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일본의 세계유산)] ||<-3> '''[[유네스코|{{{#fff 유네스코}}}]] [[세계유산|{{{#fff 세계유산}}}]]''' || ||<-3>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width=160]] || ||<|4> 이름 || 한국어 || 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기독교 유적지들 || || 영어 || Hidden Christian Sites in the Nagasaki Region || || 일본어 || 長崎と天草地方の潜伏キリシタン関連遺産 || || 프랑스어 || Sites chrétiens cachés de la région de Nagasaki || |||| 국가·위치 || [[일본]] [[나가사키현]], [[구마모토현]] || ||<-3> [include(틀:지도,장소=오우라 천주당, 너비=100%, 높이=224px)] || |||| 등재유형 || [[세계유산#s-3.1|문화유산]] || |||| 등재연도 || [[2018년]] || |||| 등재기준 || (iii)[*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 |||| 지정번호 || [[http://whc.unesco.org/en/list/1495|1495]] || || [[일본어]] ||隠れキリシタン || [목차] [clearfix] == 개요 == '[[샤이 지지층|숨은]] [[크리스천]]'이라는 뜻으로 [[일본]]의 [[에도 시대]] 무렵, 극도의 종교 탄압에 [[가톨릭]] 신자들이 음지로 숨어들어, 사제가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비밀리에 종교생활을 지속한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기독교]] 탄압은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신정부가 들어선 [[1873년]]([[메이지]] 6년)에 가서야 [[사이고 다카모리]]가 금교령을 폐지하면서 풀렸다. [[한국인]] 일본학자들은 '''잠복 키리시탄'''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한다. ~~숨독~~ 키리시탄 관련 유적이 있는 나가사키 일대에서도 잠복 키리시탄(潜伏キリシタン)[* 일본식 발음은 '센푸쿠 키리시탄']이라고 불렀다는데, 키리시탄 관련 시설이 해당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것을 계기로, 일본의 각종 미디어에서도 '잠복 키리시탄'이란 단어가 언론에 잠시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1873년 이전의 박해를 받던, 역사 속의 토착 가톨릭 신앙은 [[한자]]를 써서 카쿠레키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으로 표기하며, 1873년 이후에도 [[가톨릭]]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전의 신비주의를 유지하는 신앙은 [[카타카나]]를 써서 카쿠레키리시탄(カクレキリシタン)으로 다르게 표기한다. 물론 발음은 같다. 한때 모든 카쿠레키리시탄(의 자손)은 [[가톨릭]]으로 복귀했고, 가톨릭으로 복귀하는 것을 거부했던 카쿠레키리시탄은 [[1980년대]]까지 존재하다가 신자가 모두 죽자 사라졌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1991년 인류학자 크리스탈 웰란이 [[나가사키현]] [[고토시]]에 아직 존재함을 확인했다. 고토시가 워낙 외진 섬이라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고, 그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존재를 숨긴 채 신앙을 유지해온 만큼, 다른 오지에서도 남아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이들은 가톨릭교회에 복귀할 뜻이 없고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려고 하나, 젊은층이 이탈하면서 미래는 밝지 않다. == 발생: [[일본]]의 [[기독교]] 박해 == [[일본]]에 처음 전파된 기독교 종파는 [[가톨릭]]인데, [[센고쿠 시대]] 무렵 [[일본]]과 [[무역]]을 하던 [[스페인]],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전래되었다.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들은 [[서양]] 세력과의 [[무역]]으로 이득을 챙기기 위해 가톨릭 전래를 허가하였고, [[오토모 소린]]이나 [[타카야마 우콘]], [[이치죠 카네사다]],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구로다 조스이]] 등 스스로 가톨릭 신자가 된 다이묘도 있었다. 이 때 개종한 사람들을 일본에선 '키리시탄', 개종한 다이묘를 '키리시탄 다이묘'라 불렸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후, 히데요시는 각지의 [[다이묘]]들이 [[서양]]과 [[무역]]으로 이득을 얻어 세력을 키워 자신에게 대항하게 될까 우려하여[* 오토모 소린은 서양 선교사의 연줄을 통해 서양으로부터 [[불랑기포]]를 들여왔고, [[1586년]] 우스키 성(臼杵城) 농성 당시 [[시마즈 이에히사]]의 군을 상대로 큰 위력을 발휘했다. 심지어 소린은 '''불랑기포의 자체제작기술도 보유'''했던 듯하다. 다만 불랑기포는 일본 내에서 별로 반응이 좋지 않았는데, [[오토모 소린]] 항목 참조.] 