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공산주의)] |||| '''{{{+1 카를 리프크네히트}}}[br]Karl Liebknecht''' || ||<-2>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KLiebknecht.jpg|width=100%]]}}} || || '''본명''' ||카를 파울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리프크네히트[br]Karl Paul August Friedrich Liebknecht|| ||<|2> '''출생''' ||[[1871년]] [[8월 13일]] || ||독일 제국 [[작센 왕국]] [[라이프치히]]|| ||<|2> '''사망''' ||[[1919년]] [[1월 15일]] (향년 47세) ||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독일 제국)]→[[바이마르 공화국]]|| || '''가족''' ||^^'''아버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br]^^'''어머니'''^^ 나탈리 리프크네히트[br]^^'''배우자'''^^ 율리아 파라디스^^(1900년 결혼, 1911년 사별)^^[br]^^'''배우자'''^^조피 리프크네히트^^(1914년 결혼)^^[br]자녀 3명|| || '''학력''' ||[[베를린 대학교]]^^(학석사)^^[br]뷔르츠부르크 대학교^^(박사)^^|| || '''직업''' ||변호사, 정치인, 혁명가|| || '''종교''' ||무종교 (무신론)|| || '''정당''' ||[include(틀:독일 사회민주당)](1900~1914)[br][include(틀:독일 공산당)](1914~1919)|| [목차] [clearfix] == 개요 == [[독일 제국]] 시기 활동한 [[사회주의|사회주의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쟁 협력에 반발하였으며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결성하여 공산혁명을 시도하였으나 [[자유군단]]에게 진압당한 후 룩셈부르크와 함께 처형당했다. 오늘날 독일 좌파 진영에서는 룩셈부르크와 함께 [[순교자]] 포지션을 차지하는 인물. == 생애 == 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독일 사회민주당]] 창당의 주역이었던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아들로 1871년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했다. 이후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아버지가 아버지였던 만큼 그 역시 열렬한 [[마르크스주의|마르크스주의자]]였고 사민당에 가입하여 각종 사회 운동을 하는 한편 좌익 활동가들의 변호를 담당하였다. 당시 독일 내에서 완연하였던 [[군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총파업과 민중궐기를 통해 군국주의를 무너뜨리고 독일의 민주화를 쟁취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위와 같은 내용의 칼럼을 작성하였다가 필화를 당해 1907년 징역 18개월을 선고받는다. 사민당 내에서도 [[극좌]]로 분류되었던 그는 1914년 [[사라예보 사건]]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외교적 위기 과정에서 단호하게 반전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의 입장과는 달리 [[카를 카우츠키]]가 주도하는 사민당 지도부가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독일의 전쟁 수행을 지지하는 것을 당론으로 정하고 만다. 결국 1914년 12월 당의 지침을 어기고 전쟁 예산안에 반대표를 던지면서 당에서 축출당했다. 한편 이 무렵부터 리프크네히트는 자신과 의견을 함께하는 당내 반전세력들과 하나의 정치적 단체를 결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스파르타쿠스 연맹]]. 대표적인 인물은 [[로자 룩셈부르크]], 그 외에도 클라라 체트킨, 프란츠 메어링 등이 있었다. 당연히 스파르타쿠스 연맹은 창설과 거의 동시에 불법단체로 찍혀버렸고 격노한 [[높으신 분들]]은 [[면책 특권]] 따위는 상큼히 씹어주시고 리프크네히트를 체포하여 강제로 [[동부전선]]으로 보내버린다. 반전주의자였으니 당연히 집총을 거부했고, 그래서 시체 매장이나 부상병 치료같은 일을 맡았다고 한다. 1916년 5월 석방되자마자 리프크네히트는 다시 스파르타구스단 활동을 재개했고 당연히 또 체포됐다. 반역 혐의로 4년형이 선고되었으나 1918년 독일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면서 그 역시 석방된다. [[독일 혁명]]을 맞이하여 1918년 11월 9일 [[베를린]]에서 독일 자유 사회주의 공화국(Freie Sozialistische Republik)의 수립을 선언한다. 문제는 같은 날 같은 베를린에서 [[필리프 샤이데만]]과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시간상으로는 리프크네히트의 선언이 한 두 시간 정도 빨랐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기반으로 1918년 12월 31일 [[독일 공산당]](KDP)이 창당됐고, 공산당 창당 직후인 1월 4일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발발한다. 리프크네히트 본인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해서 봉기를 반대했지만 강경파들이 밀어붙였고 리프크네히트 역시 울며 겨자먹기로 참여한다. 봉기는 2주 가량 지속됐지만 독일 정규군과 [[자유군단]]까지 동원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결국 진압당했고, 1월 15일 리프크네히트는 동지였던 룩셈부르크와 함께 자유군단에게 체포당했으며 직후 총살된다. 그 당시 자유군단은 '리프크네히트가 탈출하려다가 총에 맞았다.'라고 공표했지만, 오늘날에는 자유군단이 리프크네히트를 처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망 이후 수습된 그의 시체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스펠데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이후 [[동독]] 정부가 이 공간을 사회주의 혁명가들과 동독 정치인들에 대한 추모공간으로 꾸며 놓았고, 현재까지도 이 공간은 사회주의자 묘역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다. == 저서 == *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Militarismus und Antimilitarismus) == 기타 == 현재 [[베를린]]에 위치한 [[독일 좌파당]]의 당사 명칭은 카를 리프크네히트 하우스(Karl Liebknecht Haus)다. 참고로 좌파당의 [[싱크탱크]] 명칭은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이다. 이들의 삶은 아직도 독일의 많은 좌파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예시가 되겠다. [[분류:독일 제국의 정치인]][[분류: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인]][[분류:1871년 출생]][[분류:1919년 사망]][[분류:라이프치히 출신 인물]][[분류:총기에 죽은 인물]][[분류:전쟁 사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