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일본 남가수]][[분류:1947년 출생]][[분류:2009년 사망]][[분류:후시미구 출신 인물]][[분류:일본의 자살한 인물]][[분류:자살한 가수]]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본명이 같은 루팡 3세 저자 만화가, rd1=몽키 펀치)] ||<-2> {{{+1 '''카토 카즈히코'''}}}[br] '''加藤和彦 | かとう かずひこ'''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atokazuhiko.jpg|width=100%]]}}} || ||<|2> '''출생''' ||[[1947년]] [[3월 21일]] || ||[[교토시]] [[후시미구]] || || '''사망''' ||[[2009년]] [[10월 16일]] (향년 62세) || || '''애칭''' ||토노반(トノバン) || || '''직업''' ||[[음악가]], [[가수]], [[프로듀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의 음악인.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와 [[사디스틱 미카 밴드]], 그리고 각종 프로듀서 활동으로 일본 가요 태동기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 바이오그래피 == ===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 === [Youtube(ieVYEYNBN-U)] 풋풋하던 감성을 엿볼 수 있는 데뷔작 帰って来たヨッパライ(돌아온 술주정뱅이) 영상 속 더벅머리의 남자가 카토다. [[교토]] 출신이었던 카토는[* 말이 교토 출생이었지, [[카나가와]]나 [[도쿄]]까지 전전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주재지를 자주 옮겼기에 지역 기반은 크지 않았다.] 본래 [[류코쿠대학]]을 다니던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음악과는 크게 연관이 없던 성장 배경이었다. 그러다 [[밥 딜런]]에 매료된 뒤 일종의 아마추어 동아리로서 포크 밴드를 하기로 결심, 잡지로 멤버들을 모집한 뒤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를 결성했고 언더 위주의 활동들과 싱글 발매로서 데뷔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취미에 가까웠던 밴드였던 만큼 앨범 하나 발매하는 추억거리만 만들고서 해산하고자 만든 취지로 결성된 정도였다. 멤버로선 키타야마 오사무(베이스), 히라누마 요시오(드럼)가 가입했는데,[* 재수생이던 이무라 미키오, 아시다 아키 역시 초창기 멤버로서 5인조로 활동했지만 둘은 수험 생활에 밀려 얼마안가 탈퇴했다고 한다. 아시다는 후에 대입에 성공한 뒤 복귀했지만, 얼마안가 재차 탈퇴.] 이들 역시 취미로 음악 생활을 하는 신분들로서 키타야마는 의대생, 히라누마는 가입 당시 고3 수험생 정도였다. 참고로 키타야마는 훗날 [[작사가]]로서도 명성을 떨쳤고 본업이던 [[정신과]] 학계에서도 네임드급 의사로 활약하는 비범한 성취를 이루던 인물이었다. 그렇게 내놓은 대표적 작품으론 帰って来たヨッパライ(돌아온 술주정뱅이), [[임진강(노래)|임진강]],[* 별도 문서에 소개된 내막처럼 정치적인 이유로 당대엔 발매금지 처분으로 앨범에도 실리지 못했다.] [[https://youtu.be/kP4oluZmjzA|悲しくてやりきれない(슬퍼서 견딜 수 없어)]][* 이 밴드의 또다른 대표작으로서도 자주 회자되는 곡으로, 후일 [[이 세상의 한구석에(애니메이션)|이 세상의 한구석에]] 애니메이션 ost로도 실리기도 한다.] 등의 싱글 위주였다. 그리고 자주 제작 앨범을 하나 소탈하게 발매한 채 소박한 목표를 이룬 밴드는 미련없이 해산하게 되어 각자의 본업으로 돌아간다. 