그 첨병인 선교사를 겨냥해 [[https://ja.wikipedia.org/wiki/%E3%83%90%E3%83%86%E3%83%AC%E3%83%B3%E8%BF%BD%E6%94%BE%E4%BB%A4|바테렌(선교사) 추방령]][* 바테렌(伴天連)은 [[포르투갈어]] 파드레(padre)의 고어(古語)로, 가톨릭이 일본에 전래된 당시의 선교사나 신부에 대한 호칭이었다(출처: <동아시아 역사와 일본>)]을 내리고 1597년에 나가사키에서 [[일본 26위 성인|키리시탄을 집단 처형했다.]] 그리고 일부 [[광신도]]들이 [[신토]]와 [[불교]]는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신사(신토)|신사]]와 [[절(불교)|절]]을 습격해서 신체를 훼손하고 [[불상]]을 파괴하는 등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한 뒤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치세에 금교령(禁敎令)을 내리고, 가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후 외국과 [[번]]이 독자적으로 무역하는 것을 막고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각 번들에서도 다이묘의 성향에 따라 박해가 일어나기도 했다. [[파일:external/www.pine-o.co.jp/rakujo2.jpg]] 반군의 근거지였던 하라성(原城)을 공격하는 막부군. [[일본]]에서 [[가톨릭]]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계기는 키리시탄들을 중심으로 막부의 지배에 저항하여 대봉기를 일으켰던 [[시마바라의 난]]이다. 시마바라의 난을 겪은 뒤 에도 막부는 '키리시탄은 정권을 엎으려는 반란분자'라고 생각했으므로 [[후미에]] 같은 일을 벌여 키리시탄을 색출해서 죽이려 하는 등 철저한 박해를 가했다. 이러한 금교령은 에도 막부의 통치기간 내내 유지되었다. 이렇게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키리시탄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지만, 키리시탄임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에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그렇게 '''장장 250년 ''' 동안 숨어서 [[신앙]]생활을 했다. 이렇게 본인들은 숨는다고 숨었지만, 실은 [[에도 막부]] 역시 카쿠레키리시탄의 존재를 다 파악하고 있었다(…). 법대로 하자면 다 처형해야 하지만, 일본의 천주교도들은 정부에 '''무력 저항'''을 한 역사가 있으므로 한두 명이 아니라 수천 명 단위 단체가 발각되어 처형하면 '''제2의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그냥 사상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생각이 다른 자.]이라는 빠져나갈 수 있는 이름으로 부르며 눈감아줬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도 이노우에 지쿠고노카미가 [[후미에]]를 마친 로드리고에게 "아직 고토 열도 쪽에 숨어서 자기들끼리 믿는 키리시탄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잡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뿌리가 잘린 거나 다름없으니 서서히 말라 죽을 테고''', 애초부터 [[일본]]과는 맞지 않았던 기독교라는 서양의 묘목은 이 늪지와 같은 땅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고 변질되어 버릴 테니까." 하고 이죽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1800년대 초반이 되면 카쿠레키리시탄들이 다시 발각되는데, 키리시탄이 아닌 다른 이상한 종교로 간주하여 묵인하거나 배교만 시키고 풀어줬다. 시마바라의 난이 이미 터졌었던 [[아마쿠사]]에서 2백 년 만에 [[https://ja.wikipedia.org/wiki/%E5%A4%A9%E8%8D%89%E5%B4%A9%E3%82%8C|1805년에 '''또 대량으로''' 신자가 발각되었는데]] 막부에서는 이들에게 강제로 후미에 및 배교 서약서를 쓰게 하고 사건을 덮어버렸다. 사실 이 키리시탄들이 발각된 이유는 육식 금지령을 어기고 [[소고기]]를 먹었다가 들킨 것 때문이다. [[하이쿠]] 시인인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 가운데 君が代や茂りの下の耶蘇仏(천황 치세여, 우거진 수풀 아래 기독교 불상)이라는 시가 전하는데, 잇사가 [[규슈]]를 여행하던 중에 가톨릭 [[성상(조형물)|성상]]을 보고 읊었다고 한다. == 발견 == [[파일:external/oratio.jp/ooura-720x480.jpg|width=200%]]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개항 이후 외국인에 한해 신앙 활동이 허가되었고, [[나가사키시|나가사키]]에 새로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 당시에는 '후란스데라(仏蘭西寺)', 즉 [[프랑스]] [[절(불교)|절]]이라고 불렸다. 과거 전국시대~에도시대와 달리 19세기 일본에서의 가톨릭 포교는 동시기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프랑스인]] [[신부(성직자)|신부]]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곳은 일본 26위 성인 성당으로 불린다.]