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0000,#e5e5e5 최인선의 수상 및 감독 경력 }}}'''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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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농구|프로농구]] 창설 이전 아마추어 시절 최고 권위 대회였던 [[농구대잔치]] 최다 우승(5회) 감독이자, [[KBL 챔피언결정전]] 2회 우승 감독이다. 프로농구에서도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기아자동차 농구단]]과 [[서울 SK 나이츠|SK 나이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2000년대]] 중반 [[대장암]] 투병으로 인해 감독 생활을 중단하였고, 이후 완치되었음에도 감독으로 복귀하지 않고 휴식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농구 감독이 받는 스트레스가 그만큼 엄청나다는 것을 방증한다.] == 선수 시절 == [[1974년]] 실업 농구팀인 산업은행 남자 농구팀에 입단하여 [[1982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였다. ~~지도자 시절 항목에 비하면 지나치게 짧다?~~ 당시 70년대 농구는 대학에서는 양대산맥인 연세대와 고려대의 영향이 셌고 실업농구 또한 당시에는 한국은행과 기업은행 그리고 산업은행이 강세였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학벌에 의한 파벌은 존재했다. 한국은행은 연세대 출신이고 산업은행은 고려대 출신이었다. 그 중 기업은행은 고르게 섞였다. 중앙대 출신으로 산업은행에서 주전으로 쭉 활약했다. 그 중심에 고려대 출신이자 기업은행의 명 가드로 라이벌이었던 [[김동광]]이 있었다. == 지도자 시절 == === 코치 시절 ===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은퇴했던 산업은행 농구팀의 코치를 지냈다. 1986년 기아산업 남자 농구팀이 창단되자 기아산업의 창단 코치로 옮겨 [[방열(농구)|방열]] 감독을 보좌하였다. 당시 방열 감독은 영리한 지도자라 평했다. === 기아자동차 감독 시절 === 1990년 방열 감독이 사퇴하자 뒤를 이어 감독이 되었다. 기아자동차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허재|허]][[강동희|동]][[김유택|택]] 트리오, [[허재|허]][[강동희|동]][[김영만(농구)|만]] 트리오[* [[허재]], [[강동희]], [[김유택]], [[김영만(농구)|김영만]]은 모두 [[중앙대학교]] 후배들로, 당시 기아자동차 농구단은 중앙대학교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를 주축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사실 좋은 성적 수준이 아니라, 90년 부임 후 93-94 농구대잔치 전까지 전대회 우승 및 94-95, 95-96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두었다. 당시 NBA에 필 잭슨과 시카고 불스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최인선과 허동택 트리오의 기아자동차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물론 [[최희암]]-[[이상민(농구)|이상민]]-[[서장훈]]의 연세대와 [[박한]]-[[전희철]]-[[김병철(농구)|김병철]]의 고려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최인선 감독과 전술 능력으로 비교할 수 있는 지도자는 당시만 해도 그의 전임인 방열 감독이나 현대전자의 고 정광석 감독 말고는 없었다. 삼성전자의 김인건 감독은 덕장에 가까웠고 KBL 출범 이후 라이벌에 들어가는 서울방송의 [[김동광]] 감독의 경우 전술과 전략보다 수비와 투지를 강조하면서 용장에 가까웠다. 그리고, 당시 코치였던 [[박인규(농구)|박인규]] 코치가 감독처럼 작전지시를 하는 모습까지 배려를 이어갔다. ===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감독 시절 === 1997년 [[한국프로농구|KBL]](한국프로농구)이 창설되면서 프로 팀으로 전환된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 프로 원년 시즌부터 우승후보였다. [[허재|허]][[강동희|동]][[김유택|택]][[김영만(농구)|만]] 빅4의 건재와 포스트를 책임져줄 빅맨인 [[클리프 리드]]의 존재만으로도 상대는 공포를 떨었다. 제이슨 윌커슨 또한 잘해주었다. 처음에는 [[허재]]의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음주사건으로 인해 패배도 있었지만 빠르게 추스렸다. 