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보르지긴 가문]][[분류:아일랜드 신화]] [목차] == [[몽골 제국]]의 장군 == Hasar/Хасар (1164 ~ 1214/1219) [[몽골 제국]]의 개국 공신이자, [[칭기즈 칸]]의 첫째 아우. [[호엘룬]]의 차남으로 본명은 주치('손님') 카사르이다. 여러 사서에서는 카사르가 칭기즈 칸(테무진)보다 무술이 뛰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활솜씨가 매우 뛰어났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는 형을 도와 많은 공을 세웠다. 《[[원조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이 서형 [[벡테르]]를 죽일 때도 함께 했다. 1203년 [[케레이트]] 족장 [[옹 칸]]의 황금 장막을 공격할 때 그는 가짜로 항복하는 척하면서 옹 칸의 진영에 침투해 케레이트를 혼란에 빠뜨리는 역할을 했고('''제지르 운두르 산 전투'''), 또한 1204년 동[[나이만]]의 타양 칸과의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동나이만군을 상대로 엄청난 무용과 지휘를 선보이면서 동나이만 본대를 붕괴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칭기즈 칸은 이러한 카사르의 공을 치하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이러한 업적을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때마침 카사르와 사이가 안 좋던 [[텡그리 신앙|텝 텡그리]][* 본명은 코코추로, 칭기즈 칸의 제1공신인 뭉릭의 장남이었는데 카사르를 모함한 걸로도 모자라 칭기즈 칸의 막내동생 [[테무게 옷치긴]]과도 갈등을 일으킨 끝에 테무게에 의해 죽었다.]가 칭기즈 칸에게 카사르가 칸을 상대로 반란을 꾸민다는 모함을 했다. 이에 칭기즈 칸은 카사르를 붙잡아와 옷을 벗겨 [[수레]]에 매단 뒤 채찍으로 때리는 형벌을 내렸으나 호엘룬이 칭기즈 칸을 꾸짖어서 카사르는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칭기즈 칸은 카사르가 받은 호의 수를 줄여 그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카사르의 일족들은 이후 [[테무게 옷치긴]]의 일족, 카치운 알치의 일족과 함께 만주와 요동 일대를 장악하는 [[동방 3왕가]]를 이루게 되었다. 카사르의 후손으로는 제5차 [[여몽전쟁]] 때 총사령관이었던 아들 [[야쿠]]가 있었다. == [[아일랜드 신화]]의 인물 == [Include(틀:아일랜드 신화사)] {{{+2 Ceasair}}} 《[[에린 침략의 서]]》에 등장하는 인물. 《[[판타지 라이브러리]]》에는 "[[퀘사르]]"라고 나온다. 《에린 침략의 서》에서는 [[노아]]에게 《[[성경]]》에 나오지 않는 아들 "비흐"가 있었다고 한다. 비흐와 아내 "비렌" 사이에 태어난 딸이 카사르다. 카사르는 [[노아의 방주]]에 타기를 거부했고 [[우상]]을 만들어 도움을 청하자 우상이 세상의 서쪽 끝 [[에린]] 땅으로 가라고 했다. 카사르를 따르는 무리들은 3척의 배에 나눠타고 항해 끝에 에린 땅에 닿았는데, 상륙하기 직전 배 2척이 침몰해 여자 50명과 남자 3명([[핀탄 막 보크라|핀탄]], 비흐, 라드라)만 살아남았다. 여자들은 남자 셋에게 분배되었고, 남자들은 여자 1명씩을 처로 삼고 나머지는 [[첩]]으로 삼았다. 카사르는 핀탄의 처가 되었다. 그런데 비흐와 라드라가 얼마 못 가 죽으면서 모든 여자들이 핀탄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핀탄은 이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연어]]로 둔갑해 도망쳤다. 그리고 이들이 에린 땅에 도래하고 40일 뒤 대홍수가 시작되어 연어로 둔갑한 핀탄을 제외한 나머지 여자들은 모두 물에 잠겨 죽었다. 《드럼스나트의 서》라는 지금은 실전되고 없는 책에서는 에린에 처음 도착한 것이 [[에리우]], [[반바]], [[포들라]] 세 자매와 그 남편들 에후르 막 쿠일, 테후르 막 케크트, 케후르 막 그레네였다. 알다시피 이들은 [[투어허 데 다넌]]의 마지막 왕들과 왕비들의 이름이다. 이 세 여신과 세 남신이 기독교화되면서 카사르와 핀탄 이야기로 대체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카사르 이야기는 순수한 켈트 신화가 아니고 신화를 채록, 정리한 [[천주교]] [[수도자]]들이 노아의 대홍수라는 기독교 신앙상의 확고한 역사(물론 중세 기준 이야기다)에 연대를 끼워맞추기 위해 창작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