의 베르나르타데 프티장(Bernard-Thadée Petitjean.1829~1884) 주임신부는 일부러 [[성가]]를 부르며 다니는 등 [[선교]]를 시도했으나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성당에 구경왔던 사람들 가운데 카쿠레키리시탄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이 성모상을 보게 되면서 그들이 모여살던 마을에 '''"프랑스 절에 [[성모 마리아]]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쿠레키리시탄들 사이에는 당시로부터 250여 년 전 [[순교]]한 바스챤[* 세바스티아노라는 [[세례명]]을 받은 사람으로, 평신도 지도자였다고 전한다.]이 예언한 "7대가 지나면 흑선을 타고 파파([[교황]])가 보낸 콘페소르(고해신부)가 온다. 매주라도 콘삐산([[고해성사]])을 할 수 있다. 어디서라도 큰소리로 키리시탄의 노래를 부르며 걸을 수 있는 시대가 온다. 길에서 젠쵸(외교인)를 만나면 그가 길을 양보한다."라는 전승이 있었다. 이에 예언이 실현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1865년]] 3월 17일 [[금요일]], [[산파]] 이사벨라 유리의 가족과 동네 사람 13~15명(모두 카쿠레키리시탄)이 구경을 핑계 삼아 오더니, 기도하고 있던 프티 장 신부에게 '''"성모님을 공경하십니까?", "결혼은 하셨습니까?", "[[전례력]]을 지키십니까?"'''[* 이는 처음 [[가톨릭]]이 일본에 전해질 때가, [[유럽]]에서 한창 가톨릭과 [[개신교]]가 치고 박고 할 시기였기 때문. 그래서 이 3가지는 둘을 구별하는 단서로 카쿠레키리시탄 사이에 구전되었다. 그렇기에 카쿠레키리시탄들은 [[메이지 시대]]에 가톨릭과 함께 들어온 개신교에는 가지 않았다.]를 질문하였다. 이에 프티장 신부는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제는 결혼하지 않으며, 전례력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정확하게 이사벨라 유리는 "지금 저희는 슬픈 시간([[사순 시기]])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도 지킵니까?"라고 질문했다.] 키리시탄들은 그제서야 "우리의 마음도 신부님과 같습니다."라고 속삭인 후 "サンタマリアの御像はどこ? (성모 마리아님의 성상은 어디 계시나요?)"라고 물었다. 이에 프티장 신부가 안내해 주자, 그냥 구경 온 척하던 '''마을 사람 전원이''' 갑자기 몰려들어 기도를 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온 이들이 가톨릭 사제라고 확신하여 감추어 온 신앙을 드러낸 것이다. ||[[파일:오우라 천주당의 '신자의 재발견'.jpg|width=200%]]|| ||오우라 천주당에 새겨진 '신자 발견'을 그린 조각|| 1865년 [[3월 17일]]의 이 사건은 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로, '신자 발견'이라고 부른다. 프티장 신부는 이를 당시 [[요코하마]] 교구장 [[주교]]에게 보고하였다. [[일본]] 외부에서는 이런 신자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이들을 발견한 서양 신부들은 이를 '''[[기적]]'''이라고까지 말했다. [[도쿠가와 막부]]를 계승한 메이지 정부 또한 키리시탄 박해를 철폐하지 않아서, 이들을 굴비 엮듯 엮어서 좁은 방 안에 가두고 죽지 않을 만큼만 물과 음식을 주었다. 대놓고 [[고문]]을 하지는 않았으나, 좁은 곳에 많은 사람을 집어넣어 미어터지는 방 안에서 더위와 질병에 시달리게 하거나 추운 곳에 유배 보내 눈 오는 바깥에 방치하는 식으로 가혹한 탄압을 가하는 과정에서 여러 [[순교자]]가 나왔다. 이 일로 당시 일본과 통상 중이던 서구 열강들이[* [[미국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 [[영국 국왕]] [[빅토리아 여왕|빅토리아]],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 등.] '''기독교 신자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불평등 조약 개정도 없다'''며 메이지 신정부를 압박했다. 이때 일본은 [[외교]] 채널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는다. 그 자들은 기독교인이라서 박해받는 게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그들이 종교를 버린다면 풀어줄 것이다."라고 말해[* 그러니까 “종교 문제 때문인 건 맞는데 쟤들 기독교 아님. 어쨌든 아님.”이라고.] 실질적으로 키리시탄 박해였음을 에둘러 시인했다. 메이지 정부 내 [[존황양이]]파 인사 가운데는 "우리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저네들이 과연 [[불평등조약]] 개정해 주겠어? 이건 그냥 우리에 대한 기 죽이기고 [[내정간섭]]이잖아!"라며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고, 워낙 박해해온 세월이 길고 집요했다 보니 민중들 사이에서도 [[사교]](邪敎)로 각인되어 "키리시탄 박해 해금? 그거 꼭 해야 되나? 위험한 거 아냐?" 정도로 거부감이 적지 않았다. 