허나 이들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수차례 소개되고 점차 대중 사이에서 급속히 회자되기 시작하며 노래 돌아온 술주정뱅이는 [[오리콘 차트]] 사상 최초로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는 싱글로 남게 되어버린다! 하여금 밴드의 주축이었던 카토 카즈히코는 각종 레이블로부터 러브콜을 쇄도받았고, 얼떨떨하던 처음엔 제안들을 거절했지만 이내 동료였던 키타야마의 설득을 받아들여 대학교 중퇴까지 불사하면서 단 1년 시한부 활동만을 조건으로 레이블에서 소개시킨 프로 멤버들과 함께 다시금 재결성하게 된다. 이때 1968년 발매된 정규 앨범 '[[https://youtu.be/L1AIP4tpfkc|紀元貮阡年(기원이천년)]]'은 일본 가요 태동기에서 꽤나 중요한 작품으로 다뤄진다. 그렇게 라이브 활동 등 전국 각지를 도는 왕성한 활동 끝에 약속대로 1년을 채운 밴드는 다시 해산하여 카토는 본격적으로 뮤지션의 길을 걷게 된다. 이 밴드는 후일 어느덧 원로가된 멤버들과 이벤트성으로 재결성 공연으로서도 재개하곤 했다. === [[사디스틱 미카 밴드]] ===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 활동 종료 이후론 당분간은 솔로로서 작곡 활동을 진행하게 된다. 유독 당대 음악의 메카였던 [[영국]]으로 왕래가 잦았다고 하며 국내외 각종 인물들과도 회동하며 인맥을 넓히기도 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카토에게 기타를 가르쳐달라며 구애하던 '후쿠이 미카'와 첫번째 결혼을 하게 되고서 실력 높던 세션들과 아내까지 포용하며 [[사디스틱 미카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이때의 활동은 별도 밴드 문서 참고. === 솔로 활동 === 그렇게 SMB를 일찍이 나와버린 그는 한동안 솔로 및 영상물들의 음악 감독 활동으로 뮤지션 생활은 이어나간다. 특히 80년대는 영상물 OST 작곡가로서 수많은 수상의 영예를 안는 등 프로듀서로서의 면모가 돋보이던 시기였다. 솔로 앨범으로서도 십수장의 다작을 이어오긴 했지만 상업적으론 크게 돋보이는 내역은 없었다. 그래도 4집 앨범 ガーディニア(GARDENIA)는 [[삼바]]와 [[보사노바]]가 융합되어 평은 좋았던 편이고[* 앨범 참여 세션들을 보자면 [[타카하시 유키히로]], 고토 츠구토시 등 SMB 시절 멤버들이 대거 참여한 점을 보아선 해체 이후로도 멤버들과 교류는 많았던걸 짐작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사카모토 류이치]], [[스즈키 시게루]] 등 정상급 세션들도 이 앨범에 참여했다.] [[시티 팝]] 애호가들 사이에선 자주 회자되는 수작이긴 하다. 당대 이름있던 작사가 [[야스이 카즈미]]와 1977년 재혼하여 둘은 작사작곡 듀오로서도 활약하기도 했다. 서브컬처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가 이들의 대표작으로 유명. 허나 야스이는 지병이었던 [[폐암]]에 시달리다 결국 [[1994년]] 길었던 부부 생활끝에 사별하고 만다. 밴드로서는 기존 포크 크루세이더스 멤버들과 라이브 활동으로서도 활동을 재개했고 SMB 또한 보컬을 [[마츠토야 유미]] 등을 객원 보컬로 맞으면서 3회 재결성을 갖기도 했고 그때마다 신보도 생겨나는 창작 활동도 왕성하게 이어갔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The Alfee]]의 사카자키 코우노스케와 함께 카즈코우(和幸)라는 밴드로 활동했다. 카즈코우로 활동한 마지막 공연은 그가 자살하기 한 달 전인 9월 20일에 열린 미나미 코우세츠의 콘서트. [[2009년]]자로 호텔에서 갑작스런 [[자살]] 소식으로 당대 음악계에 충격을 던졌다.[* 불과 사흘 전만하더라도 지인들과 식사도 하는 등 이상 징조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미 굴곡많던 인생 속에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오던게 큰 원인으로서 유서엔 창작 의욕이 떨어졌다는 호소도 발견될 정도였다. == 디스코그래피 ==