결국 1997 원년 시즌 [[김동광]] 감독과 [[이상범(농구)|이상범]] 그리고 [[제럴드 워커]]의 안양 SBS 스타즈와 [[최명룡]] 감독과 [[정인교(농구)|정인교]] 그리고 [[제이슨 윌리포드]]가 이끄는 원주 나래 블루버드의 추격을 따돌리고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첫 시즌인 1997 시즌 챔피언결정전에 무난히 진출하며 진출하여 원주 나래 블루버드(현 [[원주 DB 프로미]])를 4승 1패로 꺾고 첫 플레이오프 우승과 함께 KBL 통합우승을 달성하면서 마침내 KBL 챔피언에 올랐다. 하지만, 이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창단팀이었던 [[이충희]] 감독과 [[양희승]] 선수 그리고 [[버나드 블런트]]라는 외국인 스코어러가 등장한 [[창원 LG 세이커스]]의 돌풍과 신선우 감독과 이조추 트리오 그리고 [[조니 맥도웰]]의 대전 현대 다이넷의 우승후보 도약과 함께 97-98 시즌 정규리그 3위에 그치게 된다. 1997-98 시즌 4강 플레이오프에서 창단 돌풍의 [[창원 LG 세이커스]]에 3승 1패로 앞서면서 2년 연속 KBL 파이널에 진출했다. 하지만, 세월은 더 이상의 KBL 챔피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전 현대 다이넷(현 [[전주 KCC 이지스]])과의 챔피언결정전에서는 [[허재]]의 부상 투혼에도 불구하고 7차전 끝에 준우승을 거뒀다. 최인선 감독과 [[허재|허]][[강동희|동]][[김유택|택]][[김영만(농구)|만]] 그리고 [[클리프 리드]]는 끝내 눈물을 흘리면서 기아 팬들에게 왕좌의 내리막을 알리게 된다. 이후 1997-98 시즌 종료와 함께 기자회견으로 충격을 준 [[허재]]의 이적과 [[정인교(농구)|정인교]]가 오더니 함께 자신을 보좌했던 [[박인규(농구)|박인규]] 코치에게 감독직을 물려주고 그동안의 공을 인정받은 이후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기술고문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1998-99 시즌 또 준우승에 그치면서 자신을 보좌해주었던 [[박인규(농구)|박인규]] 감독마저 물러나더니 [[정인교(농구)|정인교]] 또한 트레이드로 이적하며 기아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 청주/서울 SK 나이츠 감독 시절 === 잠시 명목상 기아 엔터프라이즈 기술고문과 SPORTS TV 해설가로 활동하던 중 예상보다 빠르게 감독으로 돌아왔다. 1998년 11월 27일 [[KBL]] 창단팀이었던 [[서울 SK 나이츠|청주 SK 나이츠]](현 [[서울 SK 나이츠]])가 [[안준호]] 감독을 경질하면서 청주 SK 나이츠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자신을 보좌할 코치로는 연세대 코치였던 [[박건연]] 코치가 맡게 되었다. 하지만, 시즌중에 부임한 나머지 [[안준호]] 초대 감독 시절 포지션 중복을 끝내 해결하지는 못했다. 당시 SK는 [[서장훈]]의 우선입단과 KBL 최초 드래프트의 1순위인 [[현주엽]]이 모두 입단했지만 융화는 없었고 토니 러틀랜드가 가드를 볼 정도로 가드의 존재감이 희미하는 모습까지 장악력은 보이지 않았으며 전술과 전략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역시 최고의 전술과 전략가는 바로 처방전을 잘 내렸다. 1999-2000 시즌을 앞두고 취약점이었던 포인트 가드에 KBL 드래프트로 [[황성인]]의 선발과 외국인 드래프트로 [[재키 존스]]와 [[로데릭 하니발]]을 선발하면서 우승후보로 도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융화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결국 누구보다 팀 플레이 속의 융화를 강조했던 최인선 감독은 이원재 단장에게 목을 내놓을 각오로 트레이드를 추진하게 된다. 바로 서로 자존심 싸움을 했던 [[서장훈]]과 [[현주엽]]의 포지션 중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건 신의 한수. 올어라운드 포워드로 매직히포라는 별명이 붙은 [[현주엽]]을 광주 골드뱅크 클리커스(현 [[수원 kt 소닉붐]])로 보내고 반대로 슈터인 [[조상현]]을 받아온다. 이건 바로 크리스마스 빅딜이었다. 이후 SK 나이츠는 포지션 밸런스가 잡히면서 안정적인 팀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리고 1999-2000 시즌 창단 첫 정규리그 2위로 마무리하게 된다. 4강 플레이오프에서 무난하게 승리를 거두면서 창단 첫 KBL 파이널에 진출하게 된다. 상대는 바로 기아 시절 아픔을 주었던 라이벌인 [[신선우]] 감독이 이끄는 대전 현대 걸리버스[* 1999-2000 시즌을 앞두고 팀명을 현대 다이넷에서 현대 걸리버스로 변경하였다.]였다. 