654칼로리에 불과했다. 총독부 내에서 폴란드인보다 식량을 적게 배급받은 민족은 유대계뿐이었으며, 이들은 독일인들의 1/10에도 못 미치는 184칼로리를 배급받았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밀수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가슴아픈 일화가 하나 있다. 게토의 담장에 파인 개구멍으로 유대계 소년들이 몰래 식량을 반입하다가 독일 경찰에 체포당했다. 이 독일 경찰은 지나가던 폴란드인을 불러 이 유대인을 다리로 떨어뜨리라고 명령했고,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 폴란드인은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따랐고, 죄책감으로 [[자살]]했다.] 심지어 가죽 [[가방]]마저 사용을 제한받았으며, [[프레데리크 쇼팽]]의 음악을 연주하면 처형당했다. 또한 나치 독일의 관할인 (폴란드)[* 나치가 폴란드 민족말살정책을 위해 지은 정식명칭은 폴란드를 빼고 그냥 총독부(Generalgouvernement^^게네랄고우퍼네멘트^^)로 지었다.]총독부에서는 점령 내내 폴란드인들을 강제로 독일에 이주시켰는데, 이는 독일에서 [[강제노동]]에 동원하기 위함이었다. 약 150만 명의 폴란드인들이 독일 영내로 끌려가, 대개는 [[나치 독일]]의 열악한 대우와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죽어나갔으며, 이렇게 빈 자리가 생기면 또 다른 폴란드인들이 들어왔다. 이렇게 수천명의 폴란드인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 지역 외에 폴란드 본토에서도 폴란드인들 가운데에서 강제 노동을 위한 인원이 계속 선발되었고, 독일 지역과 비슷한 이유로 또 많은 폴란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수많은 폴란드인들과 유대인들이 의약품과 식량 부족으로 인해 사망했으며, 정신질환자들은 특히 집중적으로 학살되었다.[* [[나치 독일]]은 [[T4 작전]]으로 자국의 정신질환자들도 학살했다.] 독일의 가혹한 통치로 인해 600만 명의 폴란드인과 폴란드 유대인들이 사망했는데, 특히 [[폴란드 유대인]]들은 335만 명에 이르던 전전 인구 중 90% 가까이 학살당했으며, 이 때문에 폴란드는 2차 대전 기간 동안 유대인 사망률이 가장 높은 국가였다. 그리고 600만 명이라는 숫자도 알고 보면 폴란드인과 유대인만 계산한 것이고, 그 밖의 [[소수민족]] 희생자들은 포함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가혹한 통치로 인해 폴란드의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지하 [[레지스탕스]] 활동이 벌어졌으며, 이 저항운동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반나치 레지스탕스 중 가장 거대한 세력을 자랑했다. 폴란드 저항군 중 [[공산주의]] 계열을 제외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런던에서 항전하는 [[폴란드 망명정부]]를 지지했다. == 영역 == || [[파일:폴란드 총독부 행정구역(1939~1941).png|width=300]] 1939 ~ 1941 || [[파일:폴란드 총독부 행정구역(1941~1944).png|width=300]] 1941 ~ 1944 ||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독소 폴란드 점령, version=153, paragraph=2.1)] [[분류:폴란드의 역사]][[분류:군정청(나치 독일)]][[분류:1939년 설립]][[분류:1944년 해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