한편 오랫동안 일본 민중들 사이에 신앙해오던 불교에 대한 강제적인 폐불훼석이나 국가신토를 따르지 않는 각지 신사에 대한 강제 통폐합 과정에서 불교계나 기존 신토계의 반발에 직면했던 메이지 정부가 마침 '[[공공의 적]]' 취급 받던 키리시탄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이용해서 그들의 반발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서양]]과의 교류를 희망하던 메이지 정부에게 있어 종교의 자유를 허하라는 서구 열강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기독교 신자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불평등 조약 개정 안 해준다'''고 나오니…[* 이는 서구 열강이 죄다 [[기독교]] 신자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당장 카쿠레키리시탄 발견 이후에 [[청나라]]에서 발생한 [[의화단의 난]]도 단순히 외세에 저항하는 운동이 아니라 [[중국]] 내 기독교 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제노사이드]]로 이어지자, 열강 국가들 내부의 여론이 대폭발하면서 열강들이 대규모의 군대를 파병해 개입하는 것으로 일이 커졌다. 현대에도 이런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ISIL]]가 자신들의 점령지에서 납치된 현지의 토착 기독교인들을 학살하고 개종을 강요하자, 이에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IS를 응징하자는 여론이 나오면서 직접 [[중동]] 지역으로 들어가서 의용군을 결성해 맞서싸우기도 했다. 아무리 [[정교분리]]가 잘 되어있는 국가라도 종교단체 자체가 종교에 관해서는 하나로 뭉쳐있는 거대한 세력이다보니 정치인들이 이들의 말을 마냥 무시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결국 [[1873년]] [[2월 24일]] 키리시탄들이 풀려났고,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가 금교령을 폐지하고 [[대일본제국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면서 카쿠레키리시탄은 대부분은 통상적인 형태의 가톨릭으로 원복하였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카쿠레키리시탄의 전승이 많이 변해서 "조상님의 종교는 그렇지 않다!"라며 자신이 믿는 종교의 원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가톨릭으로의 원복을 거부하고 카쿠레키리시탄으로 남는다. 이런 자들을 하나레키리시탄(離れ切支丹, 떨어져 나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다만 하나레키리시탄은 일본 내에서도 거의 [[천연기념물]]급이다. 대다수의 카쿠레키리시탄들은 다시 원복했기 때문.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카쿠레키리시탄들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라틴어]] 기도문도 역시 입에서 입으로 전수하여 공동체의 원로가 세례를 베푸는 식으로 전승하였다. 그런데 구전하는 동안 라틴어 기도문의 발음이 바뀌었으니, 도대체 어디까지를 천주교 기준으로 유효한 세례라고 인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세례성사]]는 받는 이가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일 의지가 있고 다른 이가 물을 이마에 부으며 "나는 [[삼위일체론|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사람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하는 '형상'만 충족된다면 '''무조건''' 유효하다. 이들이 보존한 라틴어 기도문을 읽은 것이 '그렇게 말한 형상'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세례가 무효화되는 것은 딱히 예민한 문제가 아니었다. 만일 이들의 세례가 무효하다면 제대로 된 형태로 다시 치러주면 그만이기 때문. 하지만 이들의 세례가 교회법적으로 유효한 세례라면 또 세례를 해주는 것이 되므로 민감했던 것. 가톨릭이든 정교회든 개신교든 세례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성사[*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고 박해도 심하던 곳에선 간혹 갓난아기가 세례를 2번 받는 사고(…)가 빚어지긴 했다.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한 번만 해줄 수 있었다.]이고, 세례를 여러 번 하는 것은 [[재세례파]]를 긍정하는 꼴이 될 수 있으므로… 프랑스 성직자들은 세례 기도문을 확인하여, 라틴어 발음이 정말 심각하게 변형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가급적 카쿠레키리시탄들이 받은 세례를 인정하기로 하였다. == 기존 가톨릭과 다른 점 == 이를 문화 연구의 관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흥미롭다. '원형 문화'와 '오랜 세월 동안 구전만으로 이어지면서 뒤바뀐 변형 문화'를 눈앞에서 확실하게 비교 대조해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사례로서, '''원형 문화와 변형 문화가 모두 확고하게 존재한다.''' [[가톨릭]]은 단일성을 유지한 채로 현재까지 굳건하게 살아 있으며, 원조 가톨릭의 입장에선 카쿠레키리시탄이 변형된 집단이지만 원조와 연락이 끊긴 채로 이어진 카쿠레키리시탄(특히 하나레키리시탄)의 입장에선 원조 가톨릭과 다른 점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막부의 박해 때문에 외국인 [[성직자]]들은 순교하거나 [[배교]][* 배교한 성직자 중에선 크리스트발 페레이라(포르투갈)과 주세페 키아라(이탈리아, 당시는 통일 국가는 아니었다)가 있다. 