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구성시 출신 인물]][[분류:1914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최성반}}}'''[br]'''崔聖盤, 崔聖磐'''}}}}}} || ||<|2> '''출생''' ||[[1914년]] [[12월 22일]] || ||[[평안북도]] [[구성시|구성군]] 방현면 하단리 || ||<|2> '''사망''' ||몰년 미상 || ||사망지 미상 || || '''상훈''' ||대통령표창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최성반은 1914년 12월 22일 [[평안북도]] [[구성군]] 방현면 하단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30년 1월 무렵 서울 [[근화여학교]] 2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그러던 1930년 1월 14일, 그녀는 학교에서 4학년생 김금남(金錦南)과 동기생 김천례(金順禮)가 자신의 [[하숙집]]을 회의장소로 쓰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흔쾌히 승낙하였다. 그날 밤, 그녀의 하숙집에는 김금남, 김천례와 김귀인복(金貴仁福)·김연봉(金蓮峯)·이충신(李忠信) 등 근화여학교 학생 6명이 참석했다. 이 외에도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同德女子高等普通學校) 2명·경성여자미술학교(京城女子美術學校) 2명·[[배화학당|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 2명·실천여자고등보통학교 2명 등 모두 14명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다음날인 15일 아침 [[서울]] 시내 각 학교의 학생들이 동시에 만세를 부르며 [[종로]](鐘路) 쪽으로 시위행진을 하는 일에 대해 협의하였다. 1월 15일 오전 9시 30분경, [[근화여학교]]에서 이충신을 선두로 만세를 부르며 교문 밖 진출을 시도하였는데, 경관이 제지하자 학교 판자벽과 유리창을 깨는 등 적극적으로 맞섰다. 그리고 타교 학생들과 연계하여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동정하는 동맹휴교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수십 명의 여학생을 포함해 400여 명이 검거되었으며, 최성반을 포함해 [[근화여학교]] 학생도 다수 체포되었다. 대부분의 동료 학생들이 29일 가출장(假出場)으로 석방된 데 반해, 최성반 등 근화여학교 학생 6명은 30일 [[근우회]](槿友會) 간부 허정숙(許貞淑),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최윤숙(崔允淑) 등 28인과 함께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검찰로 송치되었다. 1930년 2월 10일 허정숙 등 8명만 최종 기소되었고, 최성반을 포함한 근화여학교 학생 6명은 기소유예(起訴猶豫)로 석방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최성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