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 rd1=최승우(동명이인))] [include(틀:신라삼최)] ||||<:>
<#191970> '''{{{#white 후백제의 관료[br]{{{+1 최승우 | 崔承祐}}}}}}''' || ||<:><#191970> '''{{{#white 본관}}}''' ||<(> [[경주 최씨]] || ||<:><#191970> '''{{{#white 출생}}}''' ||<(> ?, [[신라]] [[경주시|금성]] || ||<:><#191970> '''{{{#white 사망}}}''' ||<(> ?, [[후백제]] [[완산주]](?) || [목차] [clearfix] == 개요 == [[후삼국시대]]의 인물. [[신라]], [[후백제]]의 문인 겸 관료. 본관은 [[경주 최씨|경주]]로 [[골품]]은 [[6두품]]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 [[최언위]]와 더불어 [[신라삼최]]로 불리며 빼어난 문장력과 학식을 지닌 인물로 알려졌다. == 생애 == 890년, [[중국]] [[당나라]]에 건너간 뒤 3년만에 당나라 예부시랑 양섭 밑에서 [[빈공과]]에 응시해 급제, 현지 관직에 있다가 어느 시점에 귀국했다. 기록이 소략해서 당나라 어디서 어떤 일을 했고, 언제 신라로 귀국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단서가 있는데 [[동문선]]에 최승우의 칠언율시 10수가 수록돼 있다. 이 시들은 최승우가 중국에서 자신과 교류하던 인물들에게 헌사한 것인데 이 중 춘일송위태위자서천제회남(春日送韋太尉自西川除淮南)은 당나라 말기에 [[재상]]을 지낸 [[태위]] 위소도(偉昭度)에게 준 시고, 송조진사송입나부(送曹進士松入羅浮)는 901년경에 70세의 나이로 진사가 된 조송(曺松)에게 준 시다. 최승우의 중국 생활 당시 고위층과도 교류를 해서 명성을 떨쳤고, 특히 조송의 경우를 보면 적어도 901년까지는 최승우가 당나라에서 지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 행적이 927년이므로 26년 동안 중국이나 한국 어디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은 당나라가 멸망한 후 [[오대십국시대]]의 혼란기였고 한반도 역시 통일신라가 쇠락한 [[후삼국시대]]였으므로 두 나라의 난세를 모두 경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분명한 것은 최승우는 지금까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 뿐 당시에는 여전히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이 '공백기'인 917년에 [[최언위]]가 쓴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郎空大師碑)'에서 최언위 자신과 최치원, 최승우를 신라삼최로 묶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의 중국 [[강서성]] 일대를 여행한 이야기를 담은 '억강서구유인기지기(憶江西舊遊因寄知己)'가 전하는데 단순히 [[여행]]을 갔다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 근처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한반도]]에서 후삼국 시대가 열린 후 어느 시점에 후백제에 임관한다. 최승우가 어떻게 후백제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아마도 망해가는 신라를 보고 대안으로서 후백제의 [[견훤]]을 생각해 견훤의 밑에 들어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927년 [[공산 전투]] 승리 직후 견훤이 [[태조(고려)|왕건]]에게 보내는 위협적인 국서를 최승우가 썼는데, 이 중 '''"내 활을 [[평양성]]의 문루에 걸고 내 말에게는 [[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유명하다. 이 글은 동문선, [[삼국사기]] 견훤 열전, [[고려사]] 태조세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견훤이 [[경애왕]]을 살해했음에도 신라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고 [[경순왕]]을 옹립했고 본인이 작성해 고려에 보낸 국서에서도 [[존왕양이]]적 입장을 드러내며 신라의 충신 코스프레를 하는데, 이것이 최승우의 입장이 반영되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최승우는 중국 유학파였고 당시 중국에서는 당나라를 멸망시킨 [[후량]]이 결국 당나라 계승을 주장한[* 다만 후당을 건국한 [[이존욱]]은 당나라 황실의 일원이 아닌 사타족 출신이었다. 할아버지가 당나라 시대에 공을 세워 이씨를 [[사성]]받았으니 명분상 계승한다는 것.] [[후당]]에게 923년 멸망한 상황이었으므로 대의명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아무튼 최승우는 스스로 작성한 국서의 내용을 읽어봐도 나름의 대의명분을 챙기고자 노력했지만, 927년의 서라벌 급습은 결국 신라 조정을 존중하던 호족들의 지지가 고려로 넘어가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 기타 == * [[신라삼최]] 중에서 생애와 행적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최승우와 관련하여 남은 [[기록]]이 극도로 부실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고려]]에 귀부하지 않았음에도 고려 [[현종(고려)|현종]] 대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받고 [[문묘]]에 종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여러 [[서원]]에서 제향되기도 했고 [[조선]]에서도 여전히 문묘에 배향해 줄 정도로 영광을 누렸고, [[최언위]]는 최치원만큼의 유명세를 떨치지는 못했지만 고려에 귀부하고 나서 높은 벼슬을 받고 천수를 누렸으며 직접 남긴 고승들의 비문이 지금도 상당수 남아있기 때문에 그의 행적과 사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최승우는 생몰년도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기록이 거의 없다. 최승우가 몸담았던 [[후백제]]가 [[고려]]에게 패배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점도 있겠지만 927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국서의 작성자가 최승우로 알려져있는데[* 일각에서는 최승우가 후백제에서 임관했는지조차 불분명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국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보아서 후백제의 [[관리]]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서신의 내용이 고려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모욕]]적이었기 때문에 고려에서 더욱 우대해 줄 까닭이 없었던 점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 이러한 정황에 대해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나름대로 [[상상력]]을 더해서 잘 묘사하였는데 최승우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최응]]과 마지막 대담을 하는 장면에서“허망한 것은 이긴 자는 자신의 행실을 기록에 남겨 역사라고 하지만 진 자는 그것마저 다 사라지고 [[변명]]의 여지조차도 없다. [[도적]]이나 화적떼의 이름으로 분류되어 오명으로 남을 뿐이다”며 “훗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구차한 삶이 끝났는지 모를 수 있다”며 그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 최승우의 [[운명]]을 알게 되는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사가 아닐 수 없다. * 저서로《호본집(餬本集)》이라는 최승우 본인의 문집으로 추정되는 책 5권을 지었다고 하나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 [[조선]] 시대의 일부 기록에서는 중국에서 [[도술]]을 배워 신라에 퍼뜨린 한국 도맥의 시조격 인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 창작물에서 == === [[태조 왕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최승우(태조 왕건))] == 둘러보기 == [include(틀:삼국사기)] [[분류:몰년 미상]][[분류:경주 최씨]][[분류:후삼국시대/인물]][[분류:신라의 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