두 사람은 배교 후 일본식 이름을 받고 기독교 물품을 검열하는 자리를 받았다. 이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나온 소설이 바로 <[[침묵(소설)|침묵]]>.]하며 [[전멸]]해 버렸고, 외국 선교사에게 교육받아 [[일본인]] 성직자들이 탄생하기도 했지만 일본 기독교는 아직 스스로 [[성직자]]를 양성해낼 정도로 성숙한 단계는 아니었고 이들 역시 박해 때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싹 몰살당하고 말았다. 시마바라의 난의 지도자인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도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평신도였다. 게다가 [[포르투갈]]과의 무역이 완전히 단절되고,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와는 선교불허를 조건으로 제한된 [[무역]]만을 유지했기 때문에,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자신들을 지도해줄 성직자를 모셔오기는커녕 가톨릭의 본산인 [[교황청]]과도 일절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일본인 [[사제]]와 [[수도자]]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전술했듯 사제와 수도자를 직접 양성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스스로 양성해냈더라도, 어차피 교황청과 연락이 닿지 않으면 그들이 정식 사제였다고 보기도 힘들 것이다.) 다행히 초기 일본 가톨릭의 지도자들은 박해 때문에 완전히 성직자가 사라지고 평신도들만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몇 가지 교육자료를 남기고 신자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자료들은 향후 카쿠레키리시탄이 250년간 버티는 마지막 신앙적 보루가 되었다. 결국 숨어서 살아남은 신자들은 [[전례]]를 집전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이끌어줄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의 상황은 본문에 있으며 개항 이전에 배출된 마지막 일본인 사제인 [[고니시 만쇼]]가 [[1644년]] 순교하면서 개항 때까지 성직자가 없었다. [[1709년]] 이탈리아 선교사 [[https://en.wikipedia.org/wiki/Giovanni_Battista_Sidotti|조반니 바티스타 시도티]]가 밀입국했지만 카쿠레키리시탄 공동체와 접촉하지 못하고 막부에 잡혀 1714년에 옥사했기에 개항 때까지 성직자가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시도티 신부의 심문을 맡았던 막부의 관리 및 학자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시도티 신부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들은 서양 소식을 기록해 모은 서양기문(西洋奇聞)이라는 책에 있다. 아라이는 시도테 신부의 심문을 마치고 막부에 보고하기를 '그냥 본국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상책이고, 평생 가둬 두는 것이 중책이고, 처형시키는 것이 하책'이라고 했다. 시도티 신부는 자신이 연금되어 있던 기리시탄 저택의 하인 부부에게 기독교를 전도하다가 투옥되어 끝내 옥사했다.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는 당시 시도티 신부의 도일과 체포, 아라이 하쿠세키의 심문 과정부터 끝내 시도티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내용을 다룬 단편소설 '[[지구의]](地球儀)'를 썼다. 이 소설은 그의 단편집 <만년>에 수록되어 있다.] 자기들끼리 기억하는 몇 안 되는 [[구전]] 전승만으로 [[종교]]를 유지해야 했다. 사소한 성물도 기리시탄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경]] 내용도 온전히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 자신은 크리스천으로 남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구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250년이 지나는 동안 신자들의 신심과는 별개로 외형상으로는 상당히 다른 독특한 종교가 되어버렸다. ||
<:>[youtube(-oS9wR67mDE)]|| ||<:>카쿠레키리시탄의 성가.|| 큰 특징으로는 쵸우가타(翁方)라는 원로격 우두머리의 아래로 비밀 조직을 유지하며 주문 등을 전파하는 [[밀교(불교)|밀교]]적인 특성을 지녔으며, 탄압을 피하기 위해 각종 상징물에 몰래 종교적인 뜻을 담았다. 특히 [[불교]]로 많이 위장하였으며, [[불상]]에 [[불경]]으로 위장하여 기독교적인 문구를 집어넣거나 [[거울#마경|마경]]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다.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Virgin_Mary_disguised_as_Kanon_Japan.jpg|width=235]] [[파일: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의 마리아 관음 돌조각.jpg|width=250]] [[파일: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의 마리아 관음 도자기.jpg|width=250]] || ||<:>카쿠레키리시탄의 마리아 관음상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인데 위의 것들은 모두 '''[[성모 마리아]]상'''이다. 