마침내 2년전 기아 시절 자신을 내려오게 했던 라이벌인 현대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신선우]] 감독을 상대로 복수에 성공하게 된다. 청주 SK 나이츠의 창단 첫 KBL 플레이오프 우승이자 당시 중계했던 [[한명재]] 캐스터는 밀레니엄 챔피언의 등장이라는 말과 함께 프로농구의 새로운 챔피언을 이렇게 표현했다. 물론 최인선 감독은 [[허재]]와도 재임 중 힘들어했지만 팀 속에 허재를 살린 감독이라는 점에서 [[서장훈]]을 장악한 최인선 감독의 리더쉽에 농구팬들은 최고라는 극찬을 보내게 된다. 팬들은 기아 시절의 복수 그리고 SK 시대의 첫 서막을 연 최인선 감독님의 전술과 전략 그리고 융화와 신뢰를 다시한번 주목하게 된다. 이후 2000-01 시즌과 2001-02 시즌에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해서 신산이라 불렸던 KBL 최고 명장이지만 알고보면 계산적인 [[신선우]](대전 현대 걸리버스, 전주 KCC 이지스)의 킬러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게 된다. 사실 신선우 멤버 중 이상민과 조성원은 감사했지만 이외는 아니라는 설이 있다. 최인선 감독도 다른 부분보다 신선우 감독과의 라이벌전에서 승리를 가장 기쁘게 회고하고 있다. 명실공히 SK 나이츠의 [[리즈 시절]]을 이끈 감독. [[안준호]]는 의문의 1패. 하지만, 외국인 악재로 인해 [[김동광]] 감독과 [[주희정]] 선수 그리고 [[강혁(농구)|강혁]] 선수가 이끄는 [[수원 삼성 썬더스]]와 [[김진(농구인)|김진]] 감독과 [[김병철(농구)|김병철]] 선수 그리고 [[김승현(농구)|김승현]] 선수가 등장한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등장과 함께 전성기에서 내려오게 된다.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대구 동양 오리온스]]와의 2001-2002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최종 7차전까지 갔으나 준우승에 그쳤다. 기아 시절부터 이어진 외국인이 말썽을 또 부린 것이다. 당시 센터였던 에릭 마틴은 평범했고 로데릭 하니발은 플레이오프에서 부상을 당했던 게 크다. 기아 시절 저스틴 피닉스의 돌출행동이 또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최인선 감독은 명장에서 내려오게 된다. 2002-03 시즌 에이스 [[서장훈]]이 FA로 잔류에 실패하면서 당시 최고액이었던 4억이 넘는 금액과 함께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전력이 급격하게 약화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여담으로 당해 시즌을 앞두고 서장훈의 보상선수로 받아온 [[우지원]]을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현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로 트레이드하면서 [[김영만(농구)|김영만]]과 재회하게 된다. 그러나, 시즌 중 김영만을 다시 [[창원 LG 세이커스]]로 보내고 [[조성원]]을 데려온다.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는 지금까지의 성과도 있고 해서 최인선 감독에게 1년 계약 연장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고 물러나게 된다.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이후 SK 나이츠는 본격적으로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예전만큼 전술과 전략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지휘 중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마음이 여린 모습까지 보이면서 농구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사실 최인선 감독 이후 SK 나이츠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6년뒤인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2001-2002 KBL 통합우승 신화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농구|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신화를 이끌었던 [[김진(농구인)|김진]] 감독이 2007-2008 시즌 6년만에 플레이오프를 이끌기도 했다. 추가로 SK 나이츠가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적이 [[문경은]] 감독이 이끌었던 2012-13, 2013-14, 2014-15 시즌을 빼면 없기도 하다. [[문경은]]은 12-13 시즌 SK 나이츠의 창단 첫 KBL 정규리그과 17-18 시즌 18년만에 KBL 플레이오프 우승을 이끌면서 암흑기를 벗겼다. 