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최우평}}}[br]崔羽平[* 崔'''{{{+1 友}}}'''平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 || '''호''' ||후괴(後槐) || || '''본관''' ||[[최(성씨)|강화 최씨]](江華 崔氏)[* 우윤공파(右尹公派) 27세 종(鍾) 항렬. 족보명은 최종익(崔鍾翼).] || ||<|2> '''출생''' ||[[1878년]] [[3월 22일]] || ||[[전라도]] [[나주시|남평현]] 도개면 입석리[br](현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덕동1리 입석마을) || ||<|2> '''사망''' ||[[1908년]] [[10월 27일]] || ||[[전라남도]] [[화순군|능주군]] 부춘면 석정리[br](현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화순)|춘양면]] 석정리)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78년 3월 22일 전라도 남평현 도개면 입석리(현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덕동1리 입석마을)에서 아버지 최병교(崔柄敎, 1859. 7. 16 ~ 1910. 3. 1)와 어머니 [[도강 김씨]](1856. 8. 1 ~ 1898. 2. 2) 김병환(金秉煥)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최일교(崔一敎, 1845. 1. 25 ~ 1862. 9. 21)에 입양되었다. 그는 1907년 12월 5일 [[심남일]]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키고 1908년 3월 의병 600여명을 소집하자 심남일 의병대에 입대하여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298|나성화]](羅成化)·노병우(盧炳友)와 함께 후군장(後軍將)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달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경찰과 교전을 벌였다. 그는 그해 3월 7일 있었던 [[강진군]] 오치동(五治洞) 전투를 비롯하여 [[나주시|남평군]]·[[영암군]]·[[장흥군]]·[[해남군]]·[[화순군|능주군]] 등지에서 9회에 걸쳐 일본군 및 일본 경찰과 전투를 벌였다. 그 뒤 10월 27일 심남일 의병진이 그 이튿날 일본군 헌병대를 소탕할 계획을 세우고 [[나주시|나주군]] 노안(老安)에 머물러 있던 도중, 이 계획을 미리 탐지한 일본군 30여명에 의해 습격을 당했다. 그리고 10여 차례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승부가 가려지지 않자, 그는 [[화순군|능주군]] 석정(石亭)에서 직접 일본군을 꾸짖으며 돌진하여 싸우다가 결국 일본군이 쏜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나주시 출신 인물]][[분류:강화 최씨]][[분류:1878년 출생]][[분류:190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