맨 앞의 [[불상]]을 자세히 보면 가슴에 [[십자가]] 무늬가 있는데 이런 성상은 성모상을 불상으로 위장했다고 하여 마리아 관음(マリア観音, 마리아 칸논)이라고 한다. 심지어 '삼존불' 형식 성상이 발견된 적도 있다. 당시 일본에서 원래 모양대로 성모상을 모셨다가는 "나는 키리시탄이오." 하고 자백하는 짓이라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있는 것들은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에는 있는 마리아 관음인데, 본디 [[불교]]에는 송자관음(送子觀音)이라 해서 아이를 안은 관음상이 있기에 자기네 신앙을 숨기기에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사실 이것은 [[가톨릭]]의 시각으로 보아도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모상이 [[현지화]]되는 것은 전 세계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양상이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에 설치된 [[제대]] 옆에도 [[한복]]을 입은 성모상이 모셔졌다. 카쿠레키리시탄들이 탄생하기 거의 천 년 전에 아시아에 와서 기독교를 전래한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에서는 '마리아 관음상'뿐만 아니라 '마리아 관음도'나 '예수 미륵도' 등 불화를 기반으로 한 '[[이콘|성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들이 외우던 기도문을 오라쇼([[라틴어]]: oratio)라고 하는데, 당시까지 전래되었던 [[라틴어]] 기도문을 음차하여 염불처럼 음률을 붙인 형태를 띠고 있다. 당연히 뜻은 제대로 모르고 그냥 소리나는 대로 외웠는데, 예를 들어 [[미사|성찬례]](미사)를 의미하는 'Eucharistia(에우카리스티아)'는 구전되면서 '요우카시치'로 바뀌고, 다시 '요우가노시치'가 되었다가 '요우가시치야'로 바뀌더니 [[한자]] 훈차 표기로 八日の七夜[* 요우카노시치야, 요우카=八日, 시치야=七夜]가 되어 본래의 의미를 짐작할 수 없게 되었다. 오라쇼는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현재는 [[일본]]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성호경]]을 예로 들면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Amen. >인 노미네 빠뜨리스, 엣 필리이, 엣 스삐리뚜스 상띠, [[아멘]]. >[[성부]]와 [[예수|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을 >いん なうみね ぱあちりす ゑつ ひいりい ゑつ すぴりつす さんち あめん >인 노-미네 파-치리스 엣 히-리- 엣 스피리츠스 산치 아멘.[* 역사적 표기법이기 때문에 なう는 '나우'가 아닌 '노:'로 읽으며, 어중, 어미에 오는 つ는 일반적으로는 '츠'로 읽지만 [[촉음]]이 될 수도 있다.] 으로 외우는 식이다.[* 이 외에도 많은 버전이 있다. [[https://www.google.co.kr/url?sa=t&source=web&rct=j&url=http://www.kjkin2000.com/Artboard/Library/fileDown.asp%3FstrBoardID%3Dnonpds%26intNum%3D1002%26intSeq%3D168&ved=0ahUKEwiB8pS4tv7PAhUHiLwKHbtlDUoQFggqMAc&usg=AFQjCNETxrkZJxkf_gRKr5Dk4KhypI9uKw&sig2=tFV4O4bNc_phHOqyE_oyjQ|이 논문]]의 16쪽 참고. 논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어 특유의 발음으로 라틴어 기도문을 표기하고 외웠던 것 뿐만 아니라 완전 다른 기도문인데 성호경인 경우가 꽤 있다.] 이들이 가톨릭으로 복귀한 직후인 1873년의 교리지도서 '세례성사'에서는 성호경을 다음과 같이 표기했다. >いん のみね ぱちりす えつ ひりい えつ すぴりとす さんち あめん >인 노미네 파치리스 엣 히리- 엣 스피리토스 산치 아멘. 일본어 음가 표기의 한계를 제외하면 다시 라틴어에 가까워진 것을 볼 수 있다. [[라틴어]]가 [[로망스어]]로 [[스트라스부르 서약|변해가는 모습]]과도 유사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성경의 내용은 두루뭉술하게 옛날 이야기처럼 구전되었다. 전승도 달라졌는데, 선악의 이분법적인 [[서양]]의 세계관과 달리 융합과 용서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내쫓긴 사건이 사라졌고, 이에 따라 '''[[기독교]]의 중심 교리인 [[원죄]]가 사라져버렸다.''' [[야훼|하느님]]에게 용서를 받은 것으로 되었다고 변개되었다.([[http://dylanzhai.egloos.com/3384808|참조]]) 또한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자신들의 신앙대상을 [[데우스]] 사마(님)라고 불렀다. 소토메, 고토 등 나가사키계 키리시탄의 전승 [[서적]]인 '''천지시지사(天地始之事)'''[* 키리시탄의 교리와 그 존재 의의, 신앙을 지켜야 할 이유를 적은 책]에는 기본적인 성서의 내용도 있지만, 아담의 자녀인 치코로우(ちころう)와 탄호우(たんほう)는 [[근친혼|남매인데 결혼하여 자녀를 보았다]]고 하는 등[* 원래 [[성경]]에 언급된 아담의 자녀는 그 유명한 [[아벨]]·[[카인]]·[[셋(창세기)|셋]] 뿐이다.], 일본 전통의 [[이자나기]], [[이자나미]] 설화가 혼합된 모습도 보인다. 