추가로, 자신을 넘은 [[김진(농구인)|김진]] 감독 또한 SK 나이츠의 흑역사를 잠시 벗겼던 감독이었으며 한 때 감독 후보에 있었던 [[창원 LG 세이커스]]에서 [[김태환(농구)|김태환]] 감독도 해내지 못했던 13-14 시즌 창단 첫 KBL 정규리그 우승으로 명장의 클래스를 증명했다. === 통산 감독 성적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경기수}}}''' || '''{{{#ffffff 승}}}''' || '''{{{#ffffff 패}}}''' || '''{{{#ffffff 정규시즌}}}''' || '''{{{#ffffff 플레이오프}}}''' || || 1997 ||<|2>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 21 || 16 || 5 || 1위 || '''{{{#gold 우승}}}''' || || 1997-98 || 45 || 26 || 19 || 3위 || '''{{{#silver 준우승}}}''' || ||<-2> '''통산''' || '''66''' || '''42''' || '''24''' || '''0.636''' ||<-2> '''{{{#gold V1}}}'''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경기수}}}''' || '''{{{#FFFFFF 승}}}''' || '''{{{#FFFFFF 패}}}''' || '''{{{#FFFFFF 정규시즌}}}''' || '''{{{#FFFFFF 플레이오프}}}''' || || 1998-99 ||<|5> [[서울 SK 나이츠|청주/서울 SK 나이츠]] || 39 || 18 || 21 || 8위 || - || || 1999-00 || 45 || 32 || 13 || 2위 || '''{{{#gold 우승}}}''' || || 2000-01 || 45 || 30 || 15 || 3위 || '''4강 PO''' || || 2001-02 || 54 || 32 || 22 || 2위 || '''{{{#silver 준우승}}}''' || || 2002-03|| 54 || 16 || 38 || 10위 || - || ||<-2> '''통산''' || '''237''' || '''128''' || '''109''' || '''0.540''' ||<-2> '''{{{#gold V1}}}''' || ||<-2> '''총계''' || '''303''' || '''170''' || '''133''' || '''0.561''' ||<-2> '''{{{#gold V2}}}''' || === 종합 === 결과론으로 [[허재]]와 [[서장훈]]의 이적은 90년대 한국농구 최고의 명장이라는 최인선 감독의 커리어를 일찍 마감하게 된 비극과도 같다. 실제로 최인선 감독이 떠난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는 98-99 시즌을 끝으로 기아라는 이름과 함께 전성기는 끝나게 되고 [[서울 SK 나이츠]] 또한 동양-LG의 명장인 [[김진(농구인)|김진]] 감독이 부임하기 이전 이후 봄농구 조차 오르지 못했다. 99-00 시즌부터 01-02 시즌까지 3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6년뒤인 07-08 시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는데 6강에 그쳤다. 추가로 자신과 동갑이었던 [[김태환(농구)|김태환]] 이후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 후보군에 있었으나 건강문제로 인해 무산되면서 [[박종천(1960)|박종천]]과 [[신선우]]가 맡게 되었다. 한 때 [[이상범(농구)|이상범]] 감독을 경질한 [[안양 KGC인삼공사]]에서 기술고문을 맡았으며 차기 감독설까지 뜨기도 했으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반대로, [[김동광]] 감독의 경우 [[안양 KGC인삼공사|안양 KT&G 카이츠]]에서 경질된 2006년 이후 6년뒤인 2012년에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직에 재복귀를 하며 60대에도 KBL 감독직을 맡았다. 이후 방송해설과 KBL 경기이사 및 심판위원장 그리고 경기본부장을 맡으면서 방송해설을 계속맡았다. 건강이 이래서 중요한 듯. 본인도 수석코치직을 원했는데 무산된 점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 해설가 == 이후로는 건강상의 문제[* [[2005년]]에 대장암 3기 판정을 받고 암 투병 끝에 완치한 것으로 보인다. 보통 5년 내로 재발하지 않으면 완치로 보는 게 암인지라...]로 현장에서 사실상 은퇴, 이후 iTV 경인방송과 [[슈퍼액션]][* 당시에 [[전미 농구 협회|NBA]] 농구중계 해설을 맡았다. 경기 도중에 '최인선의 전력노트'라는 꼭지가 나온 바 있다.(몇몇 내용은 농구 전문 기자 [[손대범]]과 함께 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