카쿠레키리시탄이 문화적 가치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장 보수적이며 굳건해보이는 문화인 종교 문화조차도 철저한 탄압 아래에서는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뒤틀리기 마련이고 탄압 하의 일본 가톨릭 역시 원형에서 상당히 벗어나 변형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심을 유지하려는[* 제대로 된 성직자 없이 오랜시간을 보내오면서 형태는 달라졌어도, 사상이 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 인간 의지의 경탄스러움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전수된 문화가 원류와 접촉이 끊긴 후 어떻게 토착화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료이기도 하다. == 세계유산 == 2018년, 마을 10곳, 성 터 1곳, 성당 1곳까지 총 12곳의 유적이 '''[[나가사키현|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기독교 유적지들'''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나가사키시 중심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을 제외하면 대부분 낙도나 산 속 등 오지에 위치해있다. * [[나가사키현]] * [[나가사키시]] *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 * 소토메(外海)의 시츠(出津) 취락 : 시츠 교회 * 소토메(外海)의 오노(大野) 취락 : 오노 교회 * [[미나미시마바라시]] * 하라성 터(原城跡) * [[사세보시]] * 쿠로시마(黒島) 취락 : 쿠로시마 천주당 * [[히라도시]] * 히라도시마(平戸島)의 성지와 취락 : 야스만다케(安満岳), 가스가(春日) 취락 * 히라도시마(平戸島)의 성지와 취락 : 나카에노시마(中江ノ島) * [[고토시]] * 히사카지마(久賀島)의 취락 : 옛 고린(旧五輪) 교회 * 나루시마(奈留島)의 에가미(江上) 취락 : 에가미 천주당 * [[오지카초]] * 노자키지마(野崎島)의 취락 터 : 옛 노쿠비(旧野首) 교회 * [[신카미고토초]] * 카시라가시마(頭ヶ島)의 취락 : 카시라가시마 천주당 * [[구마모토현]] * [[아마쿠사시]] * 아마쿠사(天草)의 사키츠(﨑津) 취락 == 창작물 == 음지에 숨어 신앙을 수백년간 유지했다는것에 감명받은 사람이 많은지 일본산 창작물에서는 많이 언급되고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전반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 일본의 [[기독교]] 신자 비율은 인구의 1%에도 못 미친다. 일본의 경우 교회 결혼식이 유행하여 신자도 아니면서 교회에서 결혼을 하는데 이때 주례도 분위기를 맞춘다고 외국인 알바를 쓰는 게 유행하는 정도다.], 카쿠레키리시탄 자체가 은폐된 [[밀교]]라서 세세한 부분을 파악하기 어려운 탓인지 디테일하게 묘사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소설)|침묵]]도 카쿠레키리시탄과 이 과정에서 막부에 의해 배교하거나, 순교한 자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는 [[사일런스(2016)|항목 참조]]. 아마도 카쿠레키리시탄을 다룬 모든 창작물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또한 가톨릭문학으로서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 SF 단편 만화 모음집인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에 기재된 단편들 중 2번째 편인 <경귀전(鯨鬼傳)>이 있다. 카쿠레키리시탄들이 아직도 신앙을 숨기고 살던 에도 시대 말기, 그야말로 박해의 마지막을 달릴 시기 신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며, 또한 [[모비 딕(소설)]]을 오마쥬한듯한 스토리가 특징. * [[야마다 후타로]]의 소설 [[마계전생]]의 배경이 시마바라의 난과 연관되어 있다. 작중 메인 악역이 시마바라의 난에 가담했던 [[모리 소이켄]]으로, 소이켄은 마계전생 술법으로 과거 이름을 날린 검호들을 마계중이란 초인으로 부활시켜 막부를 빼앗으려 한다. 마계중 중에는 시마바라의 난을 지휘한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도 포함되어 있는데, 영화판에서는 아마쿠사가 생전에 남긴 유언을 반영해 소이켄이 삭제되고, 부활한 아마쿠사가 마계전생으로 마계중을 거느린다고 각색되었으며, [[이시카와 켄]]이 그린 만화판에서는 '''아마쿠사는 사실 [[사탄]]의 화신으로서(?)''' 마계와 현계를 잇기 위해 시마바라의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마계전생으로 다시 한번 재기를 노린다는 등, 미디어믹스가 나올수록 카쿠레키리시탄의 신앙과는 억만광년 떨어지다 못해 [[고인드립]]에 가까운(…) 전개가 나온다. *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에서는 아마쿠사식 십자처교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 등장. [[칸자키 카오리]]는 원래 여기의 프리스티스였다. 특징으로, 본디 박해를 받아 숨어들어 밀교가 되였던 것에서 기인한 일상생활의 행동이나 소품 등에 숨겨진 형태를 띠는 종교, 마법적 기술과 도구들을 쓰며, 변형되어 불완전해진 교리적 부분을 채우기 위해 여러 종교들의 기술들을 가져다가 꼬리를 물듯이 보완해서 본래의 십자교에는 없는 신을 죽이는 술법이나 다른 종교의 교리의 허를 찌르는 기술 등 독특한 기술들을 보유하는 점 등이 있다. *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 TVA 오리지널 에피소드인 『사마바라 편』의 메인소재로 쓰였다. 카쿠레키리시탄 신자들을 이끌고 있는 비천어검류 검객 [[아마쿠사 쇼고]]가 메이지 정부를 뒤엎어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 반란을 계획중인 가운데, 이를 주인공 [[히무라 켄신]] 일행이 막는다는 내용. * 소니의 호러 게임 [[사이렌 시리즈]] 역시 밀교와 신적 존재라는 점에서 이들의 존재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 [[사무라이 참프루]] 에피소드 19화에서 에도시대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한 키리시탄들이 등장한다. 천주교에 대한 막부의 종교탄압, 신앙심을 이용해 신자들을 모아서 불법 화약무기를 만들며 사기를 치는 사이비 키리시탄 교주 등의 내용이 개그스럽게 묘사된다. * [[상주전신관학원 팔명진]]에 등장하는 [[신노 아키카게]]의 이명 중 하나인 [[루시퍼|주스헬]]은 카쿠레키리시탄에서 쓰이는 용어. 또한 급단 사용시의 영창은 오라쇼에서 따왔다. * [[소년탐정 김전일]]에서 [[아마쿠사 보물 전설 살인사건]]의 주요 소재로 다뤄진다. 카루레키리시탄들이 숨긴 보물을 찾는다는 내용이며, 미유키와 김전일이 아사쿠사에 위치한 카쿠레키리시탄 박물관에서 관련 유물을 보는 장면도 나온다. * [[Fate 시리즈]]에 나오는 [[토오사카 가문]]의 선조 [[토오사카 나가토]]가 카쿠레키리시탄이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가문 대대로 [[성당교회]]측과 커넥션을 구축했다는 설정이다. 또한 [[아마쿠사 시로(Fate 시리즈)|아마쿠사 시로]]가 서번트로 등장한다. * [[검이 그대]]의 [[쿠로바 사네아키]]도 어머니가 카쿠레키리시탄으로 처형당했으며, 본인도 카쿠레키리시탄이다. * [[일본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13)|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주인공 쥬베이[* [[와타나베 켄]]이 연기했다.]가 과거 막부의 무사였던 시절, 카쿠레키리시탄 마을 하나를 전멸시켜 버린 전적이 있다. *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요괴헌터 시리즈]]의 단편 '[[생명의 나무(요괴헌터)|생명의 나무]]' '검은 탐구자 죽은자 되살아나다'에는 카쿠레 키리시탄의 후손들[* 그냥 카쿠레 키리시탄의 후손이 아니라,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최초의 인간인 '쥬스헤루'의 후손들이다. 그 때문인지 병이나 사고가 아니면 죽지 않지만, 그들의 수가 불어날 것을 우려한 신에 의해 일정한 때가 되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등장한다. *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의 등장인물 [[니죠 노리코]]는 이와는 반대로 [[가톨릭]]계 [[미션스쿨]]인 [[릴리안 여학원]]에 다니면서 취미가 불상감상이여서 스스로를 '역 카쿠레키리시탄'이라고 자조한다. 정발판에서는 '역 지하 크리스천'이라고 번역. * 요시무라 카나의 만화 [[무르시엘라고(만화)|무르시엘라고]]에도 작중 에피소드의 주요 꼭지로 등장한다. * [[공허의 소녀]]에 등장하는 주요 장소인 히토가타 마을도 카쿠레키리시탄이 만든 마을이다. 물론, 게임의 장르적 특성 답게 기독교의 원형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 * 현대에 들어와서는, 과거 [[한신 타이거스]]의 인기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칸사이 지방 사람을 표현하는 데도 쓰였다. == 같이보기 == * [[일본/종교]] * [[네덜란드 정월(オランダ正月)]][* 네덜란드 상인들이 나가사키에서 일본의 설명절 맞춰서 지낸 크리스마스 파티다.][* 네덜란드 등 개신교 국가들은 가톨릭 박해를 비웃는다는 인식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개신교도들은 박해받은 가톨릭에 동정심을 느끼며, 가톨릭의 식민정책을 보고 배웠고, 훗날 미국과 영국 등 개신교 국가들이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게 된다. 예를 들면, [[제너럴 셔먼호 사건]].] * [[덴쇼 소년사절단]] * [[아마쿠사 시로 토키사다]] * [[후미에#17세기 일본에서 쓰인 천주교 박해 도구]] * [[oratio]] * 옹기장수 - [[조선]]의 가톨릭교도들에게서 나타난 비슷한 사례. 박해받던 신자들이 [[옹기]]장수로 위장하여 동료 신자들을 찾아다니고, 선교활동을 했다고 한다. 훗날 [[김수환]] 추기경이 창설한 옹기장학회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며, 김 추기경의 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 또한 옹기장수로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분류:에도 시대]][[분류:가톨릭 박해]][[분류:일본의 가톨릭]][[분류:일본의 세계유산]][[분류:일본의 문화]][[